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75)

 “어, 벌써 와 계셨구나?”

그렇게 대화가 끝나가고 샤를롯이 제 용건을 말하려 들 무렵 타이밍 좋게 한세아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샤를롯을 보고 놀라지 않는 걸 봐선 마법사들끼리 뭔가 이야기라도 해 놨나.

그런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테이블에 합류한 한세아가 다짜고짜 결론부터 내놓는다.

 “만월 늑대를 잡으러 갈 때, 여기 계신 샤를롯 양도 합류 할 거예요.”

 “네?”

 “어, 왜?”

돈으로 고용한 탱커와 메이드 도적까지 데리고 있는 샤를롯이 왜 우리 파티에 합류하는가. 그런 의문을 담아 질문하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에게 한세아가 설명을 이어나간다.

 “샤를롯 양 혼자서 우리 파티에 합류하는 건 아니고, 마탑에서 지정한 마법사들의 파티 몇 개가 합류할 거예요. 우리가 만월 늑대를 만났을 때 뿔늑대 무리가 함께 있었던 점도 있고, 마법사들이 직접 이상 현상을 조사하고 싶다는 내용도 있었거든요.”

아직 말을 놓지 못한 아이린 때문인지 존칭을 사용해 설명해주는 그녀. 마법사들이 직접 연구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에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마법사는 뭔가 괴짜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탑에 직접 가겠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모양.

그런 한세아의 설명을 이어받은 샤를롯이 설명을 덧붙인다.

 “탑 밖으로 몬스터가 뛰쳐나온 건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도시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탑을 불경한 공간이라 선언한 신전도 이 일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모험가들의 도시는 탑 때문에 만들어졌고, 탑 때문에 유지되는 기묘한 모양새니까요.”

원래 도시라는 게 상업의 발전 때문에 만들어졌던가. 영주의 휘하에서 농노들이 농사를 짓던 영지와 달리, 상공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덩치를 불리며 만들어진 게 도시일 거다. 길드도 대장장이, 목수, 제빵사, 여인숙 주인들이 이익을 위해 만든 상인 협동조합이고.

하지만 이 세상은 마나가 존재하고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판타지 세상. 대장장이, 목수, 제빵사보다 가장 먼저 이익을 위해 모인 게 모험가들이다. 마나를 통해 직접적인 무력을 갖추게 되어 목소리를 누구보다 빠르고 크게 낼 수 있게 된 사람들.

탑에 모험가가 모여들고, 모험가가 뿌리는 돈을 본 상인들이 모여든다. 마탑과 신전은 탑의 연구를 위해 합류했다지만 도시의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모험가 때문에, 정확히는 탑에서 나오는 마석과 부산물 때문에 모여든 상황.

탑은 신앙적으로 불경한 공간이지만 모순적으로 도시의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광산과도 같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

광산 도시의 광맥이 마르면 광부들이 전부 실직자가 되어 도시가 폐허가 되어버리듯 모험가의 도시에서 탑에 이상이 생기면 모험가들이 전부 실직자가 된다. 그 경제적 여파는 당연하게도 시민들의 삶을 뒤흔들 테고.

 “마탑에서는 만월 늑대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등장한 몬스터들 중 유일하게 탑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마력. 밤의 초원이라는 특별한 필드를 생성하는 능력까지. 마탑은 이를 이용해서 탑 내부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어낼 계획이에요.”

 “와, 게이트요?”

 “네. 탑의 최상층에 있는 몇몇 마법사님들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물자를 올려보내려면 대규모 원정대가 필요한데, 원정이 길어지면 실험용 재료들과 시약이 상하는 문제가 있어서….”

모험가들은 쉽게 탑을 공략하고 부산물을 빠르게 이송한다는 이익이 있다. 마탑은 게이트를 뚫으면 수수료 장사를 할 수 있으며 마법사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신전의 입장은 모르겠지만 모험가 길드와 마탑이 손을 잡기에는 충분한 이유.

숏컷이 등장하면 플레이어로선 ‘아 편리하다’ 정도로 끝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혁신과도 마찬가지니까.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고속도로가 생기는 기분 아닐까.

 “그러면 일정이 어떻게 되는 거야?”

