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75)

 “오늘은 안 데려왔는데, 꽤 쓸만한 놈이야.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입 애송이 수준은 아니거든.”

 “그래서, 몇 층인데요.”

 “혼자서 14층. 용병단 짐꾼으로는 딱 20층. 너희 파티에 들어가기 딱 좋은 수준이지?”

 “장비는요.”

 “좀 기다란 한손검. 칼이 좀 독특하긴 해도 실력은 괜찮아.”

 “아, 좀 아깝네. 한손검인데 방패는 안 써요?”

 “그래서 독특하다는 거야. 한손검인데 가끔 양손으로 휘두르기도 하고 막 그래.”

공격 위주의 전위라, 나쁘진 않은데. 별이 붙어 있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혼자서 14층까지 올라온 수준이면 면접은 봐도 되겠네. 레베카도 털털하고 막 나가긴 해도 칼질에는 솔직한 여자니까.

슬쩍 한세아의 눈치를 보니 레베카에게서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른다. 그녀의 외모와 실력을 본다면 최소 4★, 나한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은신을 생각하면 5★이니 당연하려나.

물론 그런 열렬한 시선을 외면할 레베카가 아니지.

 “뭐야, 마법사 아가씨. 나한테 관심 있어? 탑에서는 꽤 외로우니까 나는 여자도 환영이긴 한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대놓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찔꺽찔꺽 허공에 흔들며 성희롱을 하는 레베카의 말에 한세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 적나라한 손짓에 그레이스와 아이린도 헥, 하고 덩달아 충격을 받고.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레베카는 진짜 짐승 같은 여자였다. 침대 위에서의 음담패설이 아니라 먹고 자고 싸고 말하고 싶은 걸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내뱉는 꼴이. 저런 주제에 용병단은 잘 이끌고 다닌단 말이지.

 “걔가 우리 파티 리더니까 여기 있는 한나를 찾아오라고 해요.”

 “뭐야, 니가 리더가 아니라고?”

 “난 원래 머리 안 쓰는 거 알잖아요.”

 “그건 그렇지. 아무튼, 내일쯤 보낸다.”

그렇게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레베카. 쿠키 가루 잔뜩 묻은 손으로 내 등을 팡팡 두드리고선 성큼성큼 카페 밖으로 사라진다. 물론 그 커다란 보폭의 발소리는 카페의 고요함 속에서도 들리지 않는 수준.

 “아….”

 “뭔가, 호탕하신 분이네요.”

 “모험가도 아니고 용병이랑도 인연이 있었어?”

그렇게 레베카가 떠나자 세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뭔가 아쉬워하는 한세아, 레베카의 태도를 신기하게 느끼는 아이린, 내 과거에 호기심을 느끼는 그레이스. 세 명의 각기 다른 반응을 보며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과자랑 커피를 다 털리기도 했고, 세 사람도 먹을 건 다 먹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5★이라지만 타이틀이 용병 여왕인데 내가 어떻게 꼬셔. 니들 삼전 이사가 동네 슈퍼마켓 부사장으로 이직하는 거 봤어? 그럴 거면 어? 아주 왕국 국왕한테 가서 탑 등반하게 나라를 넘기라 하겠네.”

5★ ‘용병 여왕’ 레베카에게 말도 못 붙이고 성희롱에 얼굴만 붉힌 게 시청자들이 보기엔 꽤 재미있었나 보다. 그녀가 백 단위의 용병들을 이끌고 다닌다는 사실과 나보다 탑의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세아가 아무리 현실을 들먹이고 정론을 말해도 시청자들은 얼굴을 붉히고 펄펄 뛰는 한세아를 그냥 놀리고 싶은 것처럼 보이니까.

입으로는 열심히 시청자들에게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얌전하게 아이린과 팔짱을 낀 채 신전으로 가고 있었다. 저것도 방송인으로서의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아이들이 한나 자매님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서 놀랐어요. 그만큼 한나 자매님이 사려가 깊고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침대 드립쳤을 때 받아줬으면 동료로 들어왔다고? 너 밖에 나가서 그러면 진짜 경찰서 간――― 아, 그래요? 고마워요 아이린 님.”

시청자들이 제보한 내용 중, ‘동료와의 불화로 인한 파티 해산’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거든. 그레이스가 여전사 코, 라였나? 아무튼, 파티장과 싸우고 우리 파티에 들어온 것과 같은 이야기. 모험가 파티라는 게 무슨 종속 계약도 아니고 뼈를 묻을 리 있나.

그 때문에 한세아는 게시판의 의견에 따라 아이린의 호감도를 쌓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도 아이린도 나를 보고 찾아온 상황이지만, 나는 후배를 키우겠다는 일에 흥미를 느낀 것처럼 보일 테니까.

동료를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는 우직한 탱커가 갑자기 파티를 휙 떠날 리 없다고 게임적으로 판단한 상황이겠지.

 “그래서 롤랑은, 어디로 갈 생각이야?”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거나, 숙소에서 쉴 생각인데.”

 “숙소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비싼 돈 주고 빌린 숙소에, 마도구까지 잔뜩 모아 왔는데 알뜰하게 써먹어야지.”

