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75)

투둑, 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을 소음에 그레이스가 천천히 손을 추어올린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다잡으며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파티원들. 그 모습을 보고 숲의 어둑한 곳에서 얼룩덜룩 지저분한 늑대 한 마리가 뛰쳐 오른다.

크아앙―!!

한 입 깨물리기라도 하면 뼈가 드러날 것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주둥아리. 그러나 그 흉포한 이빨이 누군가를 깨무는 일은 없었다.

 “붙잡았다. 움직여!”

 “넷!”

덮쳐드는 야수가 아니라 품 안에 안겨드는 여인을 부드럽게 감싸듯 붙잡았거든. 혹시라도 반사데미지가 발동될까 봐 아가리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고 조인 뒤, 할퀴려는 앞발까지 양손으로 붙잡은 자세.

늑대의 뒷발이 버둥버둥 숲의 흙바닥을 긁으며 난동을 피우지만 유일한 공격 수단인 아가리가 꾸욱 눌린 상태로는 반항 따위 할 수 없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흙먼지 사이로 번쩍거리며 날아드는 길쭉한 한손검. 날카로운 검날이 붙잡힌 앞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늑대의 가슴팍과 배를 길게 긁고 지나간다. 동시에 등 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화살.

멈춰 있는 표적은 손쉽게 맞힐 수 있다는 걸 자랑하듯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든 화살이 정확하게 이끼늑대의 코를 꿰뚫어버린다. 그 뒤 마지막으로 날아드는 건 화살보다 느리지만, 파괴력만큼은 비교할 수 없는 한세아의 매직 미사일.

 “…이끼늑대가 이렇게, 쉽게 죽는군요.”

퍼억― 하고 옆으로 휘어 날아든 마법이 이끼늑대의 옆구리를 후려치자 끄으응,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품 안의 이끼늑대가 마석을 남기고 사라진다.

 “뿔늑대보다 확연하게 강한 놈은 아니거든. 털가죽에 있는 이끼 때문에 은신 능력이 더 뛰어나고 똑똑할 뿐이지, 전투력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아. 조금 전처럼 급소를 노려 정확히 연계하면 숲의 몬스터는 쉽게 정리할 수 있다.”

 “그렇군요.”

웃돈을 주고 구매한 그레이스의 활, 만월 늑대를 잡은 보상으로 받은 한세아의 스태프와 추가된 스킬 포인트, 그리고 4★답게 준수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케이든의 날카로운 검격까지. 네임드 몬스터도 아니고 잡몹 하나 잡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공격력이다.

다만 혼자 14층까지 간 경험이 있는 케이든은 약간 감격한 것 같은 눈치였다. 혼자 탑을 오르면 탐색 능력이 부족해 이끼늑대에게 기습을 허락하고, 그 뒤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을 테니까.

이끼 늑대의 은신을 간파할 탐색꾼과 달려드는 걸 몸으로 막아 세우는 탱커가 있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겠지.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린 한세아가 말을 이어받는다.

 “그렇다면 11층에서 머무를 이유는 없으니, 그레이스를 위주로 천천히 탐색해 탑을 오르는 걸 목표로 삼는 게 좋겠어.”

 “확실히, 이 파티는 11층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준인 것 같습니다.”

6★, 5★, 4★ 옆에 있으니 3★인 그레이스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거지, 많은 플레이어가 2★와 만나 시작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레이스 또한 평균 이상의 강력함을 자랑하는 궁수.

자신이 몸담게 된 파티가 지도역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구성원까지 정예라는 걸 알게 된 케이든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한세아도 그레이스도 제 공격이 통하니 꽤 기쁜 모양.

 “이끼늑대와 투구사슴은 말한 것처럼 내가 붙잡을 테니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물론 말했듯이 몇 번 흘릴 테니 너무 긴장 풀지는 말고.”

 “네! 그럴 땐 제가 자매님들을 보호하면 되는 것이군요?”

이어지는 내 당부에 혼자 할 일이 없던 아이린이 곧바로 대답한다. 신전의 사람으로서 고행에 대한 신념 같은 게 있는지 몸이 편한 걸 견디기 힘든 모양. 그래도 코볼트나 고블린 무리를 만나 난전에 들어가면 할 일이 생길 테니 상관없겠지.

