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75)

길드는 영주가 없는 자유 도시에서 상인이나 장인 따위가 이익을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요컨대 모험가 길드는 모험가들끼리 이익을 위해 뭉친 모양새라는 뜻. 그러다 보니 길드는 한 명의 사람이 독재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모양새가 아니다.

도시의 권력이 길드들, 신전, 귀족들에게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게 모험가 길드 또한 길드장을 비롯해 다양하게 분산된 상황.

 “그중 한 명이 엘리스야. 외모로 뽑힌 접수원들이 교육을 받고 다른 업무 지원을 나가는 경우가 많거든. 그런 접수원 중 가장 연차가 높으니까 길드에서의 권한이 꽤 많지.”

대장장이 등 장인 길드의 경영자들은 대규모 사업장을 지닌 마스터들이라면, 모험가 길드의 경영진은 은퇴한 유명 모험가나 회계사, 그리고 접수원들의 왕언니 엘리스로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다.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다 보니 내부에서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거든.

 “친해지면 득을 많이 볼 거야. 걔는 좀… 예쁜 사람을 과하게 챙겨주니까.”

접수원들은 전부 미녀다, 그리고 엘리스는 미녀에게 엄청 친절하지. 그 친절함이 길드의 영향력으로 뻗어 나가게 되었으니 처세술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설명을 들은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두 사람이 가진 엘리스의 이미지는, 질척하게 달라붙으며 접수원 될 생각이 없냐고 묻는 영업직 아줌마에 가까울 테니까.

별거 없는 경비대 구경을 마치고, 디저트를 배달한 뒤 저녁을 먹기도 전에 해산된 파티. 그레이스는 두둑해진 지갑을 믿고 쇼핑을 하러 가는 것 같았고, 한세아는 실망한 시청자를 달래줄 겸 미니맵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도시를 돌아다니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한세아가 선택한 스킬을 확인해 보기 위해 내 전용 장비를 챙겨 들고 다시 탑으로 뛰었다.

파티원들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던 것과 달리 땅을 박차고 초원을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어준다. 땅이 박살 나지 않을 정도로 달리면 내 속도가 말이랑 비슷했던가. 그렇게 초원을 지나 아직 한세아와 그레이스는 와 보지 않은 11층의 숲을 돌파한다.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를 분쇄하며 랜턴의 조각을 보며 직진. 숲에서 등장하는 건 투구사슴과 이끼늑대 같은 짐승형 몬스터가 대부분이라 방패술을 연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따라서 노리는 건 11층부터 등장하는 고블린과 코볼트의 부락.

10층에 있는 고블린은 늙고 쇠약해서 추방되었다는 설정인지 한 놈씩 등장하지만, 11층의 숲부터는 놈들이 무리를 지어 등장한다. 거기에 곤봉과 나무 방패, 독침과 돌팔매 등으로 무장했으니 방패술을 실험하기에 딱 좋지.

내 스탯을 생각한다면 20층 위로 올라가서 더 강한 몬스터와 싸워야 하지만 거기까지 올라가기는 너무 귀찮다.

 ‘반사뎀, 확실히 강하네.’

털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이끼를 이용해 숲에 은신해 있는 이끼늑대. 그리고 어지간한 나무 창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뿔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투구사슴. 두 몬스터 모두 내게 달려들다 반사 데미지에 장렬하게 사망한다.

발걸음을 멈춰 마석을 줍기도 귀찮아 그대로 고블린과 코볼트 부락을 찾아 달린다. 내버려 두면 운 좋은 모험가가 주워가겠지, 뭐.

그렇게 탐색 기술도 없이 육체를 마력으로 강화해 예민한 청각을 믿고 숲을 싸돌아다니다 보니 귓가에 케렉케륵 거리는 소리가 살짝 들려온다. 코볼트는 아닌 것 같고 고블린인가. 원거리 공격은 고블린이 더 많이 하니 마침 잘됐네.

케륵, 케악!

키르르르륵-

지들끼리 뭔가 의견을 교환하는지 그르렁거리고 있는 고블린 놈들. 10층 아래에서 보던 고블린보다 10cm 정도는 커다랗고 피부도 좀 더 탱탱해 보인다. 그래 봐야 고블린이긴 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건 나뭇가지로 만든 움막들이 가득한 고블린 거주지.

