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놓고 말해서 저 정도로 굶었으면 이끼늑대나 투구사슴한테도 치여서 죽을 수준이다. 계층으로 치면 대충 10층, 병약한 고블린보다 강하지만 뿔늑대보다 약한 레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맥을 다 뒤져보지만, 오크 네 마리를 빼면 너무 평화로운 동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봉우리를 넘어 다른 산까지 뛰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떠돌이 오크 네 마리를 제외하면 이제 막 성체가 된 곰 한 마리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게 마을 터 하나는 진짜 잘 잡긴 했네.
"그레이스? 저 건물에 있을겨."
"벌써 다녀왔다구?"
이쯤 되면 허탈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오우거 같은 게 있었으면 팔다리 병신으로 만들어서 오크 둥지 옆에 기절시켜 둘 텐데. 마을로 돌아가 어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경비 아저씨에게 안내를 받는다.
허름한 목조 건물이 대다수인 아담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돌로 지어진 튼튼한 집.
딱 봐도 마을의 높으신 분이 산다는 걸 자랑하듯 혼자 때깔이 곱다. 물론 개척민 마을의 오두막보다 곱다는 거지 도시에 있으면 가난한 장인의 공방 수준.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니 때맞춰 일행들이 집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사이에 껴 있는 건 가죽옷을 입은 남자.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게 왕년에 한 끗발 날렸다는 걸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롤랑! 산에서 뭐 발견한 거 있어?"
몇 년 전 잠깐 본 동네 아저씨의 얼굴을 외우진 않았지만, 그레이스가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걸 봐선 그녀의 아버지겠지. 마을 촌장과 그레이스의 아버지로부터 퀘스트, 아니 의뢰 설명을 들었나 보네.
"떠돌이 오크 맞더라. 다른 특이한 건 못 봤어."
"혹시… 어린애는 없었어?"
근데 이건 무슨 소리야.
슬쩍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니 다들 걱정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오크 잡으러 와서 어린애 이야기가 왜 나오나 했더니 머리에 한 가지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아까 생각했던 피 묻은 스카프 스토리.
마을 사람이 사라진 것보단 마을에 있던 어린 애가 사라지는 게 더 똥줄이 타겠지. 호기심 많은 애가 가지 말라는 산에 갔는데 하필 그곳이 오크의 흔적이 있는 곳…. 그럴 듯하면서도 뻔한 스토리다.
"없었어. 산맥을 다 뒤져봤는데 어린애는커녕 사람 흔적도 못 봤는데."
"어… 진짜?"
이어지는 설명은 내 짐작 그대로였다. 오크의 흔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애들에게 산에서 놀지 말라고 당부하는 어른들. 하지만 어른이 하지 말란다고 정말 안 하면 애가 아니지. 동네에서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애들 몇 명이 산에 숨바꼭질하러 가서는 한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발견한 게 뜯어 먹힌 토끼지 뜯어 먹힌 소녀가 아니라는 점. 그 사실을 모르는 일행들의 안색은 여전히 어둡지만,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산에 없었으니까 뭐, 어디 마을 구석에 숨어 있겠지.’
나는 내 능력을 믿으니까. 전투마보다 빠른 다리로 마을 입구에서 산봉우리까지 뛰어가 인근 산맥을 다 뒤졌다. 혹시나 위험 요소, 아니면 방송 거리가 있을까 뛰어서 옆 산까지 뒤져봤다고.
숨바꼭질하는 어린 여자애가 산에서 나보다 빨리, 멀리 달렸다? 6★ ‘말괄량이’ 캐서린 이딴 말도 안 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지. 그래도 상대가 어린 소녀다 보니 마음씨 여린 일행들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저, 롤랑?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말해 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한세아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레이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라기보다는 욕망이 가득한 눈동자가 수상쩍기 그지없네. 그래도 말은 들어봐야 하니 말 해 보라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자 나와 그레이스를 열심히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한세아가 제안하는 뚱딴지같은 소리.
"롤랑이 그레이스를 업고 뛰죠."
"…음?"
"롤랑한테 업히라고?"
지금 당장 아이를 찾으러 가자고 하거나, 아이는 무사할 거라고 마을 사람을 안심시키거나 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역시 인터넷 방송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엉뚱한 해답.
그 덕에 무의식적으로 켜버린 채팅창 또한 난리가 나 있었다.
-기승전롤랑센세부탁해요
-근데 그 속도로 탐색이 되냐
-도시 뛰어다닐때 까리하긴 했음
-이럴거면 롤랑이랑 그레이스만 보내지 그랬냐
-개소리야 한세아가 카메라맨인데 ㅋㅋㅋㅋ
게이머다운 방식이라기보단 가상 현실 게이머다운 방식이라 해야 할까. 한세아가 당차게 내놓은 해결책이 황당하면서도 웃긴 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인 모양. 물론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견을 밀어붙이는 그녀.
