소설리스트

55화 (55/175)

 “아이, 참.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할 거야.”

 “원래 부모 앞에서 자식은 평생 어린애야. 수녀님, 우리 애 좀 잘 돌봐주시고 언제나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졸지에 파티원 앞에서 애 취급당한 그레이스가 뺨을 붉히지만 부모님의 사랑이 싫지만은 않은 듯 배시시 웃는다. 게임 진행 중에 파티원이 사라질 뻔한 기이한 현상을 제외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린 상황.

마을 주변을 맴돌던 오크는 굶주려 피해자를 만들 수 없는 수준이었고, 산으로 숨바꼭질하러 가 마을에 숨은 얍삽한 꼬맹이는 부모에게 끌려가 볼기가 터지도록 혼쭐이 났다고 한다. 그레이스의 마을은 안전하고 부모님도 설득하였으며―

[방송인 '한세아'의 캐릭터 퀘스트 클리어를 돕자 1/1 ※ CLEAR]

[보상 : 인터넷 자유 입장권 & VPN SYSTEM]

나는 존나 달달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보상.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자 귀신같이 한세아가 치고 들어온다. 드론이 대놓고 얼굴을 찍으니 눈동자를 굴려 인터넷을 열어 볼 순 없겠네.

카메라가 얼굴을 찍고 있는데 허공에 손가락질하면서 눈동자를 굴릴 순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흐흐 웃는 미친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크를 잡아 죽였으니 안전할 때 후딱 다녀오겠다며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마차를 몰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손을 흔들어주는 그레이스의 부모님을 등진 채 다각다각 출발하는 자그마한 마차.

 “일단 퀘스트 보상이 달달하긴 하네. 동료와의 인연을 시험한다 뭐 이지랄, 흠흠, 흥분하니까 말이 좀 험해졌다. 아무튼, 다들 예상했던 대로 보상은 각성석인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동료와의 유대를 시험받고 보상으로 별을 하나 더 붙여줄 수 있는 거지.”

-아무리그래도 방출이벤트는시발ㅋㅋ

-미래시만으로 오늘 뱅송 알찼다

-시발 남자한테 잘보이러 간다

비좁은 마차에 낑겨 앉아 풍경을 보는 척 열어본 채팅창에는 난리가 나 있었다. 물론 채팅창만 난리가 난 게 아니지. 실시간으로 게시글을 적는 놈들이 캐릭터 퀘스트에서 동료가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퍼트리지 않을 리 있나.

채팅창을 끄고 게시판을 보니 벌써 방송 캡처본을 첨부한 게시글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워낙 자극적인 소재다 보니 조금 점잖은 편이던 방송국 게시판도 꽤 폭주하는 모양.

―???:그러니까 남자한테 호감작을 하라고?

―15층 가기전에 꼭 해야할 것

―게이게이들 존나많네

―호감작이 love지 like가

그렇게 게시판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으니 비좁은 마차 내부에서 한세아가 아이린의 품 안으로 슬그머니 파고드는 게 보인다. 그레이스가 떠날 뻔했으니 아이린도 비슷한 일이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딱 느껴지네.

그런 한세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아이린은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한세아를 껴안아 준다.

 “아이린 언니. 언니는 모험가 생활 계속할 거죠?”

 “그럼요, 여신님의 뜻을 전파하는 일인데. …후후, 불안하셨나요?”

한세아가 거짓말을 워낙 못하다 보니 이제는 친해진 아이린에게도 속마음이 훤히 읽히는 모양. 안심하라는 듯 껴안고 있는 한세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는 모습에 채팅창에 다른 의미로 난리가 났다.

게이게이와 레즈레즈라는 단어로 도배가 된 채팅창. 채팅창도 게시판도 난리가 나서 보는 맛이 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둘 다 종료시켰다.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인터넷이니까.

카메라 드론이 내 맞은편 아이린과 한세아를 비추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 눈앞에 등장하는 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새하얀 인터넷 창.

텅 빈 하얀 화면, 중앙에 있는 길쭉한 검색창, 그 위에 떡하니 달려 있는 익숙한 로고.

 ‘저 문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전생에도 실컷 사용했던 글로벌 검색 엔진 G의 로고였다. 역시 가상 현실 게임을 제외하고는 거의 평행세계 수준으로 똑같은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생의 계정으로 로그인 시도를 해 봤지만 없는 ID라 뜨는 걸 보니 세상이 다르긴 한 모양.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팔짱을 낀 채 겨드랑이 아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홀로그램을 직접 누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마우스처럼 사용할 수도 있으니 발휘하는 약간의 꼼수.

아무리 한세아가 아이린에게 온 신경을 쓰고 있다지만 눈앞에 손가락을 몇십 번이고 휙휙 긁으면 눈치를 챌 거 아니야. 그렇게 은밀하게 인터넷 창에 입력한 건…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

익명의 게시판이다 보니 정신병자들이 많지만 그만큼 솔직한 의견도 많고 의외의 능력자들도 많아 제대로 된 정보 글도 많은, 게이머에겐 양날의 검 같은 사이트다.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

―✪ 히붕이들은 ‘진짜’다 [78] +102

―✪ 뉴비 꼬접함 [34] +84

―✪ 시발년들아철판으로막으라며 [109] +332

―✪ 뉴비들이 알아야 할 창녀촌 룰 [521] + 739

―✪ 니들 동료 호감작은 하고 갤질하냐 [482] + 598

이를 증명하듯 인기 글에 들어가니 제목만으로도 벌써 매콤하다. 한세아의 방송국이었다면 지워지다 못해 활동 정지를 당할 만한 게시글이 수두룩하게 눈에 띈다.