 “야아― 여길 봐라!”

시끄럽게 떠드는 고블린들을 무시한 채 움막 몇 개를 걷어차 부수고 방패를 철퇴 손잡이로 땅땅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혼자 나타나서는 제 집을 부수니 화가 잔뜩 났는지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녹색 땅딸보들.

케야아아악!

케륵, 케르륵!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은지 일사불란하게 나를 포위하고선 원거리 무기를 준비하는 놈들. 다짜고짜 달려드는 놈이 있을 법한데 움막을 부순 것만으로 좀 겁을 먹었나 보다. 그렇게 케켁 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돌팔매와 독침들.

갑옷에는 흠집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맥없이 떨어지는 공격을 맞으며 나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물론 곧바로 스킬이 발동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육체를 강화하듯 방패에 마력을 밀어 넣었지만 어지럽게 날아든 돌멩이와 독침을 막아낼 뿐 반격 따위는 없네. 이러면 남은 건 딱 하나인데….

 “씨발, …방패술의 달인.”

한세아가 마법 주문을 외우듯 나 또한 입 밖으로 스킬명을 외쳤다. 고블린밖에 없는 숲이지만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이렇게 입 밖으로 스킬명을 외치다 보면 현실을 부정하고 로그아웃이니 스탯창이니를 외치던 흑역사가 떠오르니까.

물론 그 잠깐의 쪽팔림이 효과가 있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번쩍거리며 광이 나는 내 방패. 10년을 함께 한 커다란 네모 방패가 처음으로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이 뇌리에 때려 박듯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자세. 그레이스가 인벤토리를 보고 자연스럽게 마법이라고 생각할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무의식적으로 고블린 따위에게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내밀며 완전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케, 케야악?!

그와 동시에 혼비백산해서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고블린들. 무너진 움막 아래에 숲에서 채취한 나무 열매 따위가 보이는데 식량과 거주지에 대한 미련도 없이 도망친다.

그야 방패에 튕겨나간 독침이 제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니 그럴 수밖에. 갑옷의 등판을 두드린 공격은 반사되지 않았지만, 방패의 앞부분을 두드린 돌멩이와 독침은 제 주인에게 되돌아가 깔끔하게 목숨을 거둬들였다.

……이거 설마, 반격 판정에 패시브가 묻나?

고정 데미지를 되돌려주는 패시브 「불굴의 기사」와 약 10초간 모든 공격을 되돌려주는 「방패술의 달인」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시너지가 있는 것 같은데. 10초라는 시간은 짧은 것 같지만, 마력을 사용하는 초인에게는 한없이 기나긴 시간이기도 하고.

저층에서 고블린과 뿔늑대 따위를 상대하며 노력 없이 강해지니 기쁨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몸으로 배운 방패술과 달리 내 철퇴 휘두르는 기술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막말로 43층의 모험가들과 친선대련을 시작한다면 100% 무승부가 확정된 수준. 상대방은 나를 못 뚫고, 나는 철퇴로 상대방을 한 대도 못 맞출 수준이니까.

그냥 도끼로 장작 패듯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수준이거든.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무식하리만치 강대하지만 몸놀림이 빠른 모험가라면, 그것도 나처럼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모험가라면 눈 감고도 피할 수준.

하지만 이 방패술의 달인이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철퇴에 맞지 않고 도망 다니는 귀찮은 적들. 특히 탑 밖의 의뢰에서 만나는 비행형 몬스터나 생전의 검술을 기억하고 있는 데스나이트 같은 귀찮은 놈들을 상대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한세아가 복덩이네, 진짜. 게임 실력도 괜찮은데 패시브 시너지를 보면 운도 좋고.’

패시브로 받는 피해를 절반 감소시키고, 마력으로 강화한 방패로 반격하며, 6★ 몸뚱이와 같이 넘어온 갑옷으로 피해를 또 감소시키고, 그 피해조차 마력으로 강화한 육체가 다시 한번 받아낸다.