 “분석은 어느 정도 끝나서 오늘 정오에 원정대가 출발한다는데.”

 “시간이 좀 비겠네.”

이어지는 한세아의 말에 그레이스가 대답한다. 확실히 이른 아침부터 모였으니까 정오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상황. 그냥 바로 출발하면 안 되나 싶지만 하루 만에 분석부터 원정대 모집까지 끝낸 게 비정상적으로 유능한 일이긴 하지.

물론 원정대라 해서 거창한 건 아니다. 고작해야 10층에 가는 원정대니 샤를롯처럼 개인적으로 고용하거나 모집한 마법사들의 파티가 모여들 뿐.

 “시간도 남았는데, 같이 시장이나 가 볼까요? ……오, 부드럽다.”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난 그레이스가 자연스럽게 아이린의 팔짱을 낀다. 소심한 아이린을 위해 뒤에 덧붙인 말은 못들은 걸로 치고, 아무튼 친목을 다지려는 모양. 그 모습을 본 한세아도 내 쪽을 슬쩍 보더니 아이린의 반대편 팔을 붙잡는다.

셋이 친해지겠다고 쇼핑하러 간다는데 눈치 없이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나는 빼고 다녀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내 고갯짓을 보고 살포시 웃으며 아이린을 재촉한다.

 “…샤를롯 양은 안 가십니까?”

 “저는 마탑에 제 연구실이 하나 있어서요.”

 “마탑에 연구실이 있다니, 성취가 꽤 뛰어나신가 보군요.”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내 곁에 남은 건 분홍 머리 수다쟁이 아가씨, 샤를롯. 슬쩍 말을 붙여보니 배시시 웃으며 내 곁으로 조금 다가온다. 처음 만났을 때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의 반응이 너무 다른데.

 “개인적인 대화를 조금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어주시겠어요?”

얼굴을 보고 반했다기엔 요상한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느끼자 그걸 알아차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어느새 다가온 메이드 마리의 시중을 받으며 그녀가 나를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한다.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는 샤를롯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초보 모험가에서 벗어났지만, 귀족 아가씨인 만큼 질 좋은 장비를 착용한 그녀. 몸에 착 달라붙은 가벼운 로브 차림이 씰룩거리는 골반의 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슬쩍 뒤돌아서서는 배시시 미소짓는 그녀. 아이들을 돌보던 자애로운 이야기꾼은 온데간데없고 사교회에서 귀족 집안 자제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요망한 아가씨가 한 명 앞에 있네.

한세아가 의뢰를 받던 2층을 넘어 3층으로 향하는 발걸음. 귀족 아가씨 이전에 모험가라는 듯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연구실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는 샤를롯과 문밖에서 대기하는 메이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개인적인 용무입니까?”

 “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죠. 제 전속 메이드에게도 들려주지 못할.”

그 말에 반응한 건 작게 한숨을 폭 내쉰 메이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은 검푸른 머리의 메이드가 나를 바라본다. 차가운 시선에 담긴 의미는 약간의 걱정과 호기심처럼 느껴지는데 무슨 일이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메이드의 눈빛을 뒤로 한 채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와 책자가 가득한 책장은 마법사의 연구실보단 귀족가의 서재와 닮은 모양새였다.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를 뒤로 뺀 뒤 털썩 주저앉은 샤를롯이 내게 눈웃음 짓는다.

 “롤랑 경,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았거든요. 저희는 초면이지만, 사실 인연이 없던 건 아니더라고요.”

 “샤를롯 양의 아버지가 제게 찾아온 일 말씀입니까?”

 “아뇨, 그거보다 훨씬 원초적인 관계죠. 제 교양 수업을 담당하시는 분은 수도에서 오신 조에 부인이시거든요.”

내가 알 거라고 단정을 짓듯 말하는 그녀. 발끝으로 의자를 뒤로 살살 밀어내며 나른하게 의자에 눕듯이 기댄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구두를 벗고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리는 게 아닌가? 조에, 조에 부인이라. 왕국의 수도와 조에 부인이라는 여귀족이라면 곧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지.

…모험가 길드의 의뢰 때문에 만난, 가슴이 엄청나게 커다랗던 미망인.

