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 사제가 파티에 합류했지만 10층의 수색 현황은 여전했다. 보호막 특화 캐릭터가 단서 찾기 퀘스트에서 도움이 될 리 없었으니까. 그래도 한세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 걸 보니 퀘스트도 순조로운 것 같네.
…아닌가? 그냥 5★ 때문인가?
아무튼, 우리 파티는 뿔늑대를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내가 없이 적당한 전위 하나가 있어도 뿔늑대는 손쉽게 사냥할 수 있을 수준. 그렇게 그레이스의 탐색술 덕분에 뿔늑대를 계속해서 사냥하는 일상.
이쯤 되면 시청자들도 질리지 않나 싶을 때 부산물을 챙기던 한세아가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
“이거! 이거 봐요!”
무슨 국가대표가 금메달 들어 올리듯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그녀. 뿔늑대의 부산물이 바닥을 나뒹굴든 말든 흥분해서 꺅꺅거리는 한세아에게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의아한 시선이 쏠린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눈알도, 가죽도, 뿔과 송곳니와 발톱도 아닌 초원의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한 줌의 은색 털. 눈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뿔늑대가 아니라 만월 늑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반짝거림이었다.
“뿔늑대의 부산물로 만월 늑대의 흔적이 나오다니… 탑은 참 신기한 공간이네.”
“이게 그 만월 늑대의 털인가요? 색이 참 아름답네요.”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은색의 털을 구경하며 감탄사를 흘린다. 짐승의 털이라기보다는 정말 은을 녹여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가느다랗고 반짝이는 털. 만월 늑대의 가죽이 경매장에 오른다면 금화 백 개는 너끈히 받으리라는 말의 신빙성이 오르는 모양새다.
그렇게 두 여자가 만월 늑대의 아름다운 색에 취해있을 때 한세아는 퀘스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지 콧김이 훅훅 나올 정도로 흥분해서는 주먹을 불끈 쥔다.
뿔늑대를 사냥해서 만월 늑대의 흔적을 찾고, 그 흔적을 마탑에 넘기면 만월 늑대를 추적할 수 있게 되는 방식인가. 뭔가 전생에 했던 수렵형 게임이 떠오르는 방식이네. 거대 몬스터의 흔적을 채취해 추적이라….
“그러면, 오늘 사냥은 여기까지 할까.”
“그래! 바로 마탑에 가는 게 좋겠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호응하는 한세아. 파티 리더가 제시한 의견에 딱히 반대할 사람도 없어 다들 수긍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부산물은 대충 인벤토리에 처박았지만, 만월 늑대의 털은 무슨 로또 복권 대하듯 꼭 쥐고 가는 한세아.
은색의 털이 어지간히 아름답게 보였는지, 아니면 지지부진할 뻔했던 퀘스트 아이템을 동료 영입한 당일 곧바로 얻게 되어 기쁜지 주먹에 힘이 실린 게 보인다. 그렇게 산적을 만났을 때처럼 해가 지기도 전에 초원을 벗어나 도착한 마탑.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
“응, 나 혼자 올라가면 될 것 같아. 여관에서 이야기 나눈 마법사들이 있으니까.”
마탑을 신기한 듯 구경하는 아이린과 그 옆에 착 달라붙어 이것저것 알려주는 그레이스를 두고 한세아가 홀로 2층으로 향한다. 지난번 뿔늑대 소동 때 여관에 방문한 마법사들에게 명함 비슷한 거라도 받았는지 뭘 내미니 곧바로 안내받으며.
그 모습을 보고 테이블에 편히 앉아 늘어져 있으니 그레이스가 특유의 친화력과 능글맞음을 과시하며 아이린의 팔짱을 끼고 마탑 지부의 로비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술 마시고 들이박은 것도 그렇고, 은근히 행동력이 넘친단 말이지.
“어머, 아이린 님?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안녕하세요, 샤를롯 양.”
채팅창을 통해 한세아가 뭘 하는지 알아볼까 하려는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 늘어진 고개를 바로 세워 아이린 쪽을 바라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잘 관리된 분홍 머리카락, 돈 좀 쓴 것 같은 옷차림, 짐가방을 들고 따라 들어오는 시종들.
지난번 11층에서 만났던 아이린 파티의 마법사.
보석이 박혀 있는 머리 장식부터 리본과 프릴로 장식된 간편한 드레스 차림까지. 모험가 장비를 입고 탑에 있을 땐 몰랐는데, 여기서 보니 딱 봐도 ‘나 귀족 아가씨예요’ 라는 걸 온몸으로 주장하는 여자다.
“파티를 이적한다고 하셔서 아쉬웠는데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모험 때문에 방문하셨나요?”
“네. 운 좋게 만월 늑대의 흔적을 발견했거든요.”
“어머머! 실력이 대단한 파티원 분들이시네요. 고행을 위해 탑을 오르신다고 하셨으니 정말 좋은 선택이었군요.”
자세히 보니 뒤에 짐 들고 있는 시종들 사이에 메이드가 하나 섞여 있는데, 파티의 도적이었던 여자다. 메이드 도적에 귀족 아가씨 마법사라니 여러모로 대단한 조합이네. 엘리스의 말에 따르면 탱커는 24층에서 내려온 사람이라 했던가.
귀족 아가씨가 마법사로서의 성취를 위해 돈으로 노련한 탱커를 고용하고, 자신의 하녀와 함께 탑에 들어왔나.
아주 희소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귀족 나리들이 제 체면과 명예를 위해 내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듯이, 귀족 집안 자제들도 탑의 아래쪽에서는 깔짝거리며 활동하는 때도 있거든. 여우 사냥이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
“그럼 이분이 롤랑 경이시군요?”
