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75)

옆에 앉아 있다 못해 슬그머니 다가와 품 안으로 꼼실꼼실 기어들어 오는 그레이스. 바닥의 이슬이 축축하다는 핑계를 대며 허벅지 위에 턱 하고 앉아버린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흥미진진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한세아.

밤바람에 흔들리는 텐트 자락 사이로 보이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니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여동생이 드라마에서 좋아하는 연예인 키스 신 볼 때 저런 눈이었던 것 같은데.

지레짐작이긴 하지만 그런 이유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레이스의 캐릭터 스토리가 나와 깊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걸 한세아는 알고 있는 상황. 게임 캐릭터로 커플링 만들던 여자 게이머들이 한두 명도 아니니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방송도 끄고 혼자 게임을 하고 있으니 나와 그레이스를 이어주며 구경을 하겠다는 거지. 술 마신날 밤에 그레이스가 나를 덮치러 왔다는 걸 로그아웃한 한세아는 모르니 사랑의 큐피트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려나.

그레이스와 나, 미남 미녀가 엮여 있으니 보는 맛도 있을 테고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긴 하겠다.

 “참 이상하지? 아까는 그렇게 불안했는데, 롤랑 옆에 있으니까 마음이 좀 놓여.”

 “…….”

말없이 그레이스를 토닥여주자 마치 토해내듯 종알종알 제 마음을 털어놓는 그녀. 한세아의 미묘한 시선을 받으며 품 안에 안긴 그레이스를 토닥토닥 달래주니 밤은 깊어만 간다.

그래도 밤새 안겨 있을 마음은 없었는지 다시 슬쩍 일어나 텐트로 들어가는 그레이스. 달래준 보답이라는 듯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텐트로 쏙 들어가는 모습이 퍽 잔망스럽다. 배시시 웃으며 들어가는 걸 보니 기운은 완전히 차린 모양이네.

그 뒤로는 별다른 일 따위는 없었다. 기운을 차린 그레이스가 평소보다 내게 가까운 것과 한세아가 그런 나와 그레이스 주변을 맴도는 것 빼면.

 “자, 오랜만이네 다들. 몬스터도 산적도 안 나와서 별 보면서 모닥불 불멍때리는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콜마르 백작령! 그동안 그레이스 언니랑 아이린 언니랑 아주 친해졌긴 한데 스킵 기능이 좀 많이 마렵더라.”

콜마르 백작령에서 짐을 풀고 물건을 옮기는 상단과 헤어져서 작은 마차를 타고 또 반나절. 사흘이라는 이동시간을 정말 꼬박 채운 여정 끝에 자그마한 마을을 눈앞에 둔다.

다행스럽게도 울타리가 박살이 나 있다던가, 마을이 잿더미가 되어있고 시체가 널려 있지는 않은 평범한 마을.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그레이스 옆에서 한세아가 냉큼 방송을 켠다.

 “마차가 질이 좋아서 그런지 타고 다니는 건 할 만했어. 별 보면서 모닥불에 음식 해 먹는 것도 의외로 감성적이고. 다만 방송용으로 좀 그럴 뿐이지. 40시간짜리 힐링 음악 켜놓고 방송 진행 안 하는 느낌?”

-불멍도 잠깐이지 3일은ㅋㅋㅋㅋ

-마차타면 엉덩이 박살날것같던데 비싼값하나보네

-왕국을 싹다 구현해둔거면 외계인을 몇마리 갈았을까

-방송에만 부적합하지 잔잔한게 나쁘지는 않음

-웨너만혼자힐링겜해웨너만혼자힐링겜해

간만에 채팅이 다닥다닥 올라오는 채팅창을 보고 있으니 그레이스가 앞장서서 마을로 다가간다. 마차가 접근하는 걸 봤는지 마을 입구에서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 지저분한 피부에 못난 얼굴은 가챠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이지 떠돌이 몬스터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안심을 하고 있는지 다짜고짜 무기를 겨누지는 않네. 확실히 발전하는 도중의 마을이었는지 스무 가구가 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활기찬 개척민 마을.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음, 넌 누구냐?”

 “에이, 저예요 저! 그레이스!”

 “허? 아니 이게 무슨…?”

