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75)

노련한 탱커에 길잡이와 마법사까지 갖출 건 전부 갖춘 파티가 이미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사제들은 돈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탑을 오르는 사람들. 뭔가를 미끼로 인재를 빼 오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머쓱한 분위기 속에서 데면데면하게 서로 묵례만 나누고 그대로 헤어졌지. 아니,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저, 롤랑? 신전에서 파티 가입 요청이 하나 왔어요.”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모험가 생활을 하고 있던 여사제님이 파티 이적 요청을 했거든요.”

아침의 모험가 길드에서 엘리스가 우리 파티의 테이블에 오더니 요상한 소식을 하나 전해준다.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은 갑자기 생겨난 탑을 불경한 공간이라 생각한다. 그 때문에 탑 안에서 다치고 죽는 모험가를 위해 나서는 걸 고행이라 생각하고.

이 뜻은 한 번 파티를 정한 사제는 파티를 옮기는 일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고행길을 걷던 사제가 ‘아, 이쪽 길이 아닌 것 같아’라면서 갑자기 방향을 트는 일이 없듯이. 부와 명예가 아닌 모험가들을 위해 고행을 자처하는 사제들이니까.

 “그 파티에 문제가 있어서 해체된 건가?”

 “그것도 아니에요. 24층에서 내려온 베테랑 탱커가 이끄는 파티거든요.”

모험가 길드 접수원으로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듯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엘리스. 그렇게 여사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곧바로 시작되는 세 여자의 수다.

 “엘리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너희 파티에 합류를 원하는 여사제님이 계셔.”

어제 일찍 헤어진 자유 시간 동안 재주도 좋게 엘리스를 꾀었는지 그레이스에 이어 엘리스 또한 한세아의 언니가 되어 있는 상황. 한 걸음 물러서 세 여자가 왁자지껄 떠드는 걸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엘리스의 설명이 시작된다.

신전에서 나온 사제들이 왜 탑을 오르는지, 모험가 길드가 어째서 사제만큼은 눈에 불을 켜고 파티를 알선하는지.

 “교리상 탑은 여신이 만들지 않은 불경한 공간이야. 문제는 여신의 눈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사제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지.”

 “헤에, 그렇구나.”

왕국 귀퉁이에 있는 산적 놈들도 여신 무서운 건 알아서 사제는 어지간해서 죽이지 않는다. 돈이 될 법한 은으로 만든 신전 물품을 털어가긴 해도 정말 막장 인생이 아닌 이상 사제는 곱게 돌려보내거든.

미신을 믿는 것도 있지만, 사제가 산적에게 당하면 눈이 뒤집힌 이단 심문관과 성기사들이 그 동네를 아예 뒤집어 엎어버릴 가능성도 있으므로.

하지만 탑은 다르다. 여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살인강도를 부업으로 삼은 모험가들은 모험가와 사제를 구분하지 않거든. 증거는 탑 내부에서 사라질 테니 성기사단의 추격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그럼 그 여사제님 파티에 문제가 있나?”

 “없으니까 이상한 거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그냥 그 사제님이랑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요?”

그레이스와 한세아도 엘리스의 설명을 듣고 대충 상황 돌아가는 걸 이해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리스의 말대로 이건 여사제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 백날 추리해봐야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좋겠지.

 “와 계셔?”

 “그럼. 길드 문 열기 전부터 서 계셨더라고. 역시 사제님이라 그런지 엄청 부지런하셔.”

고개를 끄덕거린 엘리스가 한세아와 그레이스에게 눈웃음을 쳐준 뒤 테이블에서 일어난다. 예쁘고 멋진 걸 좋아해서 접수원이 된 여자다 보니 외모가 받쳐주는 두 사람과 순식간에 친해진 모양새.

그렇게 2층에 있을 응접실로 향한 엘리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인과 함께 내려온다. 아무래도 사제님이다 보니 1층 테이블에서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

엘리스와 함께 나무 계단을 밟으며 다가오는 여자는 역시나 어제 11층의 숲에서 봤던 여사제였다. 몸매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는 펑퍼짐하면서도 정갈한 수녀복,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제대로 눌러 쓴 두건. 그리고 그 두건 아래에 있는 작고 뽀얀 얼굴. 금색 눈썹에 연한 파란색 눈동자 때문인지 아름답지만, 인상이 조금 흐릿하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롤랑 님, 맞으시죠?”

그 범상치 않은 외모에 놀란 것인지 인사도 절면서 황급히 눈동자를 굴리는 한세아. 하지만 목소리가 거의 속닥거리는 수준인 여사제는 한세아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하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한세아의 격양된 목소리에 지금 그딴 걸 따질 상황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오, 오, 오성 힐러 떴다!”

4★도 아니고 5★이라는 말이 한세아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까.

 “저기, 괜찮으세요?”

 “아, 아학, 네. 다리에 쥐가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의자에서 엉덩이로 펄쩍 뛴 한세아를 보며 여사제가 걱정스럽게 속닥거린다. 시청자와의 대화는 듣지 못해도 행동 자체를 필터링 해주는 건 아닌지 인사를 건네자마자 펄쩍펄쩍 뛰는 한세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여사제.