이끼늑대의 마석을 챙기고 다시 그레이스의 탐색 기술을 앞세워 울창한 숲을 탐험한다. 초원과는 달리 걸음을 방해하는 숲의 험난한 지형. 산처럼 경사진 건 아니지만 걸음을 방해하는 뿌리와 시야를 방해하는 가지가 잔뜩 있다.

거기에 울창한 만큼 그늘진 곳에는 위장 색을 띤 이끼늑대가 숨죽인 채 도사리고 있고, 조금 탁 트인 곳에서는 투구사슴이 기다렸다는 듯 마치 기마병처럼 달려든다.

 “여신이시어, 가호하소서!”

 “뒤를 치겠습니다, 보조를!”

물론 내가 슬쩍 몬스터를 뒤로 흘린다 해도 그걸 막아 세우는 건 5★ 사제의 사기적인 보호막. 한세아의 쉴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단단한 신성력의 가호가 날카로운 투구사슴의 뿔을 가볍게 막아 세운다.

허공에 제 뿔이 막혔다는 사실에 성질이 났는지 거친 콧김을 훅훅 뿜으며 박치기를 하듯 머리를 딱딱 내리쳐 뿔을 마구 찌르는 투구사슴.

보호막 안에서 보호받는 세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대가는 뒷다리를 깔끔하게 베어내는 케이든의 칼질이었다. 서걱- 날카로운 검격이 뒷다리를 베어버리자 길고 커다란 뿔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자빠지는 놈.

케이든이 추가타를 넣을 필요도 없이 훤히 드러난 앞다리 사이로 화살이 틀어박혀 심장을 꿰뚫어버린다.

 “하, 이번에는 마법도 쓰지 않고 끝났네. 그레이스 언니의 화살이 생각보다 강하구나?”

 “11층에 오는 기념으로 활도 화살도 전부 바꿨지. 마탑이 갑옷을 챙겨줬으니, 모아둔 저금을 전부 사용했거든.”

 “확실히 돈 값하는 것 같아.”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 그레이스가 앞장선다. 모험을 겪도록 11층 이상의 길잡이가 될 랜턴이 없는 상황. 순수하게 그레이스의 탐색력에 기대 고층으로의 입구를 찾아야 하는 모험인 것이다.

아무리 울창하다 해도 그레이스는 탐색꾼인 레인저. 몇 번이고 이끼늑대의 기습을 알아차리고, 근처에 있는 고블린과 코볼트의 무리를 발견해 낸 뒤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척척 걸어가기 시작한다.

뒤따라가며 품 안에 있는 20층 행 랜턴을 슬쩍 엿보니 그녀가 향하는 곳은 정확히 12층으로 향하는 방향. 마법사에게 마나에 대한 감각이 있다면, 탐색꾼에게도 특유의 감각이 있는 걸까.

 “…이쪽으로 가면 곧 12층의 통로가 나올 것 같아.”

 “그러면, 오늘 모험은 12층 통로를 기록하는 거로 끝내는 게 좋겠어.”

 “하루에 한 층, 아니, 반나절에 한 층이라. 그레이스 양은 생각보다 뛰어나신 탐색꾼이시군요.”

감탄한듯한 케이든의 칭찬에 그레이스의 뺨이 붉어진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흑심이나 악의 따위가 없이 정말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에 감탄하며 입을 헤- 벌린 상황이니 부끄러울 만하지.

그래도 그녀의 호언장담이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듯 몇 분간 앞으로 걷자 울창한 나무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탑의 통로. 그레이스가 품 안에서 길잡이의 랜턴을 꺼내자 미동도 없던 랜턴의 마석 조각이 느릿하게 둥실 떠오른다.

 “12층의 통로, 기록되었어. 올라가지 않고 내려간다고 했던가?”

 “네, 언니. 좀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탑에서의 야영도 생각해 봐야 하지만, 아직은 파티의 합을 맞추는 단계니까요.”

