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10층 게이트의 무제한 이용권이랑, 저랑 그레이스 언니의 중급 모험가용 장비 세트. 아이린 언니랑 롤랑한테는 원하는 마도구를 하나씩 준다고 해요. 만월 늑대의 부산물을 전부 게이트 만드는 데 써서 지급할 수 있는 현금이 없다고.”
“마도구? 그거 좋네.”
그다음은 한 차례 업그레이드된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장비. 한세아는 마력으로 직조한 마법사의 로브와 커다란 마석이 박힌 스태프를, 그레이스는 마법 시약으로 무두질한 가죽 갑옷을 받았다.
물론 중급 수준의 장비가 의미 없는 나와, 탑에서의 고행에 수녀복을 고집하는 아이린은 장비 대신 마도구를 받았다. 나는 숙소에 둘 공기 청정기 비슷한 정화 장치 마도구를, 아이린은 아이들이 겨울에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온도 유지 장치 마도구를.
‘돈 대신 장비와 스킬 강화인가? 나쁘진 않네.’
시스템적인 이야기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더해 마법사인 한세아는 스킬 포인트가 좀 늘어난 모양. 다른 직업들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보스를 잡는다는 게 마탑에 공헌한 게 되어 혜택을 받는 느낌으로 게임이 진행된 것 같았다.
그렇게 방송국 게시판을 곁눈질하는 중 카페의 테이블에 모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우리 파티원들. 만월 늑대를 토벌한 다음날인 만큼 하루 정도는 쉬자는 그레이스의 의견에 따라 시장 거리에 모인 상황이었다.
그야 모험가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직업인 만큼, 쉴 때 쉬지 않으면 과로로 픽 쓰러져 죽으니까. 게이머의 감각으로 매일 접속해서 매일 사냥을 하면 주 7일제가 되어버린다고.
주 7일제 월 360시간 근무제(사망 보험 없음)라니, 그게 무슨 미친 스케줄이야.
“그런데 게이트 무제한 이용권이라니?”
“마탑이 연구를 위해 그 비싼 게이트를 생성했으니까. 만월 늑대의 부산물이 아니더라도, 그런 공간 이동용 게이트는 재료비만 해도 어지간한 귀족들 장원보다 비쌀걸.”
“확실히, 대단한 마법 같기는 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간 이동용 게이트는 애들 장난감처럼 쉽사리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공간을 건너뛰는 마법이 값싸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게이트를 쉽게 만들 수 있으면 내가 왕국 외곽에 의뢰 나갈 때 게이트 타고 나갔지. 왕국의 도시를 연결하는 게이트는 찾아보기도 힘들고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고위 귀족과 마탑의 높으신 분들뿐.
그런 게이트를 고작해야 평민 모험가 나부랭이에게 무제한으로 열어주었다는 것만 해도 커다란 혜택이다.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돈 대신 특권층의 일부로 편입시켜 준다는 의미를 지녔으니까.
“그러면 내일부터는 10층에서 시작인가? 그건 되게 좋다.”
쬬옵, 음료수를 빨아들이며 말하는 그레이스. 돈도 되지 않는 1~9층의 초원을 건너뛸 수 있으면 대부분 좋아하겠지. 게이트 가격이 어지간히 바가지가 아니라면 중급 모험가는 100% 사용하지 않을까.
마법사들도 생각이 있다면 가격을 적당히 잡겠지. 뿔늑대 사냥으로 먹고사는 10층 모험가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아홉 층계를 걸어서 이동하느니, 마탑에 게이트 이용비를 지급하고 그 시간 동안 뿔늑대를 더 사냥하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물론 무료로 이용할 우리 파티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그 늑대, 뭐였을까?”
“음?”
“만월 늑대 말이야. 갑자기 탑 밖으로 등장한 몬스터라니, 거기에 무리를 이끌고 등장했으니 엄청 큰일이잖아. 너무 손쉽게 해결되긴 했지만.”
