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75)

원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3B에 아이와 미녀가 들어있지 않던가. 신전에서 애들을 돌봐주는 미녀는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했다.

칭호가 ‘야심가’인 건 아마 모험가 생활과 신전의 봉사 활동과 연관이 되어 있겠지. 귀족 영애로서 트로피가 아닌 주체적인 여귀족이 되고 싶어 신전의 힘을 빌린다던가. 엔간해서는 귀족 아가씨들은 모험가가 되지 않거든.

모바일 게임에서야 무슨 귀족 아가씨에 공주님에 귀족 나리들도 탑을 오르지만, 이곳은 현실성 넘치도록 만들어진 세상. 저 드넓은 북부를 다스리는 북부 대공이 5★ ‘냉철한’ 북부 대공 캐릭터 따위가 되어 모험에 뛰어들면 서류 업무는 누가 보고 정치는 누가 하겠냐고.

―핑챙아가씨 떴냐

[고아원에서 애들 돌보는 샤를롯.JPG]

[아이린과 함께 미소 짓는 샤를롯.JPG]

내가 알던 핑크가 아닌데?

그냥 세상 착해 보이는 아가씨인데 왜 야심가지?

차라리 음란한 샤를롯이었으면 이해가 가는데

┗저 옷의 어디가 음란한데 변태련아ㅋㅋㅋㅋ

 ┗어차피19금게임이면 있어도 될 듯

┗저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대단하다

 ┗이 새끼들 대단한게 하루 이틀이냐

빨간 머리카락의 캐릭터는 열정적이고, 파란 머리카락의 캐릭터는 냉정하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분홍 머리카락 캐릭터는 야하고 음탕하다는 이미지가 있는지 핑챙이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많이 보이네.

물론 모험가 복장은 물론이요 사복도 프릴 좀 달린 고급스러운 의복일 뿐이지 야한 노출 따윈 하나도 없지만 미쳐 날뛰는 시청자들에게 있어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느 댓글에서도 ‘그냥 이쁘니까’라는 설명이 붙어 있기도 했고.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밑에 있는 게시글.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제재를 먹고 슉슉 사라지는 메이드복 야짤.JPG, 주종 덮밥 망가 추천 글 따위 사이에서 굳건하게 추천 수 1위를 먹은 게시글이었다.

―이 새끼 소설 좀 읽어본거 같은데

[인벤토리를 유품이라 소개하는 김석현.GIF]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철판.JPG]

[뿔이 박혀버린 뿔늑대.GIF]

얘 하는 거 보면 1세대 겜판소 생각남

디그로 구덩이 파고 쉴드로 질식시키는 그런거

┗마법사 아닌 유저는 인벤토리가 유품임?

 ┗게임 한판에 부모님 목숨을 태우네

┗유품 말고 걍 모험에서 얻은 보물로 설정하지

 ┗초보 모험가가 어딜 모험해서 그 귀한 걸 얻냐?

┗오다 주웠다고 해도 믿어주더라 걱정ㄴㄴ

시스템상 대충 이해하고 넘기는 방식인지 모험가였던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인벤토리를 소개한 남자, 김석현. 지난번 손에 쥐는 소형 방패 버클러를 들고 뿔늑대 돌진에 맞서다 뿔에 꿰여 게시판에 올라온 방송인이네.

6★인 나를 만나 10층에서 시작한 한세아가 게임 진행도 1위, 한세아의 방송을 미래시처럼 사용하며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게 저 김석현이라는 남자인 것 같다.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뿔늑대, 그리고 허공에 손을 집어넣은 뒤 내 방패보다 커다란 철판을 꺼내 바리케이드처럼 들고 막아서는 김석현.

뿔늑대의 돌진력을 몸으로 겪어서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방송을 위해 각을 잰 건진 몰라도 보는 맛이 있긴 하네. 허공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꺼내 드는 형식의 인벤토리다 보니 저런 식으로 응용할 수 있구나.

게시판의 내용을 보니 대부분 인벤토리를 무기 격납고처럼 쓰고 있긴 한 모양. 대검이나 망치 따위를 선택한 유저들이 거치적거리는 거대한 무기를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허공 발도 비슷하게 꺼내 든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뿔늑대한테 기습당하는 상황에 무기를 허겁지겁 꺼낸 뒤 게임 오버를 겪고 그날의 아침 해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내용도 덧붙여 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으니 창밖으로 달이 점점 지는 게 보인다. 지금 눈을 감으면 두어 시간은 자고 나갈 수 있겠네. 전생의 육체라면 아침부터 점심까지 계속 졸다 못해 피로에 찌들 테지만, 초인적인 롤랑의 육체는 하루 2시간의 수면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초인적인 육체로 하는 게 새벽 게시판 눈팅이니 할 말이 딱히 없긴 하네.

눈을 감은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귓가에 울리는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극단적으로 적은 수면시간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싸악 달아나는 잠기운.

초인적인 육체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는 엉뚱한 감탄을 하며 씻고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아쉽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씻는 동안 눈에 띄는 게시글은 없었다.

 “아, 오셨어요?”

 “엄청 일찍 나오셨네요.”

 “신전의 아침은 빠르거든요. 기도회를 한 뒤 바로 나왔어요.”

매일 먼저 나와 다른 일행을 기다리는 게 내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아이린이 길드 테이블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스가 말해주길, 길드 문이 열리기도 전에 찾아와서 파티 이적 요청을 했다고 말해줬었지.

파티 이적 요청을 하려고 마음이 급해 일찍 나온 줄 알았더니, 그냥 부지런한 사람이었나.