 “확실히 게이트가 생기니 편하긴 하네요. 원래 10층을 넘는 순간 무조건 탑에서의 노숙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렇게 하루 만에 숲에서의 의뢰를 처리할 수 있다니.”

 “케이든 씨는 혼자 14층까지 올랐다고 했었죠? 그러면 숲에서 노숙한 건가요?”

 “네. 탑에는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몇몇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레베카님의 용병단은 그 안전지대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둔 상황이구요. 그 덕분에 혼자 탑을 올라도 불침번 없이 밤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죠.”

케이든이 말하는 건 일종의 세이프 존. 용병단이나 모험가 길드의 원정대가 머무르게 되는 공간이다. 저 세이프 존의 위치를 모르는 초짜들은 밤에 습격을 당해 체력이 갉아 먹히는 거고.

처음 탑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랜덤 스폰되는 몬스터부터 세이프 존까지 완전 게임 같다고 생각했었지. 아무리 상태창이니 뭐니 외쳐도 반응이 없어서 그런갑다 하고 넘겼지만. 남들 앞에서 안 외치고 숙소에서 혼자 소리 질러서 다행이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행하고, 10층으로 되돌아가죠.”

1층에서 들어온 위치를 찾으면 나갈 수 있듯, 10층의 초원에서도 나갈 수 있게 되니 이렇게 편할 줄이야. 나중에 20층, 30층도 이런 게이트가 만들어지겠지?

숲에서의 하루를 보낸 뒤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 12층의 통로를 찾은 김에 밖으로 나왔다지만 초원을 걸을 일이 없어 생각보다 빠르게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방송 덕분에 현실의 시계를 가지고 있는 한세아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속도.

물론 일은 적게 하되 돈은 그대로 벌었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한세아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도시 탐방을 하러 떠났고, 그레이스는 새 활을 조금 길들이겠다며 사냥꾼 길드의 궁술 연습실로 향했다.

남은 건 오늘 처음 만난 케이든과 나. 자신이 남장한 상황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그녀가 후다닥 자리를 떠난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용병답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걸까.

만약 진짜 용병이었다면, 그것도 레베카 용병단의 신병이라면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서는 좋은 아가씨가 나오는 풍속점이 어디냐고 물어봤을 텐데. 그쪽 아저씨들은 내가 얼굴로 여자 꼬시는 걸 자주 봤거든.

그렇게 혼자가 된 나는 자연스럽게 술 한 병을 사서 숙소로 향했다

―만월 늑대한테 털린 썰.SSUL

―게임 너무 쉬워보이던데

―왜나만운없어왜나만운없어

―이시대 최악의 게임사 BB게임즈

―ㅋㅋ 누가 칼 들고 협박함?

목적은 당연하게도 이번 퀘스트 보상으로 얻게 된 게시판 글쓰기 권한. 평소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웹페이지의 홀로그램 구석에 버튼 하나가 추가로 생겨 있었다. 내 살다 살다 ‘글쓰기’ 세 글자가 이리 반가울 줄이야.

일단 글을 쓰기 전 게시판부터 둘러보았다.

―ㅋㅋ 누가 칼 들고 협박함?

[마차를 타고 있는 플레이어.JPG]

[울타리가 무너진 화전민 마을.JPG]

뿔늑대한테 찔려 뒤지기 싫어서 왕국 떠도는 중.

모험가 길드 안 가고 용병단 들어가서 의뢰 뛰어도 레벨 오름.

탑 꼭대기는 방송인 주고 우리 같이 고블린 잡지 않을래?

┗그거 돈 좀 되냐?

 ┗탑 저층이나 용병단 따까리나 비슷하긴 함

┗어떤 놈은 대장장이 도제로 들어가더니 얘는 도시 밖으로 탈출했네

┗도시 밖으로 가면 아침에 어디서 부활하냐?

 ┗용병단 캠프에 있는 내 침낭에서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라는 게임은 메인 퀘스트가 탑을 오르라고 할 뿐이지 강제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탑을 오르기는커녕 온갖 변태 플레이어들이 광활한 오픈 월드를 씹고 뜯고 맛보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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