“그건,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생각을 하던 내게 화살을 돌리는 그레이스. 지난번 놀려먹은 앙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나 보다. 의외인 것은 그레이스의 말에 아이린이 맞장구를 쳤다는 점. 그레이스도 아이린의 호응이 당황스러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린을 바라본다.
물론 세상 착하고 소심한 예비 성녀님이 아쉬워하는 건 모험이 쉽게 끝나버렸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신앙에 몸담아 고행길에 나선 입장으로선 이토록 쉽게 헤쳐나가도 되나 싶지만, 신전에서 사람들을 돌봐야 할 수녀로서는 다치는 사람 없이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기쁘거든요. 조금 복잡한 마음이네요….”
“아, 그런가요? 하긴 다친 사람이 없으면 된 거죠.”
신전의 사제들이 탑에 오르는 건 일종의 고행이자 순례에 가깝다. 기독교의 순례가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방문하는 것이라면, 여신교의 순례는 여신의 뜻이 닿지 않는 곳에 신성력을 품은 이들이 직접 방문하는 것.
그런 의미를 품은 종교적 모험이 너무 쉽게 진행되니 약간 허무하겠지. 뭐라고 해야 할까, 직접 발로 걸어야 하는 800km짜리 순례길에 셔틀버스가 운행되는 그런 느낌? 거기에 그 셔틀버스가 사람 목숨을 구해 추가 인명 피해가 없으니 더 마음이 복잡하겠지.
자그마한 쿠키를 오물거리며 복잡한 표정으로 심정을 토해내는 아이린을 달래는 건 역시나 한세아. 귀한 5★ 힐러님이 모험에 회의를 느낄세라 마들렌을 씹다 말고 급히 입을 연다.
“아아, 그래도 쉽게 해결된 덕에 여신님의 뜻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쉽게 헤쳐나가는 걸 기뻐해도 되잖아요.”
“그것도 그러네요. 한나 자매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한 사람은 자기 몸매를 꽁꽁 싸매 감췄지만, 아무튼 거리에서 보기 드문 미녀들이 배시시 웃으며 수다를 떠니 자연스럽게 모이는 시선들.
도시의 자유민들이 감당하기 힘든 비싼 디저트를 파는 카페인지라 귀족 아가씨들이 손님의 대부분인 카페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와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툭, 후려친다.
“야, 꼬맹이! 못 보던 새 취향 많이 바뀌었다?”
“……?”
무례함과 호쾌함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언동. 일행들도 깜짝 놀라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 바라볼 정도로 뻔뻔하게 구는 여자.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무례한 언동 때문이 아니었다.
‘…맞을 때까지 못 알아차렸어?’
카페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대놓고 내 등 뒤로 걸어왔음에도 느끼지 못한 인기척. 전문적인 탐색꾼 수준은 아니지만, 초인적인 몸뚱이로도 뒤통수를 맞을 때까지 감지하지 못하다니?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키가 늘씬하게 커다란 장신의 미녀.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빨간 머리는 윤기가 흐르지만 마치 짐승의 갈기처럼 조금씩 뻗쳐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누구?”
“엉? 이 새끼, 못 본 사이에 농담도 늘었네. 처음 탑에 오를 땐 용병단 신삥처럼 죽상이 되어서는 질질 짜던 게.”
“어, 혹시, 레베카?”
“혹시 레베카는 뭐야, 인마. 그냥 레베카지.”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내가 마시던 아이스 커피를 빼앗아 한입에 벌컥벌컥 마셔버린다. 새하얀 이빨이 고기를 씹듯 얼음을 와작와작 씹는 모습에 겨우 떠오른 이름 하나.
37층에서 헤어져 지금은 탑의 43층에 있어야 할, 용병 레베카.
내 등 뒤로 인기척 없이 접근할 정도의 수준의 빨간 머리 여전사라면 한 명뿐이다. 말투, 몸짓, 성격을 보면 부정할 수 없이 레베카 본인이지만… 내가 못 알아본 이유는 하나.
