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의 우락부락한 전사 따위는 없었다. 거기에 있는 건 굶주리고 초췌한 몸뚱이뿐. 몬스터라는 놈 팔뚝이 동네 농부 팔뚝보다 얇은 수준이니 말 다 했지. 그 추레한 모습에 놀랐는지 카메라도 오크 주변을 빙빙 돈다.
얇은 팔, 퀭한 눈, 지저분한 피부에 녹슬고 볼품없는 무기와 흠집이 잔뜩 난 누더기 가죽 갑옷. 떠돌이가 아니라 노숙자 오크라 부르는 게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양새.
-요즘은 오크도 다이어트를 하네
-저 팔뚝이면 한세아 쉴드도 못깨겠다
-쟤들이 한세아보다 가볍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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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이 꽥꽥거리지만 자신들에게 닥쳐올 최후를 막아낼 순 없었다. 탑 안의 몬스터와 달리 시체가 남는 놈들. 걷어차고 박살 내면 그 잔해와 내장과 똥 따위를 뒤집어쓸 수 있으니 멀리서 죽여야지.
그레이스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 축구공을 걷어차듯 적당한 돌덩이를 발로 걷어찬다. 산탄총의 탄환처럼, 클레이모어처럼 산산이 조각난 채 펑! 하고 발사되는 돌조각들.
안타깝게도 오크의 가죽은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드는 수 백 개의 돌조각을 막아낼 정도로 질기지 않다.
“으, 우와….”
탑 내부에서만 생활해 간만에 시체를 보게 되어 잔뜩 일그러지는 그레이스의 미간. 한세아도 황급히 카메라를 자연 풍경을 향해 돌려버린다. 그러더니 우뚝 멈춰서서는 녹아들 듯 사라지는 카메라.
아무래도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하는지 시점을 다시 마을로 되돌린 것 같네.
카메라의 존재를 모르는 그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열심히 주변을 둘러본다. 품 안에 안겨서 그러니 귀여울 따름이지만. 그걸 느꼈는지 품 안에서 폴짝 뛰어내려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그녀.
“진짜, 뭐 없는 것 같아. 어린 애 기척은커녕 산짐승 기척도 안 느껴지네.”
“이 녀석들이 토끼를 잡겠다고 난리를 쳤으니 다 도망쳤겠지.”
“토끼?”
“내가 본 흔적은 모닥불이랑 먹다 남은 토끼였거든.”
날랜 발걸음으로 폴짝폴짝 뛰어 아이가 걸을 수 있는 곳을 귀신같이 체크하는 그녀. 물론 그녀의 날카로운 탐색 실력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역시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숨바꼭질하러 나온 어린아이가 10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다닐 리 없다. 약초꾼도 엄두를 못 낼 험한 골짜기를 탈 리도 없고. 어린애가 발로 걸을 수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뒤지지만 역시나 소득은 없다.
그레이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를 무슨 캐시 탈것처럼 타고 다니며 이 산맥, 저 산골짜기 열심히 뒤져보지만, 성과는 당연하게도 없는 상황.
“역시, 여기도 없네.”
“다른 흔적도 없지?”
“맞아. 오크는 그놈들이 전부인가 봐. 약초꾼조차 덮칠 능력이 없어서 여자나 애들을 노리려고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었나 본데.”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나오는 건 오크 놈들이 어떻게 마을에 접근하고 있었는지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뿐. 사라진 소녀가 6★탱커와 3★ 견습 레인저의 눈을 피하는 숨바꼭질의 귀재일 리는 없겠지.
내 도움을 받아 마을 주변을 두어 바퀴 정도 탐색한 그레이스도 이제야 마음을 놓는다. 애가 돌아오지 않는다지만 위험한 곳에는 없었으니 어디서 깜빡 잠이라도 들었겠거니- 하는 느낌.
“돌아가자. 더 이상의 탐색은 무의미해.”
“그래…, 음?”
“뭐 해? 안아줘.”
당연하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리고 다시 내 품에 폴짝 뛰어올라 안기는 그녀. 산을 타는 내내 품에 안겨 있었다고 힘을 쭉 빼고 자동차 시트에 몸을 파묻듯 편안하게 자세를 잡는다. 물론 거절할 이유 따윈 없으니 부드럽게 안아 들고 마을로 향했다.
“아, 롤랑, 그레이스 언니! 없어진 애 찾았어요!”
“진짜? 어디 있었대?”
“숨바꼭질을 이기고 싶어서 혼자 마을로 돌아와서 숨었나 봐요. 마을 창고에 있는 지푸라기 더미에 숨었다가 깜빡 잠들었던 것 같아요.”
해가 지기도 전에 마을로 돌아가자 우리를 반기는 건 환하게 웃고 있는 한세아. 혹시나 하던 게 역시나가 되어 있었다. 한세아가 전해주는 희소식에 그레이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간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열 몇 살짜리 여자애가 산에서 시체로 발견되면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렇게 퀘스트가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그레이스? 너, 너 요녀석!”
의외의 복병이 등장한다.
