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75)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한세아가 알아서 퀘스트를 진행하면, 다시 등장할 우두머리 뿔늑대의 머리통에 철퇴를 박아버리는 게 나의 할 일. 미래를 계획하고 치밀한 설계를 하는 건 나와 맞지 않는다.

난 살면서 여름방학 시간표도 지켜본 날이 없다고.

 “그 만월 늑대는 이 유인향이 안 통하는 것 같아요.”

 “만월 늑대?”

 “아, 그, 마탑에서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마탑이 아니라 시스템이겠지. 여전히 연기력 하나는 빵점인 한세아가 슬금슬금 그레이스에게 다가간다. 그레이스가 나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발걸음을 조금 늦춘 상태라 나란히 걷다 말고 옹기종기 모여버린 모양새.

 “근데 언니, 롤랑 님이랑 말 놓은 거야?”

 “응, 어제 네가 마법사님들이랑 말할 때 슬쩍 말했지.”

 “아….”

작게 속닥거리지만, 거리가 가까운 만큼 다 들린다. 대화를 나누다 말고 내 쪽을 슬금슬금 바라보는 게 딱 봐도 나와 말을 놓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시선. 물론 여자의 마음을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건 아니고―

-걍 가서 말 놓자고 들이박으면 되는 거 아님?

-ㅋㅋ 돈 때문에 센세한테 반말한다고?

-우리는지금실시간교권추락의현장을보고있다

-응 안돼 돌아가 평생 존댓말이야 모시고 살아

-어딜 초보 모험가 따까리가 상급 모험가한테 말을 놔?

개인 방송으로 성공한 여자답게 미션에 좀 미쳐 있는 모양새니까.

그레이스가 눈웃음치는 모습이나, 여관 문밖에서 나란히 서 있던 모습도 봐서 그런지 은근히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미션을 받은 한세아가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사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도 놔.”

 “그, 아, 네? 네!”

 “파티의 리더가 일행한테 말을 높이는 것도 우습잖냐.”

 “그것도 그렇네, 요…오.”

 “바로 놓긴 또 힘든가.”

자기가 말을 꺼낸 게 아니라, 내가 자연스럽게 허락하자 기분이 좋은지 눈이 샐쭉거리며 고운 눈웃음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 눈웃음을 만들어내는 건 손쉽게 성공한 미션 덕분이기도 할 테고.

그렇게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리를 좁혀 모인 김에 간단하게 배를 채우자는 느낌이었거든. 몇 번을 봐도 신기한지 인벤토리에서 돗자리를 꺼내 드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레이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저런 게 있으면 사냥할 때도 엄청 편하겠다.”

 “사냥할 때요?”

 “신선도가 유지되면 사냥감 잡고 나서 엄청 편할 것 같거든. 탑 내부 말고, 탑 밖에서.”

사냥이라는 말에 탑 내부밖에 못 떠올리는 한세아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그레이스. 대화를 나눌수록 세상 물정 모르는 천재 마녀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다 못해 견고하게 구축되는 걸 보며 따끈한 스튜를 떠먹었다.

마리앙 아주머니의 여관에 뿔늑대가 나타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다른 초보 모험가용 여관 음식은 매 끼니 먹느니 은화를 내고 요리를 사 오고 싶을 수준이니까. 든든한 국밥 같은 스튜를 빠르게 비워나가는 중 귓가에 들려오는 비명.

――아아악!

워낙 작게 들린 소리라 헷갈렸지만, 감각이 예민한 그레이스 또한 스튜 그릇을 놓고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초인적인 육체와 예민한 탐색꾼 사이에 껴 있는 한세아만 어리둥절한 채 우리를 보며 묻는다.

 “어, 무슨 일인데?”

 “…비명, 맞죠?”

아직 반말이 익숙하지 않은지 머뭇거리는 목소리. 긴가민가하며 고민하는 그레이스에게 설명을 맡기고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스튜 냄비가 있어 첫걸음은 부드럽게 뛰어오른 뒤 거리를 두고 나서 초원의 지면을 박살 내는 도약.

 “찾아올 수 있지!”

 “네!”

등 뒤에서 모깃소리처럼 그레이스의 확답이 들려와 마음 놓고 비명을 향해 달려나간다. 특이 개체가 등장한 초원에서 들려오는 비명. 뿔늑대를 잡으러 왔다가 봉변을 당한 초보 모험가일 가능성은 작다. 그러니까―

 “로, 롤랑?!”

 “강도네?”

만월 늑대가 아니라 넘쳐나는 동업자 등쳐먹으려는 강도일 가능성도 있구나.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10층에만 사람이 모여서 생긴 일. 초원의 흙바닥을 박살 내며 돌진해온 내게 무기를 겨눈 건 들창코가 인상적인 못생긴 남자.

