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75)

김석현이라 불린 남자가 한손검과 둥근 버클러를 든 채 달려드는 늑대를 맞이한다. 낮게 낮춘 자세와 찔러 들어오는 뿔에 정확히 가져다 댄 버클러. 하지만 꼴랑 직경 30cm짜리 소형 방패로 맹수의 돌진을 막아낼 순 없었다.

정확하게 맞부딪치는 뿔과 방패, 옆으로 꺾여버리는 손목, 멈추지 않는 돌진과 그대로 복부를 꿰여 나뒹구는 남자. 플레이어의 보호를 위한 건지 푱! 하고 몬스터처럼 먼지가 되어 사라지며 화면이 검게 변하는 것으로 움짤이 끝난다.

음, 플레이어는 죽으면 게임이 멈추고 그날 아침으로 되돌아 가는 건가. 이건 되게 좋은 정보네.

그나저나 스킬도 랜덤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아직 플레이어들이 NPC의 스킬을 확인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비비게임즈가 패치를 안 한 것인지, 평생 보여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도 한세아도 구경하는 시청자들도 내 스킬을 모른다는 것.

 “로올랑! 술잔이 멈췄어!”

 “…음?”

그렇게 테이블에 턱을 괴고 게시판을 보고 있으니 눈앞에 들이밀어 지는 술잔. 진이 빠진 한세아를 내버려 두고 그레이스가 이번에는 내 쪽에 달라붙는다.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 사이로 한세아가 ‘성희롱, 밴, 고소, NPC’ 어쩌고 하는 걸 봐선 늘어난 시청자가 그레이스를 보고 더러운 채팅을 잔뜩 쳤나 보네. 카메라가 움직이는 걸 멈출 정도로 바빠 보이는 그녀.

 “흐으음, 아니면 옆에 여자가 있어야 술이 들어가는 편이려나? 우리 호색한 기사님.”

어지간히 취했는지 휘청거리며 내게 기댄 그녀가 빈 술잔을 들고 내게 술을 따라주려 한다. 들고 있는 빈 술잔에서 훅 끼쳐오는 달콤하면서도 독한 술 냄새. 두둑해진 주머니를 믿고 값싸고 밍밍한 술 대신 비싼 독주를 호기심에 시켜본 건가?

평생 맥주, 소주만 먹던 사람이 40도짜리 양주를 맥주 마시듯 마신 꼴이니 이렇게 취할 수밖에.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지만 휘청거리다가 의자에서도 떨어질 것 같이 흔들거리는 상체. 그 묵직한 가슴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 안정감 있게 버틸 것 같지만 흥에 취해서 잔을 계속 들어 올리는 게 문제다.

잔을 번쩍 들어 올린 만큼 상체가 뒤로 쏠리니 술에 취한 채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다시 한번 뒤로 넘어가려는 그레이스의 등허리를 팔로 휘감아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준다.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라 이럴 땐 불편하네.

 “한나? 너도 취한 거면 둘 다 숙소로 올라가는 게 어때.”

 “아, 음, 네?!”

왼손으로는 그레이스의 허리를 휘감은 채 오른손으로 손가락을 따악 튕겨 한세아의 주의를 끈다. 기뻐서 술을 마신 것까진 좋지만 고약한 술주정까지 전부 들어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적당히 취했다면 함께 숙소로 올라갈 각이라도 보겠는데 이건 너무 취했어.

 “한나…? 한나 잔도 비었잖아! 종업원들은 뭘 하는거야아―”

비틀거리며 내 품 안에서 벗어난 그레이스가 다시 한세아에게 향한다. 아무래도 그레이스의 주사는 누군가를 끌어안는 종류인지 망설임 없는 포옹. 이런 술주정은 처음 마주하는지 당황한 한세아의 얼굴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그래도 취기가 훅 올라왔는지 한세아의 팔뚝에 머리를 박은 채 조용해진 그레이스. 그런 그레이스의 추태 아닌 추태를 보고 한세아가 얌전히 제 술잔을 내린다.

