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75)

내 말에 그레이스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고, 아이린이 째릿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기에 황급히 덧붙였다.

떠돌이가 된 몬스터들은 영악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악해지지 못한 몬스터는 짐승 밥이 되어서 사라졌지. 여기가 대형 육식 동물이 멸종된 한반도도 아니고, 늑대 무리부터 퓨마 닮은 고양잇과 맹수까지 드글드글한 세상이거든.

초보 모험가들이 탑 밖에서 가장 많이 죽는 이유 또한 떠돌이들의 영악함이다. 그래 봐야 몬스터라는 편견이 머리에 박혀 있다가, 어? 하는 순간 죽게 되는 거지.

굶주린 놈이니까 인기척을 내서 유인하면 달려들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얕보다가 되려 짐을 털린다든가 각개격파를 당한다든가 하는 식. 물론 중급 모험가쯤 되면 육체 능력의 차이로 찍어 누를 수 있으니 상관없다.

 “그러니 너무 방심하지는 마. 탑에서 만난 이끼늑대나 투구사슴보다는 신체 능력이 부족한 놈들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상한 짓을 할지는 모르니까.”

영악해서 꾀를 부리고 도망치는 일도 있지만, 지능이 높아서 발악하며 확 달려드는 일도 있다. 죽기 직전의 인간이 죽음을 부정하고 발광하듯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를 채면 다짜고짜 동귀어진을 노리는 놈도 있거든.

이 또한 초보 모험가를 당황하게 만들어 많이 죽이는 사례다. 천천히 몰아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게거품 물고 달려들어서 한 놈만 데려가겠다는 듯 달라붙는 경우가 있으니까.

 “물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 파티의 수준이라면 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막아낼 수 있으니까.”

 “엉뚱한 짓을 할 수 있으니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정작 본신의 무력이 강력하지는 않다는 뜻이군요.”

 “케이든의 요약이 정확해. 더 약하지만, 더 예상할 수 없는 놈들이지.”

물론 우리 파티의 최약체 콤비인 한세아와 그레이스 수준만 되어도 떠돌이 오크 정도는 서너 마리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 괜히 탑이 메인이고 왕국 외곽이 서브 스토리인게 아니지. 가챠 게임에서 캐릭터 스토리는 만렙 안 찍은 적당한 놈 데려가도 깰 수 있는 쉬운 이벤트니까.

약하다는 케이든의 말에 안색이 밝아지는 세 사람. 까놓고 말해서 방심만 안 하면 당해주고 싶어도 당해줄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걸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층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아이린이 스윽 일어나 스튜를 작은 종지 그릇에 떠서 맛본다. 걸쭉하게 잘 익은 스튜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지자 일행들의 배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울려 퍼지는 꼬르륵 배곯는 소리.

 “설명 끝났으면 다들 식사할까요? 맛있게 잘 익은 것 같아요.”

 “아, 고마워요.”

한세아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국자와 그릇으로 스튜의 건더기를 건져 나눠 먹는다. 푹 익어서 으스러지는 콩과 포슬포슬한 감자, 가끔 씹히는 고기 조각이 배를 뜨끈하게 데워준다. 간이 잘 맞아서 그런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스튜.

아이린의 손맛에 뜨끈해진 몸으로 모닥불을 쬐고 있으니 하늘이 어둑해지며 해가 가라앉는다. 노을이 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다가와 불침번에 대해 말 해주는 상단의 일꾼 한 명.

 “오늘은 내가 불침번을 설 테니 다들 푹 자.”

 “그래도 돼?”

 “삼일 밤낮을 새도 끄떡없어.”

텐트는 당연하게도 여성용과 남성용. 그레이스와 한세아, 아이린은 몰라도 케이든은 조금 당황한 눈치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불침번을 자처했다.

한 번이라면 몰라도 모든 여행에서 내가 매일 불침번을 서줄 순 없잖아. 용병단 막내로서 구른 경험도 있으니 텐트 같이 쓰는 것 정도는 참아낼 수 있겠지. 미안해서 발걸음을 못 떼는 아이린을 텐트에 억지로 우겨 박았다.

 “아이린, 그레이스 좀 잘 달래 줘요. 토닥여서 재워도 좋고.”

 “…아!”

한세아의 일시 정지로 인해 밀려버린 게시판 정독을 위해 자처한 불침번 독박이지만, 아이린을 이해시키기 위해 핑계를 댈 수밖에. 사람이 너무 착하면 가끔 귀찮을 때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고딩때도 대딩때도 비루한 현대인의 육체로 잘하던 짓이다. 만화나 소설 읽다가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 하고 미련을 가지다 보니 새벽 6시가 훌쩍 지나 있는 그런 느낌. 조금이라도 자는 것보단 그냥 밤을 새워버리게 되는 미련한 짓.

어차피 밤을 새워도 멀쩡한 초인인데, 밤새워 인터넷 게시판 서핑 좀 할 수 있지!

 “그러네요, 괜히 깨어 있으면 마음만 심란해질지도 몰라요. 제가 푹 재워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부탁해요.”

착한 만큼 순진해서 그런지 아이린이 결의를 다지며 그레이스의 곁에 착 달라붙는다. 정작 그레이스는 배부르고 따스하니 불안감은 다 잊고 졸음만 몰려오는 것 같은데. 그렇게 텐트로 들어가는 세 여자와 발을 떼지 못 하는 한 남장 여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는 몰라도 저 세 명은 야영이 처음이야. 적응할 시간은 줘야지. 내일부터는 불침번을 세울 생각이니 너도 텐트 혼자 쓰면서 푹 쉬어.”

 “…감사합니다.”