레베카는 이런 미녀가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졌네요.”
“간만에 도시로 돌아와서 때 좀 벗겼지. 왜, 누님 얼굴 보니까 마음이 좀 간질거려?”
의자에 앉아 건들거리며 다리를 꼬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그레이스와 아이린과는 달리, 입이 떡 벌어진 채 허둥지둥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세아가 보인다. 역시, 그냥 예뻐진 게 아니라 별이 붙어버렸구나.
동네 제빵사 아줌마부터, 꾀죄죄했던 화전민 소녀였던 그레이스까지 다양한 사람이 가챠 캐릭터가 되어 별이 붙은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 대상이 과거에 몇 년이나 알고 지내던 사람이면 느낌이 좀 다르네.
“그나저나 다시 탑에 들어올 생각이냐? 안 그래도 요즘 쓸만한 전위 놈들이 없어서 귀찮아 죽겠는데.”
“바로 43층에 가진 않을 거예요.”
“니가 키운다는 그 초보자 파티 때문에? 그 짧은 사이에 사제님도 꼬셨네, 재주도 좋아.”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레베카. 그래도 아름다운 외모 덕분인지 지저분하고 무례하다기보다는 털털하고 호탕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가챠 캐릭터로서 별이 붙기 전에는 지저분한 들짐승에 가까운 여자였는데. 탑 내부라는 악조건 속에서 머리는 봉두난발에, 제대로 씻지도 못해 짐승 누린내에 가까운 악취가 나던 노숙자에 가까운 모습.
자원봉사자가 서울역 노숙자를 씻기고 머리를 다듬었더니 노숙자가 원빈이 되어버린 기분이라 해야 하나.
“저기, 이분은…?”
“나? 나는 레베카. 칼밥 먹고 살다가 큰돈 만지려고 탑 오르는 년.”
아이린의 질문에 잇몸이 보이도록 씩 웃어 보인 그녀가 이번에는 내 몫의 쿠키를 한 줌 쥐어 으적으적 씹어 삼킨다. 뭐라고 해야 하나, 모범생 그룹 사이에 난입해 온 일진녀를 보는 기분인데. 그것도 체육 특기생 일진녀.
그래도 초보 모험가 시절 물심양면 도와주고 키워줬던 내게는 막 대할지언정, 신전의 사제에게까지 무례할 생각은 없는지 커피와 과자를 약탈하는 것에서 행동을 멈춘 그녀.
“그래서, 43층은 어쩌고 여기에 있어요?”
“너 때문이지 뭐. 이번에 무슨 희귀종 뿔늑대 잡아서 탑 10층으로 가는 게이트를 열었다며?”
“아니 무슨… 하룻밤 만에 43층에 소문이 퍼졌다고?”
“이 새끼 탑 내려가더니 진짜 다 까먹었나 보네. 43층에 있는 마법사 영감님이 탑 내부 게이트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역행해서 내려가야 한다고 게거품 물고 지랄발광을 하잖냐. 벌써 캠프에 이야기가 쫘악 퍼졌지.”
아, 노인네들이 43층에 있는 마법사에게 수정구로 자랑질이라도 했나 보네. 배부른 짐승처럼 의자에 늘어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 게이트 이용 관련으로 협상 좀 하려고 왔지. 야, 애들 키우는 거면 우리 애 중 한 놈 데려가서 키워볼래?”
외면이 아무리 아름답게 바뀌었어도 알맹이는 그대로라는 듯 레베카는 평소처럼 있는 힘껏 나를 놀려먹었다. 그나마 조금 바뀐 점이라면, 예전에는 은인이고 나발이고 주먹이 마려웠다면 지금은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점.
레베카의 알맹이가 여전했듯이 나 또한 여전히 여자한테 약한 놈이란 게 증명되어버렸다. 귀찮아서 모험가와 용병들이 꺼리는 의뢰, 의뢰주가 예쁘면 내가 몸소 나선다는 걸 나도 알고 레베카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