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질러 그 잔해로 농사를 짓다 땅의 양분이 말라버리면 떠나버리는 게 화전민. 하지만 그레이스의 마을은 전직 레인저니 도망친 대장장이니 이 사람 저 사람 모여들어서 그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떠돌이들의 화전민 마을에서 왕국 외곽을 개척하는 개척민 마을이 된 상황. 사람이 더 모여들고, 돈 냄새를 맡은 상인이 모여들고, 도로가 개통된다면 자연스럽게 소도시가 될 흐름이다.
몬스터만 없다면 말이지.
“오늘은 탑의 탐색이 아니라 지정 의뢰를 해결하러 가요.”
“한나….”
엘리스와 그레이스의 말을 들은 한세아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파티의 리더로서 선언하자 마음씨 고운 아이린은 물론이요 무뚝뚝하지만 사람 됨됨이는 착한 케이든도 주저 없이 한세아의 말을 따른다.
나를 보기 위해 마을을 훌쩍 떠나왔더라도 마음마저 떠난 건 아니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그레이스. 그 작달막한 머리를 안심하라는 듯 살살 쓰다듬으며 나 또한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야. 의뢰를 받아서 가도 늦지 않아. 이미 한 번 겪어봐서 알잖아.”
“그것도, 그러네….”
파티원들도 한세아도, 그리고 시청자들도 한마음 한뜻이 된 상황.
-와! 탑 밖으로 가시는구나!
-울먹거리는장난기많은눈나못참거든요
-탑 안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서 놀아
-1~2성따리들도 캐릭터 퀘스트가 있으려남…
-우리는한세아의시대에살고있다우리는한세아의시대에살고있다
지루하기만 하던 반복 사냥 중 등장한 첫 캐릭터 퀘스트에 불만을 가질 게이머는 없을뿐더러, 성격 좋은 그레이스의 특성상 시청자들에게 엄청 인기를 끌고 있었거든.
거유의 궁수 눈나, 몸매를 숨긴 사제 마망, 무뚝뚝한 남장 여자랍시고 나 빼고 모든 파티원이 그런 쪽으로 인기를 얻은 상황. 채팅창이 한마음이 되어 나처럼 그레이스를 더 달래주라며 한세아를 갈구기 시작했다.
‘기 승 전 한세아 갈구기인가.’
다른 사람들의 평균 이상인 3★이 한세아 파티 내 최약체니 질투할 수밖에. ㅇㅇ 이라는 성의 없는 닉네임으로 짠해좌가 되어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한세아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질투라는 걸 알고 잘 써먹는 모양.
그렇게 우리 파티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러면 바로 출발을 하면 되는데… 어떻게 가지? 그레이스 언니, 마차 같은 걸 타고 가면 돼요?”
“그러네, 우리 마을 쪽으로 가는 마차가 있으려나….”
마음이 앞서는 한세아지만 탑 밖의 의뢰는 처음인 게 현실. 그 어벙하기까지 한 모습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리스가 씨익 미소짓는다. 값비싼 디저트를 뇌물로 받고 서류를 조작해 부수입을 쏠쏠히 챙기는 여자지만――
“지금 도시 동쪽으로 가면 모험가 길드와 함께 동쪽으로 향하는 상단 행렬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내가 보내서 합류하기로 한 모험가라고 말한 다음, 이 서류를 건네주면 마차에 태워 줄 거야. 콜마르 백작령까지만 간다고 말은 꼭 해야 해.”
능력이 있으니 모험가 길드에서 접수원들과 사무직 직원들을 휘어잡은 왕언니가 된 거겠지.
의뢰를 받을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턱 내미는 그녀. 이런 대형 상단의 호위 의뢰는 대부분 미리 결정지어질 텐데 당일까지 꿍쳐두다니 여러모로 수완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호위 의뢰로 요청된 건 중급 모험가인데 상급 모험가인 내가 껴 있으니 상단으로서는 오히려 이득일 테고. 그레이스에게 호의를 베푸는 동시에 상단주에게도 이익을 확실히 안겨주는 방식. 서류를 살펴보고 있으니 엘리스가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와 한세아에게 턱 건넨다.
“이건 여관 길드에서 장기간 탐험을 떠나는 모험가에게 팔고 싶다고 가져온 건량 시제품이야. 잡화점에 들릴 시간은 없을 테니 이거 가지고 지금 바로 동문으로 가.”
물 흐르듯 쏟아지는 엘리스의 설명에 어벙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린 한세아. 등을 탁 쳐주는 손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길드 밖으로 나선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엘리스.
이렇게 엘리스에게 휘둘리듯 당한 건 오랜만이라 옛 추억까지 떠오르려고 하네. 물론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급히 도시의 동문으로 향했지만.
“상단주님! 모험가 길드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오, 혹시라도 오지 않는 건가 걱정을 많이 했― 롤랑 님과 마법사 한나 양?”
우리를 맞이한 건 머리가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뚱뚱한 대머리 중년 남성. 후덕한 살집이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모양새의 남성이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공손히 손을 내민다.
채팅창에서 시청자들이 말하기를, 2★ ‘수전노’ 쟝.
별이 붙은 만큼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거의 스무대에 달하는 마차에 인부들이 달라붙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단의 주인인 만큼 정보도 빠삭한지 나와 한세아를, 정확히는 케이든을 제외한 우리 파티를 알아보는 모양새.
“지난번 늑대 놈들을 상대로는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거 참, 바쁘지만 않았어도 느긋하게 차라도 한 잔 마셨을 텐데.”
