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내 대답에 밝게 웃는 그녀. 하기야 뜨거운 하룻밤을 함께 보낸 여자에게 롤랑 님이라고 존칭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세아의 파티에서 탑의 꼭대기까지 함께 할 사이라면 더욱더.
옆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달라붙은 그레이스가 배시시 웃으며 이야기의 주제를 돌린다. 원하던 목표는 달성했으니 한 번에 확 진도를 뺄 생각은 없나 보네. 하긴 과감하게 달려들었다가 지난번에는 밤새 험하게 다뤄지긴 했지.
“그나저나 탑의 몬스터들이 도시에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뭐… 탑이야 원래 그런 곳 아니겠어. 저 마탑의 마법사들이 단체로 달라붙어도 제대로 알아낸 게 없는 공간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좀 와 닿네. 수천 명의 마법사가 달라붙어도 알아낸 게 없는 미지의 공간이라….”
놈팽이 여관의 입구에서도 보이는 높은 탑.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쭈욱 뻗어 있는 탑을 올려다보는 그레이스의 옆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없이 탑을 올려다보니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여관 문이 열리며 내가 안으로 들여보냈던 점잖고 돈 많은 마법사들이 밖으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사람 판별은 제대로 했는지 언성이 높아지거나 귀찮은 시시비비가 걸리지는 않은 모양.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네, 한나 양.”
“모험가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마탑을 찾아오십시오.”
되려 한세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몇몇 마법사들은 정중하게 그녀를 스카우트하려 든다. 탑을 올라야 하는 그녀가 마탑에 틀어박힐 일은 없겠지만.
마법사들이 우르르 떠나자 조용해진 여관. 금화를 받은 여관 주인이 좋다고 여종업원들에게 휴가를 준 상태라 우리밖에 없는 고요한 건물로 그레이스가 경쾌하게 뛰어 들어가 한세아의 옆에 착 매달린다.
“한나, 무슨 대화를 그렇게 나눈 거야? 옆에 있어도 못 알아듣겠더라.”
“뒷골목에 있던 그 문양이랑, 우리가 만났던 은색 뿔늑대랑 이것저것 이야기 한 거예요. 사실 저도 잘 못 알아들었어요 언니.”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중 똑똑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 수다 삼매경에 빠진 두 여자 대신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 이번에는 한세아가 아니라 내 손님이네.
“무슨 일이야, 엘리스?”
“으휴, 이 상황에 뭐 때문에 왔겠어요.”
“말이 너무 심하네, 도시의 영웅에게 이렇게 대해도 되나?”
“도시의 영웅이 아니라 공공기물 파괴범에게 하는 말이니까 상관없겠죠.”
품 안에 들고 있는 서류를 내게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는 엘리스. 한세아가 마법사로서 탑의 이변을 감지해 손님이 잔뜩 찾아왔다면 내게는 다른 이유로 손님들이 잔뜩 찾아왔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일단 도시의 영웅 겸 공공기물 파괴범이 되었으니까.
초보 모험가의 헛소리 같은 증언을 듣다 말고 뛰쳐나간 게 문제였다. 생각보다 강하게 열었는지 문짝에 금이 갔고 입구 쪽에는 내 발자국 모양 웅덩이가 생긴 상황이란다.
그 외에도 여관 나무 지붕을 박살을 냈거나, 상회의 돌 지붕에 내 발자국이 남았거나, 주먹을 내질러 박살 내버린 초보 연금술사의 담벼락과 가게 뒷벽도 문제가 되었지. 마도구로 가득 찬 집을 짓기 위해 모아둔 저금이 빵빵해 문제없이 배상할 수 있어서 상관없지만 밟고 뛴 건물이 많아서 그런지 길드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더라.
“그래서, 길드에서는 어쩔 생각이야?”
“이번에는 길드가 할 일이 그닥 없어요. 아무래도 경비병들이 골목을 감시하는 방향으로 갈 것 같아서. 마탑의 마법사들이 뭘 밝혀내면 그때 움직일 것 같네요. 아, 그리고 탑 내부에서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사소한 것도 제보해달라고 마탑의 요청이 있어요.”
“탐색 의뢰가 하나 늘어났을 뿐이네.”
“그렇죠, 이런 걸 밝혀내는 건 대부분 마법사니까.”
밝은 눈웃음으로도 가릴 수 없는 피곤한 눈동자. 짬이 높은 만큼 책임질 것도 많은 엘리스인지라 고생 좀 하나 보다. 하필이면 다친 초보 모험가를 치료해주며 이야기를 들었으니 써야 할 보고서가 잔뜩 있겠지.
길드로 날아온 손해배상 청구서를 내 품에 안겨준 그녀가 뒤돌아 사라진다.
…아잇, 시발. 많이도 부숴 먹었네.
길드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들어오는 쥐새끼 수염의 남자. 얼굴에 눈에 익은 게 모험가 길드를 자주 들락날락하는 양반인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험가의 전리품을 자주 구매하는 사치스러운 귀족이라는 뜻.
내 생각이 맞는지 나를 단번에 찾아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대뜸 손을 내민다.
“도시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낯부끄러운 이명입니다. 실제로 몬스터를 물리친 건 무기를 들고 싸운 경비대 아니겠습니까.”
찾아왔으면서 우연히 만난 척 말하기는.
“하하, 겸손하기까지. 다른 모험가들도 롤랑 경처럼 겸손하다면 얼마나 좋을지.”
“경이라뇨. 기사 작위도 없는 한낱 모험가일 뿐입니다.”
“갑옷을 입고 시민을 구했는데 그 누가 롤랑 경의 명예를 의심하겠소?”