 “뿔늑대 사냥에 성공했다 해도 바로 11층에 올라가진 않을 거다. 한동안은 10층에서 뿔늑대를 잡으며 소재를 납품해야 해. 그레이스가 저 모양이니 어쩌면 내일 하루는 정비 겸 휴식을 취해도 되겠네.”

 “11층은 많이 위험한가요?”

 “위험한 것도 맞지만, 파티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도 있지. 꾸준히 뿔늑대 부산물을 납품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질 거야. 개인 의뢰를 받기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급 모험가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니까 그걸 노리는 거고.”

내가 팁으로 금화를 선뜻 건네고, 내게 호의를 보인 팬에게 값비싼 무구를 선물로 주듯 한세아의 파티도 이름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마법사 한나의 파티가 아니라, 팔라딘 롤랑이 키워주는 초보자 파티로 더 알려져 있을 테니까.

팔라딘 롤랑이 흥미를 느낀 초보자 파티보다는, 뿔늑대를 꾸준히 사냥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모험가 파티가 더 믿음직스러운 게 당연한 이야기.

 “10층까지의 랜턴을 준 이유도 마찬가지야. 내 능력이라면 너희를 당장 43층 탐색 캠프까지 데려갈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희가 모험가가 된 의미가 없지.”

이것은 전생의 게이머로서, 그리고 10년간 전투를 해 온 전사로서의 의견. 점핑 캐릭터처럼 한세아를 탑의 최상층에 데려다 놓고 쩔 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내 역할은 저층을 스킵하는 정도에서 멈추고 11층부터는 남들 하듯 성장해 나가야지.

나중에 막 내가 모르던 탑의 보스 같은 게 나타났을 때 대응하는 건 플레이어 한세아의 역할일 테니까.

 “그러니 뿔늑대를 잡아 길드에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보수를 저축해서 중급 모험가의 장비를 살 준비를 해. 그레이스의 장비는 물론이고, 네가 입고 있는 장비도 길드의 중고품이니까.”

 “뿔늑대를 잡아서 파티의 이름을 알리면, 더 훌륭한 동료가 들어올까요?”

 “그야 당연하지. 약초 탐색이 메인인 파티에 지원하는 사람과, 뿔늑대 사냥이 메인인 파티에 지원하는 사람의 수준 차이는 엄청나니까.”

승부욕이 꽤 있는 한세아는 내 말에 목표를 잡았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무언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43층에서 시작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억지는 부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한세아가 등장하고 퀘스트가 시작되었지만, 일상이 급박하게 변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는 뿔늑대를 막아낼 때 실수로 죽이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하며 반사 데미지에 대한 감각을 잡았고, 그레이스와 한세아는 탱커의 뒤에서 딜 넣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으니까.

놈팽이 여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중급 모험가용 장비를 맞출 때까진 뿔늑대 노가다를 뛰어야 하는 상황. 채팅창과 게시판으로 확인해 보니 한세아의 뒤를 따라오는 몇몇 플레이어들은 이제야 뿔늑대를 막아줄 전위를 구한 모양새다.

확실하게 한세아가 반 층 정도 앞서 나가는 모양새. 게임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 같은 게 있다면 그것도 쑥쑥 올라가고 있지 않을까?

 “오늘도?”

 “네, 오늘도.”

 “신전 쪽에 한 번 가봐야 하나?”

 “거기 간다고 뭐 달라지겠어요? 사제님들은 어련히 알아서 나올 텐데. 그러지 말고 상층에 있는 예전 파티원들을 데려오는 건 어때요?”

문제가 있다면 저축을 위한 잠깐의 정체 기간 동안 동료 구하기 또한 멈췄다는 것. 뿔늑대를 무리 없이 사냥하는 파티다 보니 어중간한 초보 모험가를 데려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제는 나오기만 하면 모셔갈 텐데 신전에서 나오는 사람이 없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세아를 업어 들고 탑 꼭대기까지 뛰었지. 그레이스 대신 43층에 있을 연놈들을 다 그러모아서 탑을 뚫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조급함은 늘 모든 걸 망친다는 걸 10년의 시간 동안 몸으로 배워왔다.