“콜마르 백작령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야 하는 건 제가 아니겠습니까? 도시의 영웅들이 함께하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엘리스가 여기까지 계산한 건 아니겠지. 우리 덕에 물품이 멀쩡하다느니 창고가 큰일 날 뻔했다느니 잠시 수다를 떤 상단주가 일꾼 하나를 우리의 안내역으로 붙여준다. 일꾼들이 가득 찬 짐마차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급 마차.
우리 다섯 명이 모두 들어가도 넉넉한 공간을 자랑하는 마차가 다각다각 출발하자 그레이스가 입을 연다.
“모두,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 모험가로서 의뢰를 받는 건 당연하니까.”
“그래도요.”
마차가 출발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 하기야 세월이 흘렀다면 마을에 있는 건 그레이스의 늙은 부모님뿐이다. 새로운 인력이 충당되지 않았다면 마을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가 나서야 하는 상황.
아무리 그녀의 아버지가 전직 레인저라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화전민 마을에 자리를 잡을 수준. 고블린 정도는 처리해도 오크까지는 무리라는 거지.
하지만 믿을 구석은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연히 벌어진 불행이 아니라 한세아가 받은 퀘스트라는 것. 퀘스트니까 우리가 갈 때까지 어떤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히로인즈 크로니클에서 파생된 게임이라는, 조금 뒤틀린 믿음.
마을에 도착했더니 잿더미가 되어 있고 그레이스의 부모님은 시체만 남아 있는, 그런 캐릭터 퀘스트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냐고. 아무리 초보 모험가가 픽픽 죽어 나간다 해도 스토리 자체는 그런 암울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콜마르 백작령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내가 도시에 올 때는 삼일 정도 걸렸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세 명.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가운데에 그레이스를 두고 양옆에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한다. 케이든이야 알맹이는 공녀일지라도 겉은 남자니 내 옆에 앉은 상황.
말없이 그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멍 때리는 척 게시판을 열어보았다. 진짜 이거 없을 땐 어떻게 몇 날 며칠을 멍 때리며 마차를 탔을까.
대학생 시절에는 오전 6시에 일어나던 고등학생 시절을 대단하게 여기듯, 방송국 게시판을 구경할 수 있게 된 나는 10년간 현대 문명과 단절되어 살아오던 나를 대단하게 여길 수밖에.
―마차여행 팁
―탑 밖으로 나가면 PTSD옴
―???:한뱀 일어나십쇼
―나도 마법 배우고 싶다
―왕국이 넓은건지 발이 느린건지
파는 산딸기는 봤지만, 밖에서 산딸기 넝쿨은 본 적 없다고 말하는 아이린과 그걸 신기하게 여기는 그레이스. 그리고 그사이에 껴서 시골 마을 출신인 주제에 야생 열매에 대해 몰라 어색하게 웃는 한세아.
플레이어를 참 힘들게 만드는 게임이라는 감상을 하며 느긋하게 게시물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시청자가 많아지니 방송 내용을 실시간으로 게시판에 작성하는 사람들이 늘었네.
―나도 마법 배우고 싶다
[마탑의 마법 리스트.JPG]
[연금술 레시피-해충퇴치향.JPG]
[모기 화형식.GIF]
금 사올테니까 제발 우리 집에 해충 방지 마법 걸어줘!!!!!
아니면 연금술로 저거라도 만들어서 시청자한테 뿌리라고
┗현실이랑 게임을 구분 못하기 시작하네
┗ㄹㅇㅋㅋ 한세아가 풀방송을 하는데 어케 현생을 살지?
┗??? 먼가 반대 아니냐
┗솔직히 전투 마법보다 저런 생활 마법이 훨씬 부러움
┗시발저거배우고도시밖으로나갈걸노숙미치겠네
가장 많은 게시글은 불침번을 서는 군인 사진이 동봉된 유머 글. 이박 삼일 꼬박 마차 여행을 하게 생겼으니 한세아도 불침번을 세울 거라고 예상하는 게시글들이었다. 하기야 도시 밖에는 탑 내부처럼 안전지대라는 게 없지.
떠돌이 몬스터는 일종의 야생 짐승과 비슷한 느낌이다. 지리산이 안전한 곳이라 해도 서식지를 벗어난 반달곰이 주변을 헤집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거든.
왕국 내부고 조용한 산골이라고 생각했는데 떠돌이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가 기어들어 오고. 정말 재수 없으면 오우거 같은 놈들이 발정기에 눈알 뒤집혀서 다른 산맥까지 헤집고 다니고. 그 사이에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 범죄자도 가끔 끼어 있고.
“아니, 야! 나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촌년이야. 근데 니들 뭐 강원도나 경기도 출신이라고 뒷산에 산딸기 덤불 있고 막 그랬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릴 때 꿀 빨아 먹었… 저기, 제 방송 보기에는 어르신의 연배가 좀.”
불침번 이야기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건 시청자들이 도시 밖에서 겪은 이야기들. 게임이랍시고 맨몸으로 도시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원시인 체험기를 겪고 있다는 인증샷이 인상 깊다.
그렇게 게시판을 한창 읽고 있으니 기회를 엿보던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반격을 시작한다. 아이린이 그레이스의 손을 꼬옥 붙잡고 기도를 하는 타이밍을 노린 일격.
놀려 먹을 대상이 한세아 말고 하나 더 생겼다는 점에 기쁨을 느끼는지 난리가 난 채팅창. 이게 뭐가 늙었냐고 현실을 부정하는 시청자부터, 꿀 빨던 세대면 책보 메고 국민학교 다녔냐고 놀리는 시청자까지. 피에 굶주린 피라냐, 배고픈 하이에나라는 비유가 딱 어울리긴 하네.
서울, 경기도, 꿀 빨아 먹는 꽃봉오리, 책보, 국민학교와 초등학교까지. 바깥은 내가 알던 세상이랑 한없이 비슷한 것 같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