턴제 게임처럼 스킬을 사용하면 반드시 데미지를 입는 게 아닌 현실성 넘치는 가상 현실 게임이라서 가능한 4중 데미지 완충 쿠션. 이 정도면 거인의 일격도 흘려내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쪽이야. 수상한 소리가 나고 있어.”

 “고블린 놈들이 난리가 난 걸 보니 뭐라도 있나 보군.”

그렇게 한참 숲의 몬스터를 상태로 방패를 들이밀며 반사뎀으로 편안하게 학살에 가까운 사냥을 하길 잠시.

 “흔적이 크다. 소형종은 아닌 것 같아.”

하도 소란스럽게 움직여서 그런지 수풀 너머에서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척을 숨기지 않고 나뭇가지를 박살 내며 달렸으며 움막을 부수고 방패를 깡깡 두드린 데다 고블린의 어그로를 끌려고 고함까지 질렀다.

감각이 예민한 탐색꾼이라면 소리를 듣고 찾아올 법하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긴장한 여인의 목소리. 추적 능력에 비해 은신 능력은 형편없는지 침 꼴깍 삼키는 소리와 자기들끼리 작게 속닥이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난장을 피운 나를 만월 늑대 때문에 벌어진 이상 현상이라 생각하고 조사하려 드나 본데.

 “흐읍, ……음?”

물론 그 착각은 고작해야 몇 초 만에 풀리게 된다.

 “모험가, 십니까.”

 “그래.”

뿔늑대가 아래로 내려왔듯 위에 있어야 할 몬스터가 아래층에서 깽판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긴장한 채 방패를 들고 수풀에서 뛰쳐나온 남성.

물론 남성을 맞이한 건 9층 아래로 내려온 20층의 보스 몬스터 오크 사냥꾼 따위가 아니라 전신을 중갑으로 완전히 무장한 내 모습이다. 그제야 소란의 원인이 다른 모험가라는 점을 깨닫고 팔에서 힘이 풀리는 이름 모르는 탱커.

꽤 커다란 카이트 쉴드가 아래로 슬쩍 내려갈 즈음 전투태세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파티의 후열들도 슬그머니 다가온다.

카이트 쉴드와 한 손 도끼를 사용하는 탱커, 나무 위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 도적, 지팡이로 잔가지를 휘적휘적 걷어내는 마법사와 그 뒤를 따라오는 새하얀 수녀복의 여인까지. 아저씨 하나에 여자 셋이라, 조금 신기한 조합이네.

 “그, 저 뒤에 있는 고블린 부락도 그쪽이 부순 겁니까.”

 “맞아.”

내 말을 듣고 당황하는 세 여자. 탱커인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지만 세 여자는 웅성거리는 꼴을 보니 대충 나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노련한 중층 모험가 탱커가 경험 부족한 세 명을 데리고 다니는 거지.

20층에서 등장하는 숲의 보스, 아니… 만월 늑대 같은 놈이 진짜 보스면 20층에서 등장하는 건 네임드 몹 정도라고 해야겠네. 좀 더 강하긴 해도 여러 마리가 등장하니까. 아무튼, 20층에 있을 오크 사냥꾼은 조용한 암살자에 가깝다.

이끼늑대 가죽을 이용한 숲에서의 매복, 오크 특유의 근력으로 날리는 강력한 화살, 사냥꾼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다양한 함정까지.

 “내가 말했지. 오크 사냥꾼은 절대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알겠어요, 아저씨.”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놔 둔 채 자기들끼리 또 속닥거리기 시작한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뚝뚝해 보이는데 어째 입을 열면 여관 아줌마처럼 잔소리하는 중년의 탱커. 도적과 마법사는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지만 한 명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숲에서도 때 타지 않은 새하얀 수녀복의 여인. 게임식 복장이 아니라 고증을 살린 복장인지 몸매도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수녀복. 거기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제대로 쓴 두건까지.

가릴 건 전부 가렸지만 두건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심상치가 않다.

선입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얼굴만 보면 최소 4★ 같은데.

스킬을 연습하러 간 11층의 숲에서 아름다운 여사제를 만났다 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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