 “그럴 거면 한나를 데리고 43층으로 갔지. 그녀에게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해.”

 “한나 양의 실력이 그 정도인가요?”

 “난 그녀가 50층의 문을 열 거라고 생각하거든.”

 “세상에. 그 게으른 롤랑이 50층을 입에 담게 만들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마법사네요.”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저 퀘스트를 꼬박꼬박 깨는 것. 동료를 두 명 추가해야 하는데 이게 내가 급하다고 막 되는 게 아니지. 가챠 캐릭터인 사람과 아닌 사람, 별의 유무가 보여주는 성능 차이 때문에라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까놓고 말해서 NPC들끼리 43층까지 올라갔는데, 탑의 끝이 50층일 리 없을 것 같거든. 게임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50층에서 이벤트 큰 거 하나 열리고 100층이 엔딩 아닐까? 그렇게 아침의 일과가 된 잡담을 나누고 있으니 띠링, 하고 알림음이 들려온다.

[한세아 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세아_튜토리얼 끝! 본격적인 게임 시작!]

…뭐가 시작된다는 거야?

한세아는 방송 제목을 담백하게 짓는 편이었다. 스킬을 배우고 나서는 숙제 검사, 그레이스와 만난 뒤에는 3★ 궁수. 시청자들이 제목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그렇기에 무엇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도 뿔늑대를 잡아야 하니까. 어제와 달라진 게 없는 일정인데 무슨 튜토리얼이 끝났고 무슨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건지. 아무튼,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조금 있으면 길드의 문이 열리고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들어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에 축 늘어져 있으니 벌컥 열리는 문.

 “저, 접수원!”

 “이봐. 부상을 당한 거면 길드가 아니라 신전을 가야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한세아나 그레이스가 아닌 피투성이의 아저씨 한 명. 후줄근한 장비를 보아하니 저층에서 약초 탐색 의뢰를 하는 초보 모험가로 보인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뚝을 보니 욕심을 냈다 뿔늑대에 치이기라도 했나.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런 걸 하나씩 봐주다 보면 신전에 갈 돈이 없다고 구걸하는 초보 모험가들이 잔뜩 생길 테니까.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뿔늑대가 나왔다고!”

 “무슨 소리야?”

 “공방 거리! 공방 거리에 약초를 납품하러 갔는데 거기에 뿔늑대가 있었어!”

 “이 새끼, 약이라도 했나?”

 “저기… 모험가가 길드에 허위 보고를 하면 의뢰 수주에 지장이 생기실 수 있어요.”

중급 모험가의 핀잔과 엘리스의 우려 섞인 경고에도 초보 모험가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출혈 때문에 어지러운지 횡설수설, 단어가 어지럽게 섞이지만,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공방 거리의 복잡한 골목길을 헤매며 의뢰를 넣은 연금술사의 공방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골목의 잡동사니 더미에서 뿔늑대가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 도약 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데다 품에 약초 마대를 들고 있어 팔만 꿰뚫려서 길드까지 도망쳐 왔다―

 “분명 지난번에 약쟁이 놈들은 싹 밀어버렸을 텐데.”

중급 모험가는 상처를 입은 초보 모험가가 마약이라도 했다는 듯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지만 나는 엘리스와 중급 모험가처럼 저 남자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야 한세아의 방송 제목이 ‘본격적인 시작’을 언급한 상황이잖아.

…아무것도 없이 탑을 오르는 게임이 재미가 있을까? 아니면 탑을 오르는 중 메인 시나리오 이벤트가 생기는 게임이 재미있을까. 스탯창이 있고 인벤토리가 있고 수주한 의뢰를 정리해주는 퀘스트 창이 있다면 당연히 게임사가 준비한 메인 시나리오가 있지 않을까?

 “이봐, 공방 거리라고 했나?”

 “네, 네! 정말입니다! 제 랜턴엔 10층은 기록도 안 되어 있다구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한세아가 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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