어제 애들 앞에서 열심히 떠든 보람이 있는지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아이린.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의 봉사 활동으로 신전의 심볼에 이런 미녀의 호감도까지 올랐다면 완전히 남는 장사지.

 “여기서 모인 다음에는 탑에 가나요?”

 “마탑에 가서 그 만월 늑대의 흔적에 대해 들을 겁니다.”

 “아아, 어제 그.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올까요?”

 “나오겠죠, 마법사들인데.”

정확히는, 퀘스트 진행인데.

설마 보스몹 흔적을 찾았는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 사흘 쭈욱 기다리게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린에게 대답해주니 자그마한 머리통이 끄덕거린다. 속으로 뭔가 다짐하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를 보며 잠시 침묵을 즐기고 있으니 길드의 문이 벌컥 열린다.

 “와, 엄청 일찍 나왔네? 안녕하세요 아이린 님?”

 “다 모였으면 마탑에 가죠!”

오늘도 함께 움직였는지 너스레를 떨며 다가오는 그레이스와 그 뒤에 착 붙어 있는 한세아. 확신으로 가득 찬 눈동자로 다짜고짜 마탑에 가자고 하는 걸 보니 퀘스트 진행 창에 변화가 있었나 보다.

아침 해 뜨는 걸 보면서 모이자마자 마탑에 가자는 한세아의 주장. 다른 사람들이라면 조금 어처구니없어하며 길드로 연락이 오는 걸 기다리자고 했겠지. 하지만 한세아를 천재 마녀 취급하는 그레이스와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아이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가 플레이어 겸 방송인이라는 걸 아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분주하게 탑으로 들어가는 모험가들의 흐름에서 벗어나 향하는 마탑지부. 꾀죄죄한 모험가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꾀죄죄한 마법사들 몇 명이 보인다. 아마 부족한 휴일을 만끽하고 아침부터 출근하는 마법사의 제자들이겠지.

 “어째서 만월 늑대의 흔적이 뿔늑대에게서 나타나는 걸까요?”

 “처음 만났을 때, 만월 늑대와 함께 뿔늑대가 무리를 지어서 돌아다녔어요. 원래 뿔늑대는 늑대의 습성을 일부 가지고 있긴 해도 무리를 짓는 몬스터가 아니거든요.”

만월 늑대를 만나보지 못한 아이린의 옆에 착 달라붙어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하는 그레이스. 아이린은 목소리 작고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는 성격이며, 그레이스는 반대로 능글맞고 여유 만만한 사람이다 보니 잘 어울리긴 하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곁눈질로 흘기며 열심히 시청자들과 떠들고 있는 한세아. 시청자들에게 퀘스트 진행 상황을 설명해주는 덕에 나도 한 귀로 엿들으며 상황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이제 마탑에 가서 만월 늑대를 추적하는 퀘스트를 받으면 10층으로 가는 숏컷이 열릴 것 같은데. 음? 롤랑 센세한테 말해서 부동산 투기를 하자고? 야 넌, 좀, 똑똑하긴 하다…. 현실성 넘치는 걸 보면 게이트 옆에 알 박으면 돈 좀 벌려나?”

플레이어가 10층에 도착해 뿔늑대를 사냥하기 시작하면 메인 시나리오의 챕터 1이 열린다. 퀘스트의 내용은 일정 수치 이상의 뿔늑대를 사냥할 것. 챕터 2는 분노한 만월 늑대가 뿔늑대 무리를 데리고 탑 밖으로 뛰쳐나온 걸 해결하는 것.

그 뒤 챕터 3은 10층에서 뿔늑대를 사냥해 무수히 많은 뿔늑대 중 ‘만월 늑대의 권속 뿔늑대’를 사냥해 그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란다. 여기까지가 우리 파티가 진행한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어 시청자들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

 “물론 게이트 위치를 알아야 하겠지만… 내 방송 보고 알박기 성공하는 시청자 있으려나. 근데 10층에서 뿔늑대 잡은 돈으로 건물이랑 땅을 사려면 얼마나 노가다를 뛰려구.”

시청자들과의 잡담을 엿들으며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마탑. 오늘의 접수원은 우리 인상착의를 사전에 전해 들었는지 입장하자마자 먼저 다가온다.

 “마법사 한나 양과 그 일행분들, 맞으십니까?”

 “네, 제가 한나에요.”

지난번처럼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가는 한세아. 물론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퀘스트 진행을 마법사들만의 이야기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테이블에 앉아 만월 늑대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는 두 사람.

평범한 낮의 초원과 달리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 밤의 초원과 만월 늑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했던 은색 늑대의 자태. 이런저런 걸 입담 좋게 설명하는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아이린이 자그마한 입술을 헤 벌리고 빠져든다.

 “어머나, 정말 귀한 경험을 하셨네요.”

 “샤를롯 양?”

그렇게 그레이스의 입담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린의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분홍 머리 아가씨, 샤를롯. 마법사 겸 모험가인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시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검푸른 머리카락의 메이드 마리가 당겨 뺀 의자에 슬쩍 앉아서는 자연스럽게 아이린과 그레이스의 대화에 끼어든다. 애들한테 이야기 들려주는 것도 그렇고 수다스러운 만큼 친화력도 좋은 모양새.

친화력 좋은 두 사람이 모여서 그런지 첫날에는 데면데면하던 그레이스와 샤를롯이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화전민 마을 출신의 자유민과 귀족 아가씨라는 신분의 격차는 사이에 낀 아이린이 완충재가 되어 해소된 것 같네.

 “그런데, 샤를롯 양은 어쩐 일로?”

 “이야기 나누시던 만월 늑대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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