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75)

용병단에 들어가 왕국을 떠돌아다니는 용병을 시작으로 여관에 취직하는 사람, 대장장이나 목수의 도제로 들어간 사람, 마법사가 된 뒤 모험가가 아니라 마탑의 자발적 노예가 된 사람까지.

심지어 탑을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기어오르겠다며 매달렸다가 경비병에게 체포당한 플레이어까지 등장했다. 6★인 내 힘으로 빠르게 치고 나간 한세아와 재능빨로 그 뒤를 따라오는 김석현의 투톱 경쟁을 보고 즐겜 모드에 들어간 듯하네.

그렇게 게시판을 둘러 본 뒤, 나는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아는 걸 마음대로 적을 순 없었다.

진행도로 치면 세계 1위가 한세아며, 이는 11층 이후의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한국인은 물론이요 외국인들도 모두 한세아의 방송을 보며 11층 숲 필드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숲의 그늘진 곳에는 이끼늑대가 숨어 있어 파티에 탐색꾼이 없으면 기습을 허용하게 된다던가, 투구사슴은 단순히 뿔로 찌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뿔싸움을 하듯 머리를 휘적거려 어지럽게 난 뿔로 난잡하게 베어버린다던가.

전부 한세아의 방송에서 내가 교육을 빙자해 알려준 모험가들의 상식.

 ‘어떤 내용을 써야 하지? …아니, 어떻게 써야 할까.’

그런 상황이다 보니 한세아에게 11층 이상, 숲의 정보를 팬심으로 위장해 건네줄 수 없는 게 현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탑이 아닌 도시와 관련된 이야기뿐이다.

거기에 더해 게시판을 꾸준하게 이용하며 사용할 컨셉도 정해야 한다. 글의 내용이 아무리 알차다 해도 제목으로 어그로가 끌리지 않고 내용이 재미가 없으면 묻혀버리는 게 혼란스러운 인터넷 게시판이니까.

방송 초기의 한적한 게시판이라면 그냥 ‘정보’ 두 글자 띡 적어도 한세아와 게시판 이용자들이 읽어 봤겠지. 하지만 지금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유저까지 접속해 번역기로 더듬더듬 게시글을 작성하는 상황.

 ‘역시 난 머리 쓰는 거랑 안 어울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탑 외부에 대한 정보는 자유롭게 풀 수 있다는 것. 온갖 기행을 인증하는 시청자들을 보면 도시는 다들 엇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플레이어들이 싹 다 마리앙 아주머니의 여관에 가는 걸 기본 공략으로 삼았다니 다른 것도 다 비슷하겠지.

술을 한 두잔 홀짝홀짝 마시며 고민을 하다 이번에도 마음을 편히 먹었다.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라 했는데 첫 게시글로 게시판 유명인사가 되어 모두에게 인정받고 한세아를 조종할 수 없을 테니까.

―한세아 맵 밝히려고 걸어 다니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

도시 내부에 순환 마차가 있는데 마법사가 뚜벅이라서 슬퍼…

탑이랑 게이트 가는 길에 자기 옆에 마차가 몇 번을 지나갔는데

그걸 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지능이라서 더 슬퍼…

시험 삼아 아주 사소한 정보를 툭 하고 던지듯 게시글을 작성하다 발견하게 된 문제점. 내 눈깔은 카메라가 아니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시판 글쓰기 권한도 있고 사진 첨부 버튼도 있는데 사진을 찍을 방법이 없구나. 무슨 게임 DLC 팔아먹는 악덕 게임사도 아니고, 시발. 사진이 없으면 어그로가 잘 끌리지 않으니 첫 게시글은 볼 확률이 거의 없겠네.

―이런데도 별이 붙네

―한세아가세계1위냐고356786번물었다

―이 새끼는 머하는 새끼임?????

―그레이스눈나 vs 아이린마망

―숲에도 고블린이 나오네

밤이 깊어가기에 사진 없는 게시글을 작성해본 뒤 마지막으로 게시판을 슬쩍 살펴보았다. …창관의 창녀들도 별이 붙는구나. 좋은 정보를 준 대가로 삭제되어버린 게시글을 마지막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저기, 롤랑? 도시 구경을 하다 궁금해졌는데, 마차 정류장 같은 게 있어?”