전위만 네 명인 파티인지 갑옷을 입은 남자 넷이 두 여자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여자 둘이서 뿔늑대를 잡으러 온 건 아닌지 한 놈의 철퇴에 피가 잔뜩 묻어있고 높은 수풀에 발만 비죽 튀어나와 있는 상황.

남자 하나, 여자 둘인 초보 모험가 파티가 중급 모험가 사인방에게 걸렸구나.

 “하 씨, 김빠지게.”

 “도, 도와주세요!”

바닥에 깔려 흙먼지 범벅이 된 여자 하나가 울먹거리며 내게 손을 뻗는다. 한 방울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자 눈물 자국을 따라 보이는 뽀얀 뺨. 셋이서 10층에 온 걸 보니 한 2★쯤 되는 여자 모험가인가.

시골 촌년들과는 다른 미모를 지닌 가챠 캐릭터 모험가들. 시커먼 남정네 파티가 욕망을 못 이기고 덮친 모양새다.

 “이봐, 핑곗거리라도 있나?”

 “주, 죽어어어엇―!”

내가 누군지 아는 듯 사색이 되어 칼을 들고 달려드는 한 놈. 나머지 셋은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다. 초원의 흙바닥을 박살 내며 달려들었으니 그 위압감에 넋을 놓은 것 같은 모양새네.

내가 아무리 친절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한다 해도 강간범을 곱게 잡아서 경비대에 넘길 정도로 착한 놈은 아니다. 놈들도 그걸 아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패닉 상태.

그래도 중급 모험가인지 자세는 잡혀 있는 찌르기. 자연스럽게 갑옷 이음새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모양새가 몬스터보다 사람을 많이 잡아 본 것 같다. 가볍게 차려입은 경장갑의 틈을 뚫고 정확하게 겨드랑이를 찌르는 검.

 “이야, 시발. 오크 잡다 왔냐 너네? 한두 번 담가본 실력이 아닌데.”

 “어, 어어―?”

피부를 찌른 검이 마치 압착기로 누른 것처럼 금이 가고 바스러진다. 검 끝에서 검날이, 검의 손잡이와 그걸 잡고 있던 남자의 손까지. 으드득하고 듣기 거북한 뼛소리와 함께 팔꿈치 아래가 전부 뒤틀리도록. 10층 보스의 두개골도 으스러트리는 반사뎀이다. 고작해야 인간의 몸뚱어리가 버틸 게 아니지.

생각해보니 롤랑 이거, PVP용 캐릭터로 디자인 된 건가? 보스 몬스터한테 반사뎀은 의미가 별로 없을 텐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모험가 업계에서 10년을 구른 나도 눈썰미 같은 게 좀 생겼다.

정식 검술 따위는 모르지만, 칼질하는 걸 보면 얘가 어디서 뭘 하다 온 놈인지는 대충 감이 잡히는 것이다. 검 쥐는 법도 몰라 농기구 쥐듯 쥔 농부, 장검보다 해체용 단검을 많이 써 본 사냥꾼, 정교하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자세인 병사와 기사 나으리들.

그리고 몬스터보다 사람을 많이 잡은 용병과 산적 새끼들.

 “아, 손으로 막을 걸 괜히 찔려줬네. 옷에 구멍 났겠다.”

 “흐악, 아아아, 내, 내 손이….”

 “근데 니들 현상금은 걸려 있냐?”

초원을 박살 내며 달려온 내 속도에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뒤로 자빠져 있는 다른 세 놈. 피해자인 여자 두 명도 힉힉거리며 상체만 겨우 일어나니 어째 우스운 꼴이 되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아서 양팔 부러진 놈을 구경하는 구도가 되었으니까.

 “야, 현상금 걸려 있냐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그냥 묻으면 되겠네.”

 “걸려 있습니다! 왕국 동남쪽 산맥에서 산적질 하다 와서 생포해가면 현상금이 있습니다!”

파헤쳐진 흙바닥을 흘낏 바라보자 사색이 되어 동료의 말을 부정하듯 크게 외치는 털북숭이 한 놈. 산채로 파묻히는 걸 상상했는지 더러운 턱수염이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턱을 달달 거리며 떨고 있었다.

그래도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는 놈이 있으니 편하네.

묶을 밧줄 따위가 없는데 양팔만 부숴둘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뒤늦게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합류한다. 지면을 일자로 박살 내며 달렸기 때문에 처참하게 속살을 드러낸 초원의 풀밭을 따라서 온 그녀들.

 “이건 무슨 상황이, 야?”

울고 있는 여자들과 겁에 질린 남자들이 나란히 주저앉아 있으니 상황 파악이 느린 걸까. 아니면 완전히 박살 난 두 팔이 모자이크로 보기에도 불긋불긋한 게 역한 걸까. 시선을 애써 돌리는 한세아와 달리 그레이스는 모든 걸 파악한 듯한 눈치였다.

 “한나, 그 인벤토리에 밧줄 같은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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