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 골목이 맞아요. 그러니 이제….”
내 질문에 골목 앞에서 퀘스트 창이 아직 갱신되지 않았는지 눈을 굴리는 한세아. 아니면 갱신된 퀘스트의 내용이 길어 읽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가.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먼저 진입한다.”
“네?!”
어쩌면 탑과 도시를 이어주는 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흥분감. 마치 전투 전의 고양감처럼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린다. 장비도 없이 달려온 맨몸이지만 나는 주저 없어 골목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탑에 진입할 때처럼 어둑하게 변하는 시야. 잠깐의 명멸 뒤에 정상적으로 돌아온 시야에는 골목길이 아닌 넓디넓은 초원이 비치고 있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
늑대 무리가 가득한, 밤의 초원이.
“이야, 씨발. 이건 초보가 깨라고 만들어진 퀘스트가 아닌데?”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내 뒤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적게 잡아도 서른은 되어 보이는 뿔늑대 무리와 중앙에 있는 두 배는 커다란 우두머리 뿔늑대까지. 이 정도 숫자면 중급 모험가 파티도 전멸시킬 수 있겠는데.
이딴 게 초보자의 첫 퀘스트라고?
이해할 수 없는 밸런스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왜, RPG 게임에 흔히 있는 강제 패배 이벤트 같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따위 밸런스면 다른 게이머들은 진입하자마자 정든 동료 다 뒤지던 게임 오버를 당하던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니까.
그런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공격해오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덩치 큰 뿔늑대. 다른 뿔늑대 들이 더러운 회색 털이라면 녀석은 달빛을 머금은듯한 은색 털을 자랑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이렇게 보니 디자인 하나는 기깔나게 잘 뽑았네.
‘죽여, 말아?’
밝은 대낮이 24시간 유지되는 초원과는 달리 만월이 휘영청 떠 있는 밤의 초원. 달빛 아래에서 우두머리 뿔늑대 놈과 눈싸움을 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골목 안으로 들어간 내가 슉 사라지니 뒤따라 들어왔나 보네. 뿔늑대는 늑대의 습성을 가졌다 해도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진 않기에 당황한 것 같다. 초보자용 첫 보스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 다니면 그것도 지랄 맞긴 하겠네.
그레이스에 뒤이어 한세아도 진입했는지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스태프를 높게 쳐들고 쉴드 마법을 유지한 채 진입하는 그녀. 그레이스와 같이 늑대 무리를 보고 놀랐는지 입이 떡 벌어진다.
물론 방송인으로서의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곧바로 내 머리 위를 부웅 날아서 지나친 카메라 드론이 뿔늑대 우두머리를 열심히 촬영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이 공간, 명백히 이상하다.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겠어? 나갈 수 있으면 모험가 길드와 마탑에 이야기를 전해.”
“하,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머뭇거리는 그녀. 잘 생각해보니 이런 메인 이벤트에서 빠지면 방송인으로서 실격이겠구나.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면, 쉴드 유지하고 주변 분석 좀 해 봐. 여길 찾아냈을 정도니 뭔가 알아낼 수 있겠지? 엉덩이 무거운 마탑 놈들 오는 것보단 네가 더 낫겠지.”
“네! 그럴게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한세아와 조금은 불안한 듯 한세아의 곁에 달라붙는 그레이스. 늑대 울음소리가 멈춘 초원은 바람에 휘날리는 풀잎 사브작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한낱 저층 보스 몬스터 주제에 달을 등지고 나를 노려보는 놈. 뿔늑대의 수가 많으니 일단 돌진해 우두머리의 골통을 박살을 낸 다음 나머지는 두 명을 보호하면서 싸우면 되겠네.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도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는 그 건방진 자태에 초원의 흙바닥을 박살 내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우, 우우우우우―――
침묵을 유지하던 우두머리 뿔늑대가 달을 올려다보며 길게 우짖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지를 박차고 바람을 가르며 내뻗어진 내 주먹. 뿔늑대는 물론이요 숲의 오크 사냥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불합리한 폭력이 올곧게 내뻗어져서―
“우, 우와악! 당신 뭐얏!”
“어, 어머? 돌아왔네요.”
쾅! 하고, 애꿎은 담벼락을 박살 내고 뒤에 있는 자그마한 공방의 벽면을 무너트렸다.
난데없이 공방의 뒷벽과 담벼락을 잃은 연금술사가 화들짝 놀라 꽥꽥 소리를 지르지만, 바닥에 나뒹구는 울타리의 잔해를 보자 금세 조용해진다. 시발, 그냥 컷씬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보스였나.
“왜 남의 집 담벼락을… 뭐야 이건?”
손맛이 없어 아쉬움만 남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잠시 생각에 빠져 있으니 시끄럽게 굴던 연금술사가 골목길까지 나왔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모험가 같은데 이거 때문에 난리가 난 거요?”
밤의 초원으로 들어가게 만든 골목 바닥에 불로 지진듯 새겨진 기묘한 문양.