그레이스의 소매를 쭉쭉 잡아끌어 내 곁으로 밀더니 씨익 웃어 보인다. 이거 불침번 때도 슬쩍 밀더니 이번에도 나와 그레이스의 스킨십을 유도하는 건가.
"우리 중 가장 발이 빠른 게 롤랑이니까, 탐색 잘하는 그레이스 언니를 업고 둘이서 산을 뒤져봐요. 나랑 아이린 언니랑 케이든 씨는 혹시 모르니 마을에서 찾아볼 테니까."
고작해야 오크 따위에 3456★ 파티가 당할 리 없다는 굳은 믿음 때문인지 망설임 없이 파티를 쪼개는 한세아. 내가 산에서 오크의 흔적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도 그다지 싫지는 않은지 뺨을 살짝 붉힌 채 한세아의 손길에 어어, 하며 이끌려 오는 상황.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레이스에게 성큼 다가갔다. 영양실조 오크를 잡는 방송보다는, NPC끼리 꽁냥대는 방송이 더 보기 좋겠지.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다, 니이잇?!"
보여줄 땐 화끈하게.
망설임 없이 팔을 뻗어 한 손으로는 그레이스의 오금을, 다른 손으로는 어깨 쪽을 부드럽게 휘감는다. 타의로 공중에 붕 뜨게 된 그녀가 화들짝 놀라 버둥대지만 내게는 깃털보다 가벼운 수준.
어깨를 들썩거려 가벼운 그레이스의 몸을 퉁퉁 허공에 튕긴다. 자연스럽게 공주님 안기 자세가 되니 어정쩡하게 뻗은 팔을 내 목에 휘어 감으려다 눈을 마주치고는 수줍게 오므려서 제 가슴 앞에 올리는 그녀.
"그, 자네는…?"
"파티의 지도역, 상급 모험가 롤랑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긴 한데, 일단 탐색부터 마치죠."
졸지에 아버지 앞에서 처녀를 납치한 야만인이 된 기분인데.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학습 능력이 있으니 이 연약한 마을을 때려 부수지 않을 정도로.
풀쩍풀쩍 뛰어 오두막을 뛰어넘고 울타리를 건너뛰니 귓가에 울리는 기분 좋은 그레이스의 비명.
"흐야아앗―!"
"그러다 혀 씹는다!"
"그럼 좀 부드럽게 달려 주던가!"
달리기 시작하니 조금 불안한지 결국 곱게 모여 있던 손이 내 목을 안전 손잡이처럼 휘어잡는다. 그 덕에 차마 붙잡지 못한 가슴이 가죽 갑옷 안에서 조금씩 요동친다. 짓눌린 상태로도 저렇게 출렁거릴 수 있구나.
그리고 그걸 감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궁수눈나 마력통이 좀 크네
-둘이서 데이트 보내고 카메라 붙인거 봐
-레즈레즈야 흑심 너무 티나게 채운다
-한세아가 방송을 좀 아네
-멀티 카메라 기능 알자마자 하는게 가슴골 도촬 시발 ㅋㅋㅋ
내 정면에 붕 떠 있는 반투명한 카메라가 나를 따라온다. 문제는 각도 상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 그레이스의 슴부먼트가 정확하게 카메라의 중앙에 자리한다는 점. 19금 게임인 이유가 있다며 채팅창이 ㅓㅜㅑ 따위로 도배되기 시작한다.
‘진짜 방송 괴물이네, 저거.’
가상 현실 게임에 도전하기 전부터 개인 팬이 많은 인터넷 방송인인 이유가 있었어.
품 안에 안겨 있는 그레이스의 비명이 즐거운 환호성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그녀 또한 별이 세 개 달린 가챠 캐릭터. 스탯 하나 없는 어딘가의 시골 처녀도 아니고 좀 빠르게 움직인다고 겁을 먹고 벌벌 떨 리 없지.
카메라 드론과 그레이스를 매달고 영양실조 오크들이 머물던 짐승 굴을 향해 달렸다. 마을 근처를 빙빙 돌아도 위험한 건 이놈들뿐이었으니 일단 처리부터 하면 될 것 같으니까.
아무리 어린 여자애라 해도 열 살은 훌쩍 넘긴 아이. 뿔토끼도 아니고 산에 있는 자그마한 토끼한테 패배할 리는 없겠지. 오크만 죽여버리면 만의 하나의 가능성조차 사라질 테니 그대로 짐승 굴을 향해 달린다.
“롤랑! 아까 봤던 흔적으로 가는 거야?”
“오크는 아까 찾았어.”
“진짜?”
“그래. 애는 못 봤지만.”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란스럽게 산을 달리니 채 10분이 되지 않아 다시 짐승 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숨기지 않은 발소리에 겁을 잔뜩 먹었는지 낡고 녹슨 무기를 꼬나쥔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네 마리의 영양실조 오크.
“…저게 떠돌이 오크?”
“약하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