용기에 비해 실력이 부족했던 한 귀족이 소수의 기사를 데리고 몬스터를 토벌하러 간 일이 있었다. 문제는 그 떠돌이 몬스터 사이에 거인종으로 분류된 오우거가 있었다는 점. 최소 고블린, 최대 오크 따위를 상정하고 자신만만하게 출정한 귀족은 기사들과 함께 피떡이 되어 돌아왔다.

그 오우거는 당연히 의뢰를 받은 내 손에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피떡이 되어 정강이부터 골통까지 으스러졌고, 남편을 잃은 부인은 슬픔을 위로해줄 상대로 기사 대신 곧 떠날 모험가를 선택했지.

 “조에 부인이라, 그리운 이름이군요.”

 “이름만 그리우실까요?”

새하얀 스타킹으로 감싼 발끝이 의자 위에서 까닥거린다. 기다란 로브 자락 아래에 숨겨져 있던 건 새하얀 스타킹과 허벅지를 드러내는 짧은 치마. 얇은 다리가 시계추처럼 흔들거릴 때마다 짧은 치마가 사브작사브작 움직이며 그 속을 보여줄 듯 말 듯 움직인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유혹하는 듯한 모양새.

 “조에 부인께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이쯤 되면 자유민으로서 귀족에게 보여야 할 존중 따위는 의미가 없다. 보여줘야 할 것은 유혹하는 여자에게 보여줄 수컷의 면모. 책상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서자 뽀얀 허벅지가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역시나, 남자에게 익숙한 건 아닌 것 같네. 잔망스럽고 요망하긴 하지만 정말 성숙한 여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덜 여문 모양새. 기억 속 조에 부인의 커다란 가슴과 요염한 자태와 비교하자면 장난 좀 잘 치는 여고생에 가깝다.

 “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인 사냥꾼도 아니고 거인 살해자가 된 롤랑 경의 무용담과… 그 대단한 모험가가 침대에서도 참 대단했다는 이야기를.”

 “저런, 요즘 귀족들은 교양 수업으로 그런 이야기도 듣나 봅니다.”

 “정략결혼을 생각한다면 가벼운 성교육은 귀족 아가씨의 소양이죠.”

움찔거리는 허벅지와는 달리 평온을 유지하는 목소리. 조금씩 낮게 깔리며 끈적해지는 샤를롯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를 유혹한다. 다리를 까닥거리며 허벅지를 드러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내면서.

나와의 첫 만남 이후, 아이린과 파티가 된 내가 누군지 궁금했나 보네. 조에 부인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면 그녀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나는 모험가이며 수도가 아닌 모험가의 도시에서 머무르는 남자. 의뢰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방랑벽까지 있는 모험가. 이러한 남자를 가장 좋아하는 건 수도에 머무르는 외로운 귀부인들이었다.

귀족도 기사도 아니면서 명예로운 행보를 걷는 잘생긴 모험가. 입소문으로 듣기에는 잘생긴 외모만큼 정력도 체력도 뛰어난 데다, 귀족이 아닌 만큼 사교계에 추문을 퍼트리지도 않는 불놀이 상대로서.

 “조에 부인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자신의 처녀를 가져간 남편이 첫날 밤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리고 롤랑 경과 보낸 나날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와인에 가볍게 취하셨는지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어떤…?”

 “제가 순결을 잃게 된다면, 그 상대가 롤랑 경인 게 인생에 있어 가장 뜻깊은 경험일 거라고.”

단추가 전부 풀린 셔츠가 봉긋한 가슴에 밀려나 양옆으로 벌려진다. 귀족 아가씨답게 뽀얀 젖가슴과 이를 감싸고 있는 새하얀 브래지어. 하얀 브래지어에 하얀 팬티, 하얀 스타킹인가. 마치 새하얀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는 배덕감이 느껴지는 옷차림이다.

욕망과 호기심으로 범벅이 된 샤를롯이 각오를 다진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듯 바라본다. 고작해야 제 교육 담당인 미망인에게 음담패설을 들은 것 치고는 과감한 시도.

그것은 그녀가 ‘야심가’의 타이틀을 따낸 이유와 같은 맥락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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