겨드랑이 밑에서 꼼질대는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창녀촌 게시글을 누를 뻔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누른 것은 그 아래에 있는 동료 관련된 이야기. 딱 봐도 한세아의 방송 이야기일 것 같아 클릭해본다.

―니들 동료 호감작은 하고 갤질하냐

[그레이스 부모님.JPG]

[마차에 타는 그레이스.GIF]

동료가 마차에 탈 수도 있고 안 탈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 퀘스트 클리어 전까진 동료가 동료가 아님

┗지랄하지마 진짜로

 ┗누가 탑오르라고 칼들고 협박함? 용병뛰러 갔으면 저런 걱정 안함

┗용병 뛰는데 동료가 없냐? 게임에서도 히붕이답다

┗시발 살다살다 NPC 발도 핥게 생겼네

 ┗한세아 방송 NPC 정도면 돈 내고 핥음

마차에 탄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수 백 개의 추천과 댓글이 달린 상황. 하긴, 동료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게 게이머로서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5★ 동료가 사라지면 그 유저도 나처럼 매크로를 돌리다 이세카이로 떠나지 않을까?

익명이 보장된 사이트다 보니 온갖 원색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웃기게도 한세아와 관련된 게시글 중 가장 많은 건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몸매 사진.

가죽 갑옷에 눌렸음에도 조금씩 출렁이는 그레이스의 옆 가슴이라던가, 바람이 불 때 수녀복이 달라붙어 몸매가 드러나는 아이린의 움짤이라던가. 대상이 한세아가 아니라 한세아의 NPC다 보니 온갖 원색적인 성희롱 댓글이 달려 있다.

 ‘어질어질하네.’

정말 귀신같이 포착해서 눈이 호강하긴 하지만 재미와 영양가는 없는 게시글. 손가락을 꼼질대며 게시글을 쓱쓱 내려 다른 게시글로 넘어갔다. 뉴비를 접는다는 게시글에 들어가니 보이는 건 만월 늑대의 부산물.

뉴비가 아니라 고인물로 다시 태어났음을 선언하는 게시글을 시작으로 김석현을 따라 철판으로 뿔늑대를 막다 근력이 부족해 바닥을 뒹구는 사람, 탑 외벽을 등반하는 걸 중계하는 사람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시글을 읽고 있으니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마차.

 “도착했습니다, 모험가님들.”

 “아, 고마워요 아저씨.”

홀로그램을 닫고 마차에서 내리니 마부와 인사를 나눈 그레이스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와 그레이스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두 여자. 인터넷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착 붙어 앉은 삼인방끼리 뭐라도 작당한 걸까.

말없이 그레이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서는 본론을 이야기한다.

 “어차피 도시로 돌아가는 마차는 내일 탈 거잖아?”

 “그렇지. 지금 찾아보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어.”

 “나랑 같이 백작령 구경 좀 하자. 어릴 땐 여기가 참 궁금했었는데 바로 모험가의 도시로 상경해버려서 여긴 와보질 못했거든.”

그레이스의 말을 듣고 슬쩍 한세아 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는 한세아와 한세아 옆에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아이린. 한세아야 속마음이 훤히 읽히니 그렇다 치고, 아이린은 뭐라고 말할까.

호기심을 가득 담아 재촉하듯 말없이 바라보니 무슨 중대한 결심을 하듯 양손을 불끈 쥔 그녀가 한세아의 말을 이어받는다.

 “저, 저희는 신전에 방문할 생각입니다. 두 분이랑은 따로 행동해도 될, 것 같아요! 그, 그렇죠 케이든 씨?”

 “…아, 네. 롤랑 님, 두 분과는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며 몇 번이고 저는 말까지. 누가 보면 일생일대의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래도 용병 생활로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케이든이 냉큼 아이린의 말을 받아준다.

아무래도 커플링 놀이에 꽤 진심이 되었는지 아이린까지 끌어들이는 모양새가 퍽 재밌다. 거절할 이유는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활짝 웃으며 내 옆에 달라붙는 그레이스.

 “어디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일단 시장부터 가자. 어릴 땐 커다란 시장이 정말 궁금했었거든.”

또다시 자연스럽게 내 팔뚝을 휘감는 손길에 몸을 맡기자 슬그머니 카메라 드론이 따라온다. 저 정도로 밀어주는 걸 보면 시청자 여론도 꽤 괜찮나 보네.

한껏 들뜬 그레이스의 기대와는 달리 콜마르 백작령의 영지는 그다지 볼 게 없었다. 마법사도 연금술사도 대장장이도 3일 거리 안에 있는 마법사의 도시로 훌쩍 떠날 테니까.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는 것처럼 여기서는 돈 벌려면 모험가의 도시로 향하는 거지.

그래도 좋은지 그레이스는 내 곁에서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다. 팔짱을 끼고 시장을 돌아보며 군것질을 한다. 중세 유럽의 시장에서 닭꼬치와 회오리 감자를 판다는 게 참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따라오는 카메라가 조금 거슬렸지만, 꽤 성공적인 데이트 아니었을까. 군것질하고 싸구려 팔찌를 사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어디서 만나지?”

 “그러네, 다시 만날 장소를 안 정했구나. 신전으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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