마을 입구를 지키는 두 남자를 알고 있는지 팔을 번쩍 들고 인사를 한다. 마을을 떠날 때까진 꾀죄죄한 모습이었는지 만화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두 남자. 그래도 의심하는 건 아닌지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의뢰를 했을 텐데, 꾀죄죄한 모험가 소녀가 한 손 보태러 온 게 아니다. 마법 시약으로 광을 낸 가죽 갑옷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몬스터 소재 복합궁은 딱 봐도 초급 모험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혼자서 온 것도 아니고 덩치 큰 중장갑 기사와 있어 보이는 분위기의 검사, 시골 마을에서 보기 힘든 사제님과 마법사님까지 데리고 온 상황 아닌가. 누가 봐도 초보 딱지는 뗀 지 오래인 숙련된 모험가의 모습.

 “느이 아부지는 지금쯤 촌장님이랑 있을겨.”

 “아직 다친 사람은 없는데 놈들의 흔적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거든. 이러다가 약초꾼이나 열매 따러 간 아낙네들이 마주할까 봐 걱정이야.”

 “다친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쭈글쭈글한 미간 주름이 스팀다리미로 밀어버린 것처럼 활짝 펴진 두 남자가 수다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의뢰를 내건 촌장을 만나기도 전에 대략적인 스토리를 전부 알게 될 수준으로.

수다스러운 게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인가 싶은 두 명에 의해 마을 상황이 벌써 파악된다.

 “수상한 흔적이 발견되어서 확인해 보니 떠돌이 오크의 흔적 같다. 직접 오크를 만난 사람은 없고 피해자도 없지만, 흔적이 점점 늘어나며 마을로 다가오는 상황. 이대로 두면 마을 사람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 같아 마을의 여윳돈을 싹싹 긁어모아 의뢰를 했다― 뭐 이런 상황이네요?”

시청자들이 아니라 우리 들으라고 정리해서 말하는 한세아의 말에 아이린과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말하면 어차피 시청자들도 요약본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예상했던 대로 마을에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레인저의 기술을 가진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파악했으니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이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생각보다 많은 오크 무리뿐.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레인저 출신이다. 전직 레인저의 탐색술로부터 몸을 숨길 고지능의 몬스터가 이런 시골구석에서, 고작 3★ 캐릭터 스토리에 등장할 리 없겠지. 탑 10층에서 만월 늑대가 아니라 만월 드래곤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챠 캐릭터를 빼고 보면, 얘들이 게임 밸런스는 꽤 잘 잡아 놨어.’

가상 현실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주는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 수준의 뿔토끼, 뿔여우, 고블린으로 시작하는 게임. 스펙으로는 유저에게 밀리지 않는 뿔늑대가 무기술과 스킬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만월 늑대가 강적을 상대로 파티원과 함께 다구리 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뒤에 등장하는 건 파티의 합이 맞아야 하는 중형 몬스터와 난전을 알려주는 소형 몬스터 군락. 중간에 가챠 캐릭터에 따라 게임 난이도가 조절되지만, 전체적인 구성 자체는 참 알차게 짜여 있는 모습이다.

 “가서 의뢰 관련된 이야기 좀 듣고 있어 봐.”

 “응? 롤랑 너는 어디로 갈 생각이야?”

 “나는 발이 빠르니까 주변을 한 번 둘러 볼 생각이야.”

그러니 약간의 변수조차 차단하기 위해 발품을 판다. 파티의 경험을 위해서라면 의뢰주로부터 사정을 듣고 흔적을 찾아 그레이스가 차근차근 추적을 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티원들을 보내고 나는 몸을 돌려 마을 밖으로 향한다.

게이머 짬밥이 있으니 대충 스토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떠돌이 오크의 흔적을 추적하다 보니 막 피 묻은 스카프 이런 게 등장한다던가. 긴장감을 구성하기 위해 피해자 한두 명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능글맞은 척해도 은근 마음이 여린 그레이스다. 의뢰를 받아서 마을까지 파티원들과 함께 왔는데 결국 피해자가 발생해버리면 내색하진 않아도 크게 슬퍼할 마음이 여린 여자.

 ‘아프니까 청춘 같은 건 솔직히 개소리고.’

고통이 성장의 거름이 된다던가, 아프니까 청춘이라던가, 상처를 입어야 배우는 게 있다던가―

6★ 씹사기캐가 모는 안락한 리무진 택시에서는 통용되지 않아야 할 말들이다. 품 안에 안겨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내 여자에게 성장을 빙자한 상처는 없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 미녀의 눈물 때문에 오우거한테도 돌진하는 게 나라는 남자니까.

