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늑대의 은신은 그레이스가 확실하게 탐지해낼 수 있고, 투구사슴의 돌진은 내가 흘려버려도 아이린의 보호막이 막아 세울 수 있다. 고블린과 코볼트와의 난전에서는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케이든이 전부 석석 베어버리고.
‘카타나를 들고 깝치는 아가씨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특이하게 기다란 한손검, 방패를 사용하지 않음, 가끔 양손으로 휘두름. 레베카의 설명 때문에 일본의 도검은 세계제일을 외치는 사무라이를 떠올렸었는데 헛된 걱정이었다. 케이든이 휘두르는 건 검날이 올곧게 뻗어있는 한손검이었으니까.
검의 공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으니, 아마 자기 가문의 검술 때문에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용병단 신입으로 밖에서부터 굴렀다는 걸 증명하듯 독침과 돌팔매 따위를 가볍게 흘려내는 움직임. 열 댓 마리의 몬스터가 본능에 따라 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혼란스러운 난전이 벌어져도 흔들림이 없다.
“케이든, 뒤!”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도 존댓말을 고집할 순 없는지 짧게 외치는 그레이스. 어느새 수풀로 기어들어 가 뒤통수에 돌팔매를 날리려는 고블린의 미간에 곧바로 화살이 하나 팍-! 하고 박힌다.
뒤쪽 수풀에서 바스락대며 기어 다니는 고블린을 발견해 쏘다니, 눈에 뒤에도 달렸나 의심이 될 수준의 탐색 능력. 궁술 실력도 뛰어난지라 한세아의 스파크 마법에 지져져 움찔거리는 순간 화살이 정확히 날아든다.
“…슬슬 합이 맞는 건가? 어제보다 훨씬 빠르게 정리된 것 같은데.”
“케이든 씨가 고블린을 잘 몰아가서 그런 것 같은데. 흘리는 놈이 없으니 쏴서 맞추기도 편해.”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선 제압을 위해 두어 마리 발로 걷어차 제거했을 뿐인데 나머지 고블린 잔당은 일행들이 무리 없이 쓱싹 제거한다. 그렇게 한세아의 인벤토리로 마석이 되어 들어가는 놈들.
전투가 진행되어도 정말 가벼운 잔 실수밖에 없으니 딱히 지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케이든이 베려고 한 고블린에게 화살이 박힌다든가 하는 오버딜, 역할 분담 정도의 사소한 문제.
“좋네. 이대로만 가면 20층까지도 무리 없겠어.”
“그 정도입니까?”
“이끼늑대에게 한 번도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면, 오크 사냥꾼의 함정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케이든, 너는 용병단과 함께 20층까지 갔다고 했었지?”
상급 모험가이자 파티의 지도역으로서 모두에게 말을 놓게 된 상황. 예비 성녀에게도 말을 놔야 한다는 애매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당사자들은 별 불만이 없는 모양이다. 내 자연스러운 반말에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인다.
반대로 나를 대할 땐 그레이스와 한세아는 반말, 아이린과 케이든은 존댓말. 어떻게 말투도 딱 반반으로 갈렸네.
“오크 사냥꾼이 무서운 이유는 직접 덤벼들지 않기 때문이야. 용병단에서 겪어 봤어?”
“아뇨. 하지만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치들이 허풍이 좀 있어서 그렇지 오크 욕하는 건 진짜거든.”
이끼늑대의 가죽을 걸치고 다니는 20층의 네임드 몬스터 오크 사냥꾼. 문제가 있다면 이 새끼들이 함정을 깔고 숨어 있다 저격을 하며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쫓아가면 함정이 있고, 무시하면 쉴 때를 노려 저격하는 씹새끼.
“이 새끼들이 영악해서, 쉴 때를 노리거든. 거기에 성질도 긁을 줄 알아.”
“네. 식사 시간에 스튜 항아리나 모닥불을 쏴서 밥을 못 먹게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도 밥을 못 먹으면 화난다는 걸 알고 유도하는 거야. 각개 격파를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잡아?”
마석을 주워 담은 뒤 장비를 점검하며 케이든과 나눈 대화에 한세아가 슬쩍 끼어든다. 20층이라는, 시청자들은 근처에도 가지 못한 고층의 이야기다 보니 궁금할 수밖에.
-설마20층갈때까지 사냥만 반복함?
-20층네임드필살기:밥상뒤집기
-뿔늑대도 그렇고 왜케 은신몹이 많아
-그래서 탐색꾼이 필수인듯
-중간에 다른 퀘스트 없냐
마치 무너져 내리는 산의 토사물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채팅들. 집단적 독백처럼 탑이 이러니 게임이 저러니 평가하고 있었다. 하긴, 숲에서의 탐색만 계속 보면 좀 지루하긴 하겠지.
그러니 한세아가 숲을 걸을 때 시청자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중이고.
“숲에서 만들 수 있는 함정이라 해도 살상력이 뛰어난 건 아니니까 탱커가 몸으로 뚫고 가서 붙잡거나, 팀의 탐색꾼이 은신한 걸 찾아내서 마법 따위로 잡아내는 거지.”
“탐색꾼이 생각보다 중요하구나….”
“심지어 21층부터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동굴이야. 거기서부터는 중요한 수준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거고.”
그래도 탑 이야기를 하니 흥미를 느끼는지 채팅창에 질문이 우르르 올라온다. 한세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 물론 탑에서는 초보지만 방송인으로서는 숙련된 그녀가 공짜 질문을 다 들어줄 리 없다.