그것은 탑에 입장할 때 생기는 문양과 똑같이 생긴 모양새였다.
탑에 있어야 할 몬스터의 등장으로 사상자가 잔뜩 발생한 상황. 당연하게도 도시는 적을 만난 말벌집처럼 난리가 났다. 모험가의 도시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던 양반들도 꽤 있는데 그런 도시에서 몬스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높은 콧대가 박살이 난 거지.
모험가 도시는 탑의 존재 때문에 한 명의 영주에 의해 지배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길드들과 신전의 주교, 세금 담당 귀족 나으리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 자유롭게 떠돌아다녀야 할 모험가가 농노처럼 부자유민일 순 없으니 만들어진 설정이리라.
아무튼, 그런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윗대가리들은 네 탓이니 아니니 하며 이득을 위한 명분 싸움을 시작했고, 탑의 이상 현상을 조사하는 마탑의 마법사들은 눈깔이 희번들하게 뒤집혀서는 온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중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건, 당연하게도 한세아.
“이보게, 이 여관에 한나라는 여모험가가 있다고 들었네만.”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마법사 하나가 로브에 고깔모자에 제 키보다 기다란 스태프를 짚고 어슬렁어슬렁 여관 앞으로 다가온다. 촌동네 무지렁이가 봐도 마법사님이라고 절을 넙죽 올릴 것 같은 차림새.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그야 이 세상의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신비로 몸을 감싼 초자연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연구에 미쳐버린 대학교수 같은 양반들이었으니까. 제자 굴리는 꼴이 거의 대학원생 다루듯 굴려 연구를 진행하는 게 마법사. 상급 모험가의 의뢰 때문에 몇 번 실상을 목격한 내겐 저 옷차림은 일종의 웃음 벨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래도 나이 지긋한 노인장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날릴 순 없는 상황. 모험가가 아무리 칼밥 먹고 사는 무뢰배라 해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개인 의뢰가 날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그 대상이 밥줄이라 부를 수 있는 마법사라면 더욱더.
“이번 사건 때문에 내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일세… 혹시 아는 사이인가?”
그렇기에 나는 여관 문 앞에 서서 마법사 노인을 슥 살펴보았다. 돈 좀 꽤나 썼는지 화려하고 멀끔한 로브와 모자. 거기에 젊어 보이는 내게 반말부터 하지 않는 정중한 말투. 이 정도면 마법사 인성 상위 1%라 봐도 좋았다.
“예. 그녀와 함께 모험하는 사이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마법사들도 있을 텐데, 함께 대화하는 게 상관없으십니까?”
인성이 괜찮고 돈 쓸 줄 아는 마법사는 안으로. 그러면 그레이스가 딱 봐도 마법사인 손님을 보고 한세아를 데려오는 식이다. 안하무인에 오만한 마법사는 내가 입구에서 걸러내고, 뭔가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점잖은 마법사만 들여보내는 방식.
“무례하군, 내 물어볼 것이 있다 했거늘!”
“이미 선약이 잡힌 상태입니다.”
시끄럽게 구는 오만한 마법사들 때문에 탑에 들어갈 때도 입지 않은 갑옷을 차려입은 상태다. 어딘가의 귀족 도련님이라도 되는지 시끄럽게 구는 남자였지만, 사람 하나는 너끈히 짓이길 수 있는 방패로 바닥을 쿵 내리찍자 씩씩거리며 마탑으로 돌아간다.
여종업원들이 뿔늑대에게 찔려 죽은 모험가를 봐 버린 탓에 영업을 잠시 멈춘 상태. 덕분에 여관 입구를 틀어막아도 군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되려 장사를 잠시 접었는데 금화를 받은 주인장이 좋아서 고개를 꾸벅 숙였지.
쿵 소리를 들었는지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그레이스.
“저기, 마법사들 상대로 이래도 되나요?”
“마법사 모두를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어.”
“그래도….”
생긴 건 세련된 도시 아가씨에 가까운데 화전민 마을에서 자란 시골 아가씨 특유의 미신 같은 게 있는지 조금 불편해 보이는 그레이스. 그래도 마법사에 대한 미신보단 상급 모험가인 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한지 웃어 보이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한나는 어때?”
“아까부터 마법사들이랑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하기야, 내가 들여보낸 마법사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괴팍한 노인네도 있었지만 대부분 늙고 점잖고 실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을 들여보낸 상태다. 마법사도 아닌 사람이 안에 있기에는 좀 부담스러우려나.
머리만 쏙 나온 상태로 나를 바라보더니 슬쩍 문밖으로 나와 내 곁에 서는 그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인다.
“저기, 우리가 파티를 결성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롤랑 님이라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지 않나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나 했더니, 이런 거였나. 밤에 한 번 혼쭐이 났더니 대담하게 들이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줍어하는 아가씨만 한 명 남았네. 한세아와는 다른 방향으로 속이 훤한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건 그렇지. 같은 파티원인데 너무 거리감이 있는 것 같긴 해.”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