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마차가 발걸음을 멈춘다.
가상 현실 게임 히어로즈 크로니클은 극도의 현실성을 주제로 내세운 게임이다. 탑을 등반해서 꼭대기를 확인하는 게 메인 퀘스트인 주제에 탑 주변의 왕국을 전부 구현해 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시청자들의 기행에서도 가상 현실 게임 특유의 넘치는 현실성은 몇 번이고 증명된다. 탑 외부를 기어오르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짓을 하다 감옥에 투옥된 놈들이 있었으니까.
밤이 되기 전 리셋하기를 선택하면 투옥 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실수로 하루를 넘겨버리면 가상 현실 옥중 일기를 플레이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데이터 리셋을 인증한 놈. 사창가에서 창녀에게 치근덕거리다 가드에게 쥐어 터진 놈 등등.
탑을 등반하든 바깥을 여행하든 범죄를 저질러 투옥되던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간다. 문제가 있다면 싱글 게임인 주제에 SKIP 기능 따위가 없는 리얼한 현실감.
―근데 이게 게임이 맞냐
[중급 연금술 레시피.JPG]
[졸아들어가는 연금 항아리.GIF]
몸 쓰는거 자신 없어서 연금술사로 전직했는데
시약 항아리 푹 고아내는데 40시간 걸림
원조할머니순대국밥집시뮬레이션 아니냐 이거;;
┗벌써 중급이라고 비틱하는 글이라 달달하게 비추
┗방송국 게시판에서도 이런 새끼들이 있네
┗시간도 시간인데 연금시약 냄새 좆됨 진짜 ㅋㅋㅋ
게임 자체가 리얼리티의 탈을 쓴 불친절함을 표방하고 있으니 시청자들이 한세아를 욕하진 않는다. 잠자는 남자의 얼굴이나 zzz 같은 이모티콘이 조금씩 올라올 뿐이지.
그래도 중급 모험가 대신 찾아온 상급 모험가에게 잡일까지 시킬 생각은 없는지 알아서 모닥불도 피우고 텐트도 깔아주는 상단 사람들. 호위로 온 만큼 불침번은 서야 하겠지만 그건 나 혼자서도 가능하다.
“케이든 씨는 야영을 해 본 적 있나요?”
“예. 용병단을 따라다닐 때 자주 해 봤습니다. 저는 잡일 담당이라 텐트 기둥을 세우는 역할이었죠.”
마음씨 고운 아이린은 잡일을 돕겠다고 나서다가 화들짝 놀란 일꾼들에게 밀려났다. 귀한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못 할 짓인데, 그 귀한 손님이 수녀복을 입은 어여쁜 아가씨라면 더욱더 말릴 수밖에 없겠지.
그런 아이린의 태도가 무뚝뚝한 케이든을 조금씩 녹이고 있는지 아이린 앞에서는 말이 조금은 많아지는 케이든. 정체를 숨긴 예비 성녀와 정체를 숨긴 남장 여자 귀족 아가씨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있으니――
“아,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불침번 이거는 보고 싶은 사람도 없을 텐데 여행 부분은 내가 휴방 때 적당히 넘기고 돌아올게. 솔직히 방송을 너무 연달아서 하는 것도 좀 빡세. 재미없는 부분은 넘기고 퀘스트 크게 진행될 때만 키는 게 좋겠지?”
등 뒤에서 들려온 한세아의 목소리와 함께 이상한 감각이 피부를 자극한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으면서도 등골이 바르르 떨리는 섬찟한 감각. 목숨을 건 혈투 속에서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듯 주변 세상이 극도로 느려지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탁탁 튀어 오르는 불똥이 느릿하게 보인다. 텐트를 치며 피어오른 흙먼지, 비질에 밀려난 낙엽, 웅성거리는 상회의 직원들과 우리 파티원들까지 모두 100분의 1, 1,000분의 1 속도로 감속한 것 같이 끈적끈적하게 느릿해진 모양새.