 “그레이스랑 같이 오신 분 아녀? 무슨 일인지…?”

 “오크의 흔적이 발견된 건 마을의 어느 쪽입니까?”

 “저쪽 산봉우리 아래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쪼오오옥――?!”

쾅 소리가 나게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달려나간다. 잘 포장된 도로가 아니여서 대충 뛰어다녀도 된다는 점이 이런 시골 마을의 장점. 쾅쾅 소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흙바닥을 박살 내며 산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오크라는 놈들은 은신술에 뛰어나지 않다. 이끼늑대 가죽을 두른 20층 네임드 몬스터만 특출난 거지, 탑 바깥의 오크가 보여주는 최고의 은신술은 동굴 안에 숨기 정도.

먹고 자고 싼 생활의 흔적을 치울 생각도 없는 놈들. 레인저나 도적처럼 탐색꾼의 기술이 없어도 몸으로 뛰다 보면 결국 발견할 수 있다. 원래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고, 그냥 산맥을 전부 뒤지면 해결되는 이야기.

 ‘모닥불? …사람의 흔적은 아니겠네.’

그레이스네 마을 사람들 밥줄이 될 산맥을 박살 내고 황폐화할 순 없으니 힘 조절을 하며 뛰다 보니 발견한 꺼진 모닥불. 한 줄기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해 옆에는 내장째 뜯어 먹힌 토끼의 사체가 보인다.

마을에서 나온 약초꾼이 토끼를 굽다 너무 배가 고파서 털가죽째 토끼를 씹어 먹었을 일은 없겠지. 모닥불을 기점으로 대놓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실전은 겪어야 하니 전멸시킬 생각은 없다. 수가 많다면 세 마리 정도만 남기고 싹 다 죽여버려야지. 수가 적으면 마나 마사지로 관절을 좀 조져 놓으면 되고. 코끝에서 느껴지는 누릿한 돼지비린내를 향해 기척을 죽이지도 않고 터벅터벅 나아간다.

퀘스트에 커다란 반전 따위는 없었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살이 홀쭉하게 빠진 떠돌이 오크들이었다. 모닥불에서 시작된 발자국과 부러진 나뭇가지를 따라가니 등장하는 작은 토굴. 어느 짐승이 보금자리로 쓰던 걸 머릿수로 빼앗은 건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내가 손을 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이다. 오크답지 않게 살이 홀쭉한 것이 꽤 굶주린 모양. 네 놈이 마을 근처를 얼쩡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아무리 무식한 몬스터라 해도 지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거다. 마을을 습격해서 식량을 빼앗을 자신감은커녕 발 날랜 약초꾼 하나를 덮쳐도 위험하다는 걸 알 정도로. 떠돌이 특유의 영악함은 인간을 덮쳤다가 사냥에 실패할 경우 자신들이 어찌 될지 예측하게 했다.

물론 놈들의 지능은 딱 거기까지. 섣불리 사람을 덮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지만 산 채로 토끼를 뜯어먹고 야산에 모닥불을 피우는 등 흔적을 숨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니까.

'존나 애매하네… 뭐 더 없나?'

이렇게까지 약한 놈들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쯤 되면 반전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방송을 조진 수준이다. 삼일 꼬박 마차를 타고 와서 방송을 켰는데 그 상대가 무려 영양실조 오크 네 마리. 얻을 수 있는 건 그레이스의 호감도와 퀘스트 클리어뿐.

파티원으로서 생각하자면 그레이스의 마을에 별다른 일이 없고, 금의환향을 살짝 보여주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지. 하지만 한세아의 방송을 도와주는 처지로서 생각하자면 마음이 아플 지경.

그래도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겁먹은 오크를 내버려 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상태창 비슷한 게 ‘한세아의 퀘스트 클리어를 도와라.’라고 시킨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려운 게 아니라 너무 쉬워서 문제일 줄은 몰랐는데.'

그레이스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뛰쳐나왔는데, 한세아의 방송에 차질이 생길까 봐 뛰어다니게 생겼다. 차라리 오크가 수 십마리여서 내가 미리 숫자를 줄여 놓는 게 낫지. 숨어 살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살이 홀쭉해진 오크 네 마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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