아이린이 착한 마음씨 때문에 걱정한다면, 케이든의 죄송함은 엄격한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적당히 이유를 붙여서 명령하듯 말하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텐트로 쏙 들어간다.

주변의 다른 텐트들도 일꾼들이 자리를 잡고 적정 간격으로 배치된 모닥불마다 불침번이 두어 명씩 자리를 잡은 모양새. 뜨듯한 모닥불을 쬐며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안주 삼아 다시 게시판을 열어본다.

한세아의 일시 정지로 인해 게시글이 와락 늘어나니 나로서는 오히려 기쁜 상황.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세아의 방송국 게시판만 볼 수 있으므로 사흘 치의 게시글은 깜짝 선물과도 같았다.

한세아가 접속을 끊으면 세상이 멈춰? 게임 속 NPC라서 미래가 불안정해? 그런 사소한 걱정은 10년 전 뭣도 모르는 세상에 떨어져서 개처럼 구를 때 던져버린 지 오래. 게임 속 세상에 남의 몸뚱이로 던져졌는데 이보다 충격적일 사건이 뭐 있겠냐고.

―솔직히 너무 달리긴 했음

―가만 보면 진성 겜순이임 ㅋㅋ

―한세아방송킬때까지숨참는다흡

―김석현 이 새끼도 은근 기만자임

―이거 시발 늑대가 아닌데?

느긋하게 게시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한세아가 개인 정비 겸 컨디션 조절을 위해 방송을 쉬고 있으니 방송 내용보다는 시청자들의 개인적인 경험담이 잔뜩 올라온 상황.

슬슬 시청자들도 뿔늑대를 지나 만월 늑대를 만나기 시작했는지 만월 늑대를 욕하는 글이 꽤 보이네. 한세아가 15층, 김석현이 13층, 시청자 평균이 10층 정도인 느낌. 그중 욕설이 섞여 삭제될 것 같은 게시글을 냉큼 눌러보았다.

―김석현 이 새끼도 은근 기만자임

[4★ '숲지기' 루이스.JPG]

[4★ '탐구자' 에밋.JPG]

[4★ '경건한' 안토니오스.JPG]

시발 5★만 없을 뿐이지 어떻게 444 트리플이 맞춰짐?

누구는 시발 다 합쳐도 별이 다섯개장수돌침대인데 시발

┗동료 셋 합쳐서 별이 다섯 개면 리셋을 해라

┗가만 보면 한세아 뒤따라가는 이유가 있음

 ┗롤랑 빼고 나머지 셋은 345나 444나 시발 ㅋㅋ

┗근데 롤랑이 사실상 본체잖아. 방송 제목 롤랑이라고 바꿔도 됨 ㄹㅇ

┗하지만 전부 남캐인걸? 석현게이게이야…

뿔늑대에 꿰이고 만월 늑대에 치인 김석현 씨가 꽤 좋은 동료를 뽑았나 본데. 시청자들의 질투 어린 게시글을 읽고 있으니 온갖 신세 한탄이 댓글로 와르르 붙는다. 생산직으로 빠지거나 탑 밖으로 훌쩍 떠난 사람보다는 역시 탑을 오르는 사람이 더 많긴 하겠지.

어둑해진 달빛 아래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게시글을 찬찬히 읽고 있으니 바스락거리는 풀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야영지 밖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우리 텐트에서 슬그머니 누군가 나오는 소리.

 “…롤랑?”

 “그레이스? 무슨 일이야.”

내 곁에 슬그머니 다가와 앉는 것은 그레이스. 아이린이 데리고 들어가서 재운 줄 알았는데 텐트 밖으로 조심조심 빠져나온다. 그렇게 잠시 젖혀진 텐트 사이로 보이는 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린과… 실눈을 뜬 채 자는 척을 하는 한세아.

 ‘뭐 하는 거지?’

제 딴에는 혼신의 연기였겠지만 땅 밑에 숨은 암살자도 찾아내는 상급 모험가에게는 너무 뻔히 보인다. 실눈을 뜨느라 찡그려진 미간은 둘째 치고 옆에서 진짜 잠든 아이린이랑 호흡부터 다른걸.

잠시 텐트 안에 있는 한세아에게 시선을 뺏긴 사이 다른 불침번들을 슬쩍 살펴보던 그레이스가 내게 찰싹 달라붙는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옆에 앉다 못해 몸을 기대어 오는 그녀. 가죽 갑옷을 벗어버린 상태라 모닥불의 온기와는 사뭇 다른 따듯함이 팔뚝에 전해지는 기분이다. 방송이 켜져 있었으면 음담패설로 채팅창에 난리가 났겠지.

머리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내게 기대어 오는 그레이스에게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 안고 내 쪽으로 한층 더 강하게 껴안은 것이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뭉글한 감각.

 “그래도 자 두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들어갈래.”

 “그래. 불편하면 말해.”

팔뚝에 매달리다시피 달라붙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그레이스. 그녀가 최대한 편히 기댈 수 있게 자세를 잡고 끌어안은 손으로 팔뚝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내 커다란 몸뚱이와 모닥불이 주는 온기가 기분 좋은지 숨소리가 점차 늘어지는 그녀.

신경 쓰이는 건 이 오붓한 장면을 텐트 자락 틈으로 몰래 훔쳐보는 한세아. 누가 보면 관음증 환자인 줄 알겠네.

어둑한 달빛 아래에서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그레이스의 행동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인생을 구원해 준 백마 탄 왕자님이며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게 한 커다란 원동력이다. 마을과 가족과 삶의 은인이자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

그러다 보니 위험이 닥쳐와 마음이 약해졌을 때 기대고 싶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텐트 자락 사이로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한세아 쪽이다.

 “…따듯하네, 롤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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