한참을 내 얼굴에 금칠하던 남자가 악수를 청하더니, 손아귀에 무언가를 쥐여주더니 히죽 웃으며 길드 밖으로 사라진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남자가 내게 남긴 것은 금화 여섯 개가 들어 있는 비단 주머니.
주머니값만 해도 은화 세 개는 되겠다.
“저 남자가 마지막이지?”
“네. 공식적으로 감사 인사를 표하러 온 귀족은 저게 끝이에요. 주머니 좀 두둑해졌을 텐데 수고비는 그때 그 뚱카롱으로 부탁해요.”
“그래, 알겠어. 길드 덕분에 내가 편하게 산다.”
“길드가 아니라 내 덕분이죠.”
“나한텐 길드가 곧 너지.”
건물과 문짝 수리비로 나간 금액이 금화 두어 개가 되지 않는데, 만나는 귀족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금화를 다섯 개씩 쥐여주니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이게 내가 평판을 위해 금화를 턱턱 내놓고 예비 무장도 모르는 아저씨에게 쥐여주는 가장 큰 이유.
사교회에서 ‘이번에 도시를 구한 모험가를 내 직접 치하했네.’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금화를 턱 내놓는 것이다. 물론 '도시의 영웅이 내 건물을 부순 수리비를 내더군' '내 하인을 구해줬네' 따위의 핑계거리를 장착한 채.
“그나저나 귀족 나으리들이란. 고작 이야깃거리 하나를 만들려고 금화를 저렇게 뿌리고 다니네요.”
“모험가 도시의 귀족들은 대부분 부자가 많으니까.”
콧수염이 인상적인 마지막 손님을 배웅한 뒤 잠시 방송국 게시판을 통해 다른 플레이어의 현황을 구경했다. 인터넷 게시판이 아닌 한세아의 방송국 게시판인 만큼 정보가 한정적이었지만 비교를 좋아하는 네티즌 덕에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뿔늑대의 도시 출현 조건은 10층에 도달해 일정 횟수 이상 사냥할 것. 뿔늑대의 마석으로 카운팅 되는지, 부산물로 카운팅 되는지는 몰라도 뿔늑대를 무리 없이 사냥한 플레이어만 이벤트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마주한 이벤트 상황. 한세아의 경우 내가 채팅창을 훔쳐봐 곧바로 대처했다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6★ 팔라딘 롤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상자도 늘어났고 도시의 난장판도 더 커졌다고 한다.
물론 피해가 크다 해서 건물이 박살 나고 도시의 치안이 위태로워지는 수준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파티원들과 뿔늑대를 잡고 있으면 소란을 감지하고 출동한 경비병들이 뿔늑대를 사냥하기 시작하니까.
엑스트라 NPC들이 좀 많이 죽고, 정말 재수가 없다면 자기가 머무르는 여관 주인이나 식당 아주머니가 죽어 머무를 숙소와 재산이 날아갈 뿐. 게임 플레이를 완전히 망가트리는 손해가 벌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 한세아가 방송으로 뿔늑대를 마주한 덕에 인터넷에 소문이 잔뜩 퍼져서 다들 피해가 적다는 댓글도 있었다. 한세아의 방송국인 만큼 팬심으로 부풀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정보가 있다면 게임 감각 좀 있는 놈들은 알아서 했겠지. 여차하면 아침으로 리셋해버려도 되니까.
“10층에서 사람을 만나는 빈도가 꽤 높아졌네요.”
“11층 이상에서 사냥하던 파티도 다 내려왔다고 그러더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0층까지 쭈욱 들어와 한세아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다른 파티원이 또 우리에게 눈인사하고 지나친다. 내 얼굴을 아는 모양인지 경계심은커녕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려다 예의상 발걸음을 멈춘 모양새.
하는 행동은 참 귀여웠다, 키가 2m는 되어 보이는 흉터투성이의 아저씨만 아니었다면 더 귀여웠을 텐데.
흉악한 가시가 비죽 돋아 있는 견갑부터 덩치만큼 커다란 양손 도끼까지. 어떻게 봐도 뿔늑대를 사냥하는 초보 모험가는 아니다. 가시에 흠집이 많은 걸 봐선 겉멋으로 달아둔 게 아니니, 자신만의 전투 스타일을 완성한 베테랑 전사. 뒤에 따라다니는 파티원들도 다들 한 실력 해 보이는 모양새다.
“우리가 본 거, 길드에서 소문을 쫙 퍼트렸거든. 평범한 뿔늑대보다 배는 커다란 은색 뿔늑대가 등장했다고.”
“그래도 중층에서 사냥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아니지. 만약 그 뿔늑대를 사냥하는 데 성공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테니까.”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레이스. 아직 초보 모험가인 만큼 귀족과 엮인 일이 없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나 보다.
“뿔늑대의 부산물에는 뭐가 있지?”
“뿔, 눈알, 송곳니, 발톱, 가죽.”
“그때 우리가 만난 놈의 특징은?”
“덩치가 엄청나게 컸고… 색이 은색, 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말하다 말고 감탄사를 내뱉는 그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우두머리 뿔늑대의 은색 가죽을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의 돈 지랄이 벌어지는 순간, 사냥에 성공한 모험가는 은퇴해서 여생을 놀고먹으며 지낼 수 있을 거다.
모험가가 목숨 걸고 동전, 은화 따위를 버는 동안 귀족들은 제 초상화 따위에 금화 열댓 개를 던지는 족속이니까.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자랑거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내게 금화를 대여섯 개씩 주고 가지 않았던가?
‘그래도 잡는 건 한세아겠지. 메인 시나리오라던데.’
정처 없이 초원을 돌아다니지만, 불만 따위는 없었다. 퀘스트 시작을 알고 있던 한세아인 만큼 퀘스트의 진행도 그녀가 알아서 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나 같은 녀석은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뛰어가서 몸으로 때우는 게 편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