 “당연히 있지. 마부 길드가 다른 길드들과 계약을 맺어서 도시의 주요 거점마다 돌아다니는 마차가 있어.”

사진도 없던 게시글인데 이걸 봤네.

어김없이 아침에 모여 게이트로 향하는 길, 한세아가 슬쩍 내게 묻는다. 한껏 줄인 목소리를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슬쩍 끼어들어 한세아를 거들어주는 그레이스. 생각해보니 이 두 사람은 도시 출신이 아니구나.

그레이스야 화전민 마을 출신이고, 한세아는 설정상 모험가의 꿈을 꾸며 도시로 상경한 시골 출신. 카메라 드론을 달고 등장한 첫날 마차에서 내려 시청자와 대화하는 걸 들었다.

 “마부도 길드가 있어요?”

 “사람 좀 모이면 만드는 게 길드니까. 길드라 해서 뭐 거창한 건 아니야.”

전생에 봤던 인터넷 유머에도 그런 게 있었던 거 같은데. 한국에 있는 전국 양배추 운송연합회에 관한 이야기. 비밀 결사 프리메이슨도 한글로 직역하면 결국 자유 석공연합회고.

 “그러면 롤랑은 왜 마차를 안 타고 다녀?”

 “내가 가볍게 뛰는 게 마차보다 몇 배 빠르거든. 그리고 그런 도시 내부를 돌아다니는 마차는 커다란 길드나 외지인이 많이 머무는 숙소 쪽을 돌아. 탑에 들어가는 모험가들은 마차를 잘 안 타거든.”

 “…아, 그것도 그렇네.”

초보 모험가들은 마차 값을 낼 돈도 아끼기 위해 마차를 타지 않는다. 중급 모험가부터는 가볍게 걸어도 도시 내부를 서행하는 마차 정도의 속도가 나온다. 따라서 마부 길드의 주요 고객층에 모험가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

별거 없는 내 설명에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흥미롭게 듣는 네 사람. 칭호가 ‘검의 공녀’ 라더니 진짜 귀족 아가씨인지 케이든조차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게임에 접속해 상식도 없는 플레이어, 도시를 모르는 화전민 마을 출신, 신전에서 나고 자란 예비 성녀, 정체를 숨긴 남장여자 귀족 아가씨까지. 모험가 도시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조합이긴 하네.

 “그러니까 도시에서 유명한 곳을 가 보고 싶으면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좋아. 골목 구석구석을 전부 다니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길드부터 유명한 상회까지 어지간한 도시의 주요 장소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아 씨, 진짜였네. 누가 게시판 글 좀 보라고 해서 봤더니…. 그래, 니들이 나보다 도시는 더 많이 돌아다녔구나. 근데 탑 오르는 게임에서 굳이 도시 미니맵을 100% 채우고 나서 탑에 첫 입장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한세아가 내 게시글을 직접 본 건 아니고, 한세아를 놀리듯 작성한 게시글이 일종의 도화선이 되어 시청자들이 놀려 먹은 모양. 아무래도 숲에서의 첫 사냥은 매우 정석적이었기에 어그로를 끌 만한 내용이 없어서 게시글을 들먹였나 보다.

물론 남장 여자 케이든에 관한 이야기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대부분 남장 여자를 핑계 삼은 천하제일 이상성욕 자랑대회로 끝났거든. 남장 여자와 여성스러운 남자의 차이가 뭐냐며 다양한 성욕에 대해 떠드는 시청자들은, 여자 방송인이 입에 담기 힘든 주제긴 하지.

 “마법사 한나 양, 확인되었습니다.”

인벤토리에서 마탑의 패를 꺼내 든 한세아를 필두로 게이트 안으로 진입한다. 도시에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초원을 밟게 되는 오묘한 기분. 그 많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고요한 초원에 우리 파티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늘은 12층에 진입한 뒤, 통로를 기준으로 동쪽을 탐색할 생각이에요. 그레이스 언니, 부탁할게.”