“네. 지난번 뿔늑대로부터 도시를 구하시고 사람들의 피해를 외면하지 않으신 분이죠.”
아무래도 길드를 통해 내 이름으로 배상금을 쫘악 돌린 게 귀족들을 넘어 신전에까지 퍼졌나 보다. 귀가 간지럽다 못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코앞에서 내 칭찬을 소곤소곤하는 두 여자. 그레이스도 뭔가 내 칭찬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차마 초면의 귀족 아가씨에게는 달라붙지 못하는 모양새다.
대놓고 하는 칭찬을 듣고 있으니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다가온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시종이 당겨주는 의자에 살풋 앉는 그녀. 그 뒤로 자연스럽게 메이드복을 입은 도적이 자리 잡는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재능은 부족해 보이는 게 딱 1★~2★ 정도겠네. 그런 내 시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귀족 아가씨가 입을 연다.
“제 이름은 샤를롯 캐번디시랍니다. 제 아버지이신 캐번디시 자작님께서 평소 롤랑 경의 모험담을 흠모하셔서 이번에 만나 뵈었다고 들었어요.”
기사도 아닌 모험가에게 ‘경’의 칭호를 붙여주는 귀족이라. 그때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한 꼬부랑 수염 아저씨였던가. 비단 주머니는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놔뒀고, 금화 여섯 개는 감사히 받아서 엘리스에게 케이크 사 줄 때 썼지.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있다고, 자기 이름도 소개하지 않고 공치사만 하다 금화를 쥐여주고 사라졌던 남자. 대충 기억을 더듬고 있으니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기 시작한다.
“마법사로서의 성취를 위해 모험가가 되었는데 이런 유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었네요. 이 모든 게 여신님께서 안배해두신 운명처럼 느껴져요.”
“여신님께선 모두를 보듬어 주시니까요.”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 능글맞은 그레이스도 조금 당황한 모양새. 그레이스는 없는 사람 취급이고 나는 말 들어주는 허수아비 취급이니 대단하다고 느껴지네. 사교회 같은 게 있다면 세 치 혀로 귀족 영애들을 휘어잡을 것 같은 수다력.
말끝마다 여신이니 운명이니 하는 걸 보니 마법사답게 신비주의 같은 것에 취한 모양새다. 오만한 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자아도취의 모양새라 해야 할까.
하기야 딱 봐도 소녀티를 벗지 못한 모양새인데 어쩔 수 없겠지. 전생에는 초능력 따위가 없어도 중2병인 연놈들이 넘쳐났는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귀족 아가씨의 중2병을 누가 막겠는가. 푸른 피로 태어나 시종들의 보살핌 속에서 마법과 권력을 휘두르는 삶.
“아가씨, 더 시간을 지체하신다면 이후 일정에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어머, 고마워 마리.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선약이 있어 실례할게요."
우연히 만난 여사제가 우연히 만난 모험가의 파티로 이적을 했는데, 그 모험가가 도시를 구한 모험가고 자신의 아버지와 연이 있다― 라는 내용을 귀족식으로 수 십 배 뻥튀기해서 수다를 떨던 샤를롯.
그녀의 끝 없는 수다를 끊어준 건 조용히 등 뒤에 서 있던 메이드였다. 제 아버지가 돈주머니를 주고 히죽 웃으며 사라졌던 것처럼, 수다를 떨다 말고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말아쥐며 무릎을 살짝 굽히는 그녀.
시종들을 이끌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린다.
"…귀족이라서 말이 많은 걸까, 마법사라서 말이 많은 걸까?"
"원래 둘 다 말이 많은 족속들이긴 해."
"저어, 아무리 그래도 흉을 보는 건…."
"아뇨, 흉보는 건 아니고 신기해서요."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퀘스트를 진행하고 내려온 한세아가 마주한 것은, 묘하게 지쳐있는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그, 무슨 일 있었어요?”
“이전 파티에서 알게 된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눴어요.”
“혹시 원망한다던가….”
“아뇨, 그냥 조금 수다스러우신 분 이여서.”
아이린의 설명에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 6★ 탱커에게 정신적 데미지를 줄 정도로 수다스러운 귀족 영애는 직접 만나보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겠지. 묘한 표정으로 나와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한세아가 테이블에 앉아 설명을 시작한다.
“만월 늑대의 흔적에서 마력을 추출하기 시작했대.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달라붙어서 추출한 마력을 추적하는 마도구를 만들어 준다고 하네. 아마 랜턴처럼 만월 늑대를 추적하는 나침반 같은 걸 만들어 줄 것 같아.”
“10층에 있는 건 확실하고?”
내 질문에 눈동자가 슬쩍 돌아가는 그녀.
“아무래도 우리가 봤던 그 밤의 초원이 10층 어딘가에 마법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 같아. 그 비밀 공간의 문을 열려면 만월 늑대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거지.”
딱 보니 이건 퀘스트 창에 나온 내용이구나. 이제 마력 추출을 시작했는데 숨겨진 공간에 대한 걸 어떻게 확신하겠어. 그래도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밝혀냈구나~ 하고 넘기는 모양새. 딱히 딴지 걸 이유가 없긴 하지.
기대감에 들뜬 한세아의 모습이 퍽 귀여웠는지 그레이스가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낀다. 언제 저렇게까지 친해진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네.
“만월 늑대가 그렇게 다시 보고 싶었어?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하네.”
“그야, 음, 신기하니까 그렇지. 마법사로서 얼마나 궁금한데.”
“그러면 오늘은 이대로 해산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