그렇게 반반 갈라진 우리 파티 일행. 한세아는 넓은 신전에서 가보지 못한 곳을 아이린과 함께 방문해 미니맵을 채울 생각이고, 그레이스는 신전의 뒷부분까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둘씩 갈라지게 되었다.

정확히는 둘과 하나와 하나로 갈라졌지만, 그레이스가 내게 온 상황. 온 이유야 뻔하긴 하지, 내가 무슨 로맨스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뻔한 호감을 모른 척할 이유가 없는데.

 “아니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어?”

 “시간도 남았는데 같이 다니자는 거야.”

 “……사냥꾼 길드에 가서 화살을 좀 보고 싶어.”

뺨을 붉힌 그레이스가 내 질문에 느릿하게 대답한다. 장비 쇼핑이라, 나쁘지 않지. 만월 늑대의 보상으로 그레이스가 받은 건 갑옷뿐. 애초에 마탑이 화살을 제작하지 않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로브도 스태프도 마도구도 마탑이 직접 만드는 물건이고, 그레이스가 받은 가죽 갑옷도 마법과 연금술의 합작품이라 받은 거니까. 그녀가 사용할 활과 화살은 사냥꾼 길드에 가서 찾아보는 게 맞지.

 ‘근력도 좀 붙었을 텐데, 장력이 더 강한 활을 하나 사 줄까.’

그레이스가 장비한 활은 모험가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사냥꾼의 활. 견습 레인저답게 관리가 잘 되어 있다지만, 품질이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화전민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활이 모험가의 도시에서 만든 활보다 좋을 리 없으니까.

 “화살이 아니라 활을 바꿀 생각은 있어?”

 “있기야 하지. 왜?”

 “부족한 돈, 조금 보태 줄 테니까 바꾸는 게 어떨까 해서.”

 “하긴, 장비 바꿀 돈을 전부 활에 투자하면 바꿀 수 있겠네.”

그레이스는 나와 아이린에 비해 별의 개수가 적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이 세상은 히로인즈 크로니클처럼 오직 별의 개수만으로 전투력이 측정되는 건 아니니까. 대표적인 예시가 아이린과 레베카.

같은 5★이지만 신전에서 고아를 돌보던 아이린이, 나보다 오랜 시간을 단련한 레베카와 비등하게 싸울 리 있나.

물론 화전민 마을의 사냥꾼 소녀였던 그레이스에게 그 정도의 숙달된 전투 경험치를 요구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부족한 전투력을 채워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그리고 내가 꽤 자신 있는 분야.

돈, 그러니까 현질.

 “이번에 전위로 들어오는 녀석이 있다면, 11층부터는 내가 직접 나서지 않을 생각이야.”

 “키워 본다고 했던 거?”

 “그 녀석만 키우는 게 아니라 너도, 한나도 키우는 거지.”

패시브를 생각하며 내가 적당히 막아서면, 한손검을 든 전위가 옆구리를 치고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원거리에서 지원한다. 처음 한세아를 만나고 그녀가 마탑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부터 계획해 왔던 조합.

저층의 뿔토끼와 뿔여우 따위는 전투 경험치를 쌓기엔 너무나도 연약하다. 발로 걷어차도 죽는 놈들인데 무슨 경험치가 쌓이겠는가. 물론 그런 놈들에게도 죽는 머저리가 꽤 있지만.

아무튼, 조합이 완전히 갖춰진 채 11층에 진입한다면 그때야말로 모험의 진정한 시작이라 봐도 좋았다. 그때부터는 내가 다 때려잡는 건 최대한 자제해야겠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한세아가 쓴 마법은 내가 붙잡아 둔 뿔늑대를 표적 삼아 쏜 것 말고 거의 없다.

 “키워준다니… 호사스럽네.”

 “20층대도 아니고 37층의 모험가가 키워 주는 거야. 호사스러운 건 맞지.”

내 으스대는 듯한 농담에 깔깔 웃어 보인 그레이스와 나란히 걷는다. 시종을 통해 은밀한 초대를 하는 미망인과 귀부인들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사랑하는 소녀와 함께하는 풋풋함도 그에 못지않거든.

살랑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녀가 날 사냥꾼 길드로 안내한다. 가죽 갑옷을 입고 등에 시위 푼 활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빈번히 보이는 거리.

그레이스에게 있어 궁술은 밥벌이 수단이자 취미의 일환이기라도 한지 길거리를 둘러보는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하기야 강제로 배운 것도 아니고 원해서 배웠으니 당연하려나. 놀 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과녁에 화살을 쏘는 건 훈련보단 놀이에 가까울지도.

 “생각해 둔 가게가 있어?”

 “전에 봐 둔 물건이 있긴 해.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

점찍어 둔 장비를 구매하러 가는 게 기쁜 것인지, 나와 함께 하는 게 기쁜 것인지 발걸음도 가벼운 그녀. 익숙하다는 듯 짐승과 몬스터 가죽이 잔뜩 걸려 있는 골목길로 파고들어 어느 자그마한 가게로 쏙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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