슬로우 모드 비슷한 거로 제한을 걸어도 시청자가 워낙 많으니 질문이 읽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하고, 게임에 진지한 놈들은 오천 원, 만 원이라도 내면서 유료 질문을 하는 것 같으니까.
방송에서 한세아가 자꾸 나를 센세라고 부르니까 강의비니 교육비니 하면서 돈을 내는 게 당연해진 모양새. 수금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린 거라면 그녀의 칭호는 ‘수금 박사’ 한세아 정도로 정해지지 않으려나.
“아니, 근데 조금 걱정되는 게 동굴에서는 방송하면 뭐가 보이려나? 싸우다가 내가 실수로 라이트 마법 끄면 니들 다 시커먼 화면 보면서 채팅 존나 도배할 것 같은데. 질문? 강의비는 언제나 인정이야.”
어지러운 채팅창을 대충 흘겨본 한세아가 시청자들과 떠들다 말고 강의비를 운운한다. 생각해보니 이 시발 시스템은 게시글 작성과 카메라 기능을 떼어 둔 것처럼, 채팅창 확인 기능과 도네이션 확인 기능 따위를 분리해 놓은 상태.
악독한 게임 회사의 DLC 팔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구매하는 골수팬이 된 기분인데.
“롤랑?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영양가 없이 어지럽기만 한 채팅창을 꺼버렸다. 마탑의 마법사에게 돈 받고 질문을 해 주다가 한바탕 데인 기억 때문인지 시청자들이 ‘수’와 ‘금’ 글자 이모티콘을 도배하기 시작했거든.
수금 타임이라고 욕하는 것인지, 금수 같다고 욕하는 것인지, 돈 밝히는 짐승 같다고 욕하는 것인지는 도배하는 놈들도 모르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시청자에게 강의료랍시고 돈을 받은 한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질문을 던진다.
“뿔토끼, 뿔여우, 뿔늑대에게는 원본이 되는 동물의 본능이 남아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고블린이나 코볼트, 오크 같은 놈들은 탑 안과 밖이 많이 달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한 질문이네.
평소에는 눈나와 마망따위로 불타오르는 변태들이 대다수라 조금 무시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건실한 질문이 나와서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한세아의 시청자 중 일부는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라는 게임에 진심인 모양.
한세아의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는지 순식간에 내게 모여드는 일행들의 시선. 탐색 중이던 그레이스를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 오크 같은 유사 인종 몬스터들은 바깥의 놈들과 외형은 같지만, 행동 패턴이 완전히 달라.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심이지.”
탑 바깥의 몬스터도 당연히 사람을 공격한다. 작은 마을을 공격해 사람을 납치해서 범하고 잡아먹고, 제 영역에 인간이 들어오면 사냥하고. 그러니 모험가에게 탑 바깥의 의뢰가 자꾸 들어오는 거지.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공격성. 탑 밖에서는 제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머리 굴리는 놈들은 도망을 친다. 하지만 탑 안에서는 도망을 치는 놈이 없지.
하다못해 10층 이하에서 나오는 비실비실한 고블린도 제 머릿수보다 많은 우리에게 키엑키엑 덤벼들지 않던가. 오크 사냥꾼도 머릿수가 많으면 도망치는 게 아니라 게릴라 전으로 덤벼들고.
“왜 그러지?”
“그건 나도 모르지. 마탑에 있을 몬스터 생태학 연구자들도 모를 텐데.”
“그런 마법사들도 있어?”
“탑에 직접 들어오는 마법사 대부분이 그쪽이야. 탑 내부의 식물이나 몬스터를 직접 관찰하고 논문을 쓰기 위해 들어오는 거지.”
마탑의 마법사들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논문의 주제로 삼을 연구 거리를 찾아 대륙의 오지부터 탑의 최상층까지를 떠돌아다니는 좀비 같은 사람들. 어째 설명을 하다 보니 마법사 이야기로 빠지게 되네.
설명을 끝마치고 입을 다물자 그레이스가 눈치껏 다시 탐색을 재개한다. 오늘도 탑의 통로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상관없다. 조금씩 성장하는 걸 본인들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테니까.
※
―한세아 모험가 생활하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
길드에서 의뢰만 받아가고 혜택은 안 받아서 슬퍼…
뿔늑대랑 만월 늑대 해결해서 마탑이 보상을 줬는데
모험가 길드 보상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지능이라서 슬퍼…
별거 아닌 사소한 팁을 가지고 게시글을 작성한 지 며칠.
운은 좋지만, 지능은 나쁜 한세아와 운은 나쁘지만, 지능은 좋은 김석현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당연하게도, 내가 매일매일 꾸준히 작성한 게시글 때문이었다.
물론 김석현은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미래시 삼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따라오는 중. 이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는 한세아보다 훨씬 똑똑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 놀려 먹는 시청자에게 있어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아아아이, 씨! 퀘스트 창에 없으면 보상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사람이! 얘는 뭐 작성한 게시글마다 맨날 짠짠거려. 심지어 다른 게시글도 없이 모든 게시물마다 내가 짠하대.”
마차 관련으로 어그로가 한 번 끌리니 한세아를 놀리기 위해 내가 유명해진 상황.
첫 단추가 아주 잘 끼워졌다.
그레이스는 새로 산 활에 익숙해졌고, 아이린은 조금씩 탑 위로 나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케이든은 남장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여전히 낯을 가렸다. 그리고 나는 성공적으로 한세아에게 지능이 슬픈 방송인 타이틀을 달아주었고.
"엘리스 언니, 만월 늑대 처리했는데 혹시 길드에서 주는 게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