흥분한 카메라가 사제의 앞에 착 달라붙는 타이밍을 노려 슬쩍 채팅창을 흘겨보았다. 물론 여사제의 시선이 계속 내게 집중되어 있으니 대놓고 쓱쓱 넘기며 읽을 순 없었고 정말 잠깐 훔쳐보는 식.

아니나 다를까 폭포수처럼 흐르는 채팅은 난리가 나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시력이 아니었으면 차마 읽지도 못했을 정도로 미쳐 날뛰는 채팅창.

나야 말할 것도 없고, 3★그레이스야 전투 인원보다는 길잡이에 가깝다지만 평균보다는 높은 성급이다. 거기에 5★ 힐러가 들어온다면 파티의 조합은 남이 보기에 역겨울 수준으로 강해질 수밖에.

 “그, 어떤 이유로 저희 파티를 찾아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롤랑 님의 파티가 아닌가요?”

 “파티의 리더는 한나 양입니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사제. 그녀의 시선이 드디어 내게서 떨어져 한세아에게 향한다. 나를 찾아 왔지만, 파티에 가입하려면 파티의 리더인 한세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은 있나 보네.

그나저나 11층에서 얼굴 한 번 보고 말았으면서 왜 나를 찾아왔을까.

드론 카메라가 바쁘게 여사제의 앞에서 날아다니고, 한세아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동자를 카멜레온처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영입 시도 대화를 하는 동시에 스탯창과 스킬창 따위를 읽고 있나 본데.

채팅창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게시판으로 향했다. 사람이 워낙 늘어난 상황이라 생방송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정리해 게시판에 올리는 놈들이 몇 있었거든.

 “롤랑 님을 찾아오셨다는 건 저희 파티에 합류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이미 몸담고 계신 파티에서 문제가 있다던가.”

 “아뇨, 파티원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다들 참 친절하셨죠.”

속닥거리는 여사제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서인지 점점 몸이 앞으로 쏠리는 한세아. 그런 한세아의 격한 반응을 보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그레이스가 내 쪽을 슬쩍 바라보지만 나도 한세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5★ ‘예비 성녀’ 아이린.

몽크나 성전사가 아닌 순수한 지원 계통인지 체력보다 마력이 월등하게 높은 여사제.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5★답게 우월한 스탯창이 아니다. 그녀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네 글자의 타이틀이 더 중요하지.

 ‘예비, 성녀라고?’

이 세상의 신전은 교황이 통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도시에 신전을 설립하고 추기경과 사제를 파견하는, 기독교를 베이스로 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게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기독교를 재료 삼아 캐릭터들을 디자인 했거든.

몸매가 다 드러나는 수녀복에 가터벨트를 입은 여사제라던가, 가슴골 까고 그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매단 성기사라던가. 

아무튼, 그런 신전이다 보니 예비 성녀라는 건 생각보다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모험가 도시의 신전을 관리하는 추기경 바로 아래 정도가 아닐까? 예비 성녀라서 잘 모르겠지만, 성녀가 된다면 도시의 귀족들도 대가리를 박아야 하는 게 그녀의 위치.

…물론 나는 그녀를 처음 본다.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히로인즈 크로니클에서도 본 적 없는 여캐. 5★예비 성녀 캐릭터 같은 게 있었으면 당연히 기억하지.

 “사제님은 어째서 탑에 오르시나요?”

 “그곳에 여신님의 뜻이 있으니까요.”

 “여신님의 뜻이요?”

게시판을 꺼버리고 대화에 집중하자 우아한 손놀림으로 목걸이에 매달려 있는 여신의 증표를 살며시 쥐어 든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도 없는데 증표의 중앙에는 십자가가 떡하니 박혀 있는게 어처구니 없네.

뚱카롱에 프라이드 치킨도 그렇고 진짜 근본 없는 세상이야. 가상 현실 게임인데 십자가를 막 써도 되나? 아랍권에서는 가상 현실 게임도 금지하는 거 아니려나―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증표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아이린이 말을 이어나간다.

 “저는, 다른 자매님들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뭐라는 거야, 5★의 어디가 부족한데.’

아마 한세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히어로즈 크로니클이 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밸런스 패치라고 봐야 하겠지.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3★ 그레이스다.

히로인즈 크로니클에서의 3★은 예쁜 토템, 창고지기, SD 감상용 등으로 불리는 스펙을 지니고 있었다. 전투력이 필요한 실전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의 처참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히어로즈 크로니클의 그레이스는 당장 숲에서도 통할 수준의 탐색술을 가지고 있으며 성장한다면 탑의 상층부도 노려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초보 모험가들을 도륙 내는 뿔늑대에게 단 한 번도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

 “제 성법은 다른 자매님들에 비해… 조금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마치 제 치부를 드러낸다는 듯 뺨을 살짝 붉힌 아이린이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속삭인다. 사제의 성법은 평균적인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복, 정화, 보호막, 다양한 버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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