‘…뭐였지?’
물론 그 기묘한 감각은 1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불똥은 불쏘시개를 잡아먹고 커다란 모닥불이 되었으며 흙먼지와 낙엽을 피해 커다란 냄비를 가져온 직원은 잡탕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으니까.
“텐트에서 자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네요.”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닐 겁니다.”
케이든과 아이린도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마음이 복잡한 그레이스도 혼자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을 껌뻑거리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곧바로 채팅방과 게시판을 동시에 켰다.
길 가다 말고 무슨 고대의 악신이나 봉인된 마법사 같은 게 튀어나온 상황이 아니라면, 100% 한세아의 방송과 관련된 일일 테니까.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시판과 채팅창. 게시판에는 내가 읽지 않은 인기 글이 수십 개가 넘게 쌓여 있었고 채팅창은 반대로 텅 비어 있었다.
몇 일치 쌓여 있는 게시판의 게시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평소에는 웃어넘기며 인기 글 위주로 살펴보았기에 눈치채지 못한 것들. 내게는 1초였지만 바깥에서는 사흘이 흐른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보니 처음 보는 인기 게시글의 작성 일자가 이틀 전이었거든.
‘누가 게시판 인기 유머 글 읽을 때 작성 시간까지 같이 읽겠냐고.’
그렇게 알게 된 사실들.
첫 번째. 한세아는 원정대가 노숙을 준비하는 동안 시청자들에게 이야기하고 게임과 방송을 종료했다. 내가 느낀 그 기묘한 감각은 이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여관이 세이브 포인트라면 지금은 빠른 저장 후 종료 같은 느낌.
두 번째. 한세아는 게임 1위빨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매일 방송을 했지만, 슬슬 일정을 예전대로 되돌릴 생각이다. 숲에서의 반복된 탐색이나 마차 여행을 위한 노숙까지 풀 방송을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는지부터, 내가 느끼는 시간 감각과 현실과 게임의 시간 배율에 대한 의문까지 다양하게 생기지만 그건 고작 게시판만으로 알아낼 수 없었다.
“롤랑? 뭐 하고 있어?”
“생각할 게 있어서.”
게시판을 둘러보느라 멍하니 서 있으니 한세아가 다가온다. 1초 만에 바깥에서 3일을 보내고 온 플레이어. 새삼스럽게 내가 게임 속 NPC라는 걸 자각하게 되네. 물론 헛된 감상에 젖어 우울하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인제 와서 그딴 사소한 일에 슬퍼하고 고민하기엔 10년간 경험한 게 너무 많거든. 퀘스트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는 이상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래? 그러면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럼. 내가 이 파티의 지도역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슬그머니 다가와 입을 여는 한세아. 아무래도 방송을 켜지 않은 사이 슬쩍 지식을 쌓아두려는 것 같다. 하도 무식하다고 놀림당하여서 시청자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하고 싶은가 보네.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행동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곧바로 입을 여는 그녀.
“이번 의뢰인 떠돌이 오크에 대해 알려줬으면 해.”
“그건 당연히 알려줘야지. 식사 시간에 다 모이면 모두에게 설명해 줄게. 용병 생활을 한 케이든이라면 몰라도 아이린과 그레이스는 잘 모를 수 있으니까.”
내 말에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두에게 의뢰에 관해 설명하면, 의뢰가 시작되었을 때 방송을 키고 시청자들에게 제 지식을 뽐내겠다는 열의가 가득한 눈빛. 나쁜 일은 아닌지라 좀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에 나이로 시청자들을 두들겨 팬 손맛이 꽤 좋았는지 희희낙락 그레이스와 아이린에게 다가가는 그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숙영 준비를 끝낸 일꾼들이 식사를 준비한다.
“괜찮아요. 힘쓰는 일은 못 해도 이런 일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요리는 신전에서 많이 해 봤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이번에야말로 일꾼들을 밀어내고 우리가 먹을 식사를 손수 준비하는 아이린. 힘든 일도 아니고 우리가 먹을 음식을 손수 만들겠다는데 그마저도 막아 세울 순 없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단의 일꾼이 발걸음을 옮긴다.