※
-전투퀘인줄 알았는데 호감퀘였고
-둘만 보낸게 한세아표 빅픽쳐였나
-진짜 개좆같은 겜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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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함정이 있는건 개오바 아닌가
채팅창에 욕설 섞인 채팅이 우르르 올라오며 채팅창 매니저에 의해 빠르게 삭제된다. 그런데도 한세아는 시청자들을 만류하거나 분위기를 바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와, 진짜, 나 좆될 뻔했네. 뭐 이런 퀘스트가 다 있지?”
그녀도 등골이 서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떠돌이 오크의 흔적은 함정이었다. 사라진 소녀는 마을 창고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라진 소녀 또한 함정이었다. 중요한 건 퀘스트를 클리어하니 등장하는 그레이스의 부모님.
모험가가 되겠다고 가출해버린 딸내미를 붙잡고 엉엉 우는 어머니와 마을에 돌아올 생각이 없겠냐고 진지하게 설득하는 아버지가 이 퀘스트의 진짜 내용이었다.
“아니, 이거 평소에 호감작 안 해놨으면 그레이스 언니가 모험가 생활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다는 거야? 진짜 롤랑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NPC의 스탯창에는 다양한 지표가 있지만 호감도 따위는 없었다.
이 게임은 탑을 등반하는 게임이지 NPC를 꼬셔서 이챠이챠 엄한 짓을 하는 게임이 아니니까. 한세아가 NPC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비록 게임 캐릭터지만 성격이 마음에 들고 파티 돌아가는 모습이 씹덕 기질 다분한 그녀의 본능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한 남자를 찾기 위해 모험가가 된 시골 처녀. 예비 성녀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마음씨 고운 수녀님. 공녀의 신분을 숨기고 남장을 한 채 용병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어린 소녀. 그리고 그런 여캐들과 조금씩 엮이기 시작한 금발의 꽃미남 롤랑.
“숲에 들어갔는데 탐색꾼이 떠나버리면, 어? 이끼늑대 기습은 누가 탐지하고 다음 층 통로는 누가 찾아내는데. 와 진짜, 어? 진짜로….”
방송인 이전에 게이머고, 게이머인 동시에 약간의 오타쿠 기질이 있는 게 그녀, 한세아. 대놓고 호감을 표하는 그레이스 말고도 파티에는 볼거리가 한가득 있었다.
아이린은 롤랑의 선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오는 길에 그 착한 아이린이 눈으로 째릿! 하고 눈치를 주지 않았던가. 남장 여자 케이든은 서브 컬쳐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니까 같은 텐트에 밀어 넣고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보고 싶다.
방송 각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 파티원들을 이렇게 저렇게 엮을 계획을 잔뜩 세워 둔 게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15층가기전에파티원호감작부터하러가~
-롤랑한테 잘 보여라 6★ 도망가면 답 없다
-시발 롤랑이 재미 없다고 튀면ㅋㅋㅋㅋ
-예비성녀랑 팔라딘 날아가면 나가리여
아무리 현실적인 게임이라지만 평소 친분을 다져놓지 않았다면 영입해 둔 파티원이 훌쩍 떠나버릴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게 퀘스트의 탈을 쓴 시험일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 한 상황
채팅창도 게시판도 개판이 되어 온갖 의견을 토해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레이스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
가출한 딸내미를 품에 안고 엉엉 우는 어머니를 달랜 건 롤랑의 힘. 6★이자 상급 모험가이자 과거 마을을 구원했던 남자가 지켜준다는 말에 그레이스 어머니의 마음을 겨우 돌려놓았다.
그렇게 어머니를 설득하자 아버지 또한 고개를 끄덕여준다. 전직 레인저였던 만큼 그레이스가 입고 있는 가죽 갑옷과 챙겨온 활이 이런 개척민 마을에서는 꿈도 못 꿀 귀중품이란 걸 알아차렸으니까.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이거 날 잡고 그레이스 언니를 밀어줘야겠는데? 히어로즈 크로니클 장르 한 번 바꿔 봐? 롤랑세스 메이커 해서 음?”
물론 해결된 이상 방송 콘텐츠 거리지.
등골이 서늘한 건 서늘한 거고,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었으면 남은 건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할 방송 각과 수금 타이밍뿐이다. 방송 주인공인 자신보다 인기가 많은 롤랑을 소재 삼으니 욕망 가득한 채팅과 도네이션이 밀물처럼 쏴아- 밀려 들어오지 않나.
-롤랑세스 하기 전에 아이린부터 챙겨
-신전에 헌금하러 가야하는거 아님?
-이거보고바로호감작하러감
-일단 보벼 존나게 보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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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의 서늘한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캐릭터 퀘스트 스토리가 정신 나간 것 같아.
오크를 잡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숨어 있던 소녀를 찾아야 하고, 소녀를 찾았더니 그레이스의 부모님이 튀어나와 모험가 생활 때려치우고 마을로 돌아오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그 어질어질한 전개에 표정이 딱딱히 굳은 한세아.
물론 술김에 나를 덮치고 나선 공공연하게 내게 호감을 표하는 그레이스가 꺾일 리 없다. 부모님을 무사히 설득하자 그제야 평상심을 되찾은 한세아. 퀘스트 보상으로 가챠 캐릭터가 사라지면 게임사에 유저들이 불 지르러 가지.
“도시에서도 몸조심하고. 그래도 수녀님이랑 함께한다니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