 “그래, 그럼 바로 어제 찾은 12층 통로까지 가면 되는 거지?”

미적거릴 생각은 없다는 듯 곧바로 파티의 리더로서 지시하는 한세아. 뿔토끼나 뿔여우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덤벼드는 뿔늑대를 처리하며 랜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10층과 11층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고, 11층과 12층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는 게 탑의 구조. 몇몇 계층은 통로와 통로 사이의 거리가 가깝지만, 반대로 몇몇 계층은 거리가 꽤 멀기도 한다.

그러니 이정표 하나 없는 숲에선 자신이 타고 올라온 통로를 기준 삼아 주변을 탐색하는 게 정석적인 모험가들의 방식이다. 나 없는 사이에 어디서 공부라도 하고 왔나. 한세아 주변에서 이런 상식을 가지고 있는 건 엘리스 정도겠지.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꽤 친하게 지냈으니 길드 접수원으로서 초보 모험가 딱지를 떼어 낼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준 건가. 그리 생각하며 조용히 숲을 걸으니 이번에도 그레이스가 수신호를 보낸다.

 “앞쪽에 코볼트 부락이 있는 것 같아.”

 “수는?”

 “대략 열다섯 정도.”

홀로 덤벼드는 이끼늑대와 투구사슴 때와는 달리 이번 상대는 무리를 지은 소형 몬스터. 그래도 한 번 겪어봤다고 능숙하게 자리를 잡는 파티원들. 내가 앞장서고, 파티의 중앙에 사제와 궁수와 마법사가 쉴드로 버티고 후열에서 케이든이 검을 휘두르는 진형.

포지션을 잡은 걸 확인하고 한세아가 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짓한다. 사실 이 거리에서는 말로 해도 되는데, 그레이스가 보여주는 수신호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 씨, 무슨 겉멋충이야. 그레이스 언니도 몬스터 감지하면 막, 이러케? 어?”

그새를 못 참고 한세아를 놀려먹는 시청자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세아의 목소리를 등진 채 기척도 죽이지 않고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간다.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박살 내며 전진하니 드러나는 숲의 공터. 그레이스의 말대로 열네 마리의 코볼트가 햇빛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움막을 짓고 채집을 시작하기 전인, 방금 리스폰 된 녀석들인가.

개와 쥐를 뒤섞어 둔 것 같은 털북숭이 짐승 대가리. 크기는 고블린과 엇비슷하지만 털 때문인지 덩치가 조금 더 커 보인다.

컁컁―!

저놈들에게 나는 갑자기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강철 거인처럼 보이겠지. 고블린보다 좀 더 짐승에 가까운지 경계심을 느끼며 나를 포위하려는 놈들.

 ‘내가 두 마리만 사냥하면 되겠지.’

한세아, 그레이스, 케이든 세 명이서 열두 마리를 사냥하면 대충 한 명당 네 마리꼴이네. 그런 계산을 하며 앞으로 성큼 걸어가 정면에 있던 코볼트를 발로 뻥 차버렸다.

10층 이하에서 나오는 고블린보다 튼튼하고 살집도 있는 놈이지만, 내 발차기를 견딜 리 없지. 키엑 소리도 내지 못한 놈 하나가 탱탱볼처럼 뻥 하고 날아가 나무둥치에 처박힌 뒤 마석으로 변해 사라진다.

그제야 비명을 지르듯 꽥꽥거리며 나를 지나쳐 뒤쪽으로 달려가는 코볼트 놈들. 그래도 꼴에 몬스터랍시고 도망치지 않고 뒤에 있는 체구가 작은 여자들을 향해 달려든다.

 “마법사가 파티에 있으니 참 편리하군요. 대단하십니다, 한나 양.”

 “이게 다 아이린 양의 보호막 덕분이죠.”

 “아, 아니에요. 한나 양의 마법, 엄청 빠르고 정확하니까….”

그래 봐야 적당히 담소를 나누는 파티원들에게 처리될 뿐이지만.

숲을 탐색하는 일행들에게선 긴장감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혼자서도 14층에 도달한 검사가 합류했는데, 고작 12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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