어지간히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는지 수녀복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감자 껍질을 깎는 아이린을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좀 우스운 수준.
요리라 해 봐야 끓는 물에 콩과 감자, 질긴 고깃덩어리를 넣어 푸욱 끓이다 못해 졸아들 때까지 익혀버리는 게 전부지만 그조차도 수녀에게 시키기엔 미안한 건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아이린이 그레이스를 이끌고 가 함께 감자와 콩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복잡할 땐, 이렇게 단순한 일을 하면서 생각을 비우는 것도 좋아요. 감자랑 콩 껍질을 까고, 모닥불을 쬐면서 별을 구경하는 거예요.”
“콩은 조금만 까요, 난 스튜에 콩 들어있는 거 별로야.”
“콩, 맛있지 않나요?”
아이린의 계속되는 토닥임에 기운을 꽤 차린 그레이스가 너스레를 떨며 슬쩍 콩깍지를 밀어낸다. 그 모습에 눈치 좋게 장작과 냄비에 채울 물을 가져오는 케이든. 용병단 막내 짬밥을 허투루 먹은 건 아닌가 보네.
받아 온 고기 조각과 손질한 감자, 콩을 집어넣고 엘리스가 챙겨 준 식량에서 육포와 말린 과일까지 집어넣어 푹 끓이는 잡탕 스튜.
그래도 신전에서 요리를 자주 했다는 아이린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대충 다 때려 박은 스튜 냄비에서 좋은 향이 솔솔 올라온다. 허기를 자극하는 스튜의 향기와 모닥불의 따듯한 온기를 쬐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의뢰에서 만나게 될, 떠돌이 오크에 관해 설명을 해 줄게. 케이든,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좀 있어?”
“질병이나 노화 등, 다양한 이유로 부족에서 쫓겨난 녀석들 아닙니까? 무리를 지어 사는 놈들보다는 약한 개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모범적으로 대답하는 그녀. 정확한 답변이지만 조금 아쉬운 수준의 답변이다. 점수로 치면 85점짜리라고 해야 할까. 탑 내부의 몬스터와 탑 바깥의 몬스터, 그것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녀석의 가장 큰 특징.
케이든의 말에 한세아가 발표하듯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선 내게 묻는다.
“지난번에 설명할 때 적개심의 차이가 가장 크다며. 그건?”
“기억 잘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건 길드에서 떠돌이라고 판정한 녀석들의 특징이야.”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탑 내부와 탑 외부의 차이가 있는데, 거기서 또 외부 몬스터들 중 일부를 떠돌이라고 분류하니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물론 이 분류법은 길드가 대충 편의상 정한 것이긴 하지만.
“의뢰를 게시할 때 떠돌이 고블린, 떠돌이 오크 등 분류되는 개체들은 육체가 연약한 대신 머리가 영악한 녀석들이야. 몸에 하자가 있어 부족에게 버림받은 주제에, 왕국 국경선을 넘어 내부로 파고든 뒤 살아남아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놈들이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늙은 사자랑 비슷한 느낌이다. 상처를 입고 무리에서 쫓겨났지만, 어떻게든 야생에서 살아남은 뒤 자기보다 더 연약한 인간을 먹이 삼아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놈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악함이다. 대가리가 좀 돌아가는 놈들은 아이를 납치해서 인질로 잡거나, 자기보다 약한 몬스터를 노예처럼 부려 산적단처럼 세력을 꾸리기도 하니까.
오크 전사가 꽥꽥거리면서 정면에서 달려드는 도끼 살인마라면, 떠돌이 오크는 야밤에 아이를 납치해 가는 사이코 살인마 같은 느낌인 거지.
“…그러니 마을의 저항이 거세면 우리가 도착했을 때 도망칠수도 있단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