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75)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한세아와 비슷할 정도로 저층의 소재 가격을 모른다. 육체가 워낙 사기적이다 보니 탑에 적응하기 위한 전투도 대부분 11층 위에서 벌어졌거든. 가죽 갑옷도 못 뚫는 뿔토끼를 상대로 연습할 게 뭐 있겠어.

그러다보니 약초 생김새도 잘 모르고, 자생지 찾는 법도 모르고, 공생하는 약초나 기생해서 제거 대상이 된 약초도 모른다. 그런 쪽은 다 파티의 탐색꾼에게 맡겨 놨으니까.

 ‘비상시를 대비할 사제 정도만 있으면 완벽하겠네.’

공격형 전위야 내가 있으니 그다지 급하지는 않다. 3★ 그레이스를 보면 생각보다 스탯이 높은 게, 일종의 밸런스 패치를 통해 낮은 성급도 사용하게 만든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탱커 주제에 근딜 수준의 깡공격력을 지닌 롤랑의 육체가 너프된 건 아니라서.

까놓고 말해서 4★ 이하의 공격형 전위가 파티에 들어올 경우 내 철퇴의 공격력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니 파티에 당장 급한 것은 그레이스처럼 내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제님.

 “의뢰 다 골랐어요! 출발하죠.”

선택한 의뢰는 어제 봐 둔 통로 근처의 약초 자생지 하나와 뿔늑대 부산물에 관련된 의뢰들. 성격이 꽤 급하지만, 주머니는 두둑한 물주님이신지 가격을 높게 책정해 놨다고 그레이스가 방실방실 웃으며 골랐다.

여전히 모험가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 탑으로 향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딱 하나뿐인 거리의 일상.

 ‘뭔가… 뽀얀 얼굴의 여자들이 늘어났는데.’

다음 장비를 위해 저금을 하다 보면 미용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게 초보 모험가. 머리는 기름져 떡져있고 피부는 꾀죄죄한 게 평균적인 모험가의 모습인데 어째 일부의 여자 모험가들이 뽀얗게 변하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미녀들이라고 할 순 없지만, 기본적인 청결은 유지하고 있는 모양새. 아마 1~2★의 모험가들이려나. 하기야 그레이스도 있는데 다른 여자들도 좀 외모 버프를 받을 수 있겠지.

 “곧바로 입장해서, 10층의 뿔늑대를 먼저 사냥한 뒤 다른 의뢰를 부차적으로 진행할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탑의 입구. 오가는 사람들의 흐름에 맞춰 탑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체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일행들을 같은 곳으로 보내주는 탑. 뿔뿔이 흩어지는 불상사 따위 없이 초원이 우리를 반긴다.

파티의 리더는 내가 아니라 한세아, 너라고 말해둔 걸 기억하는지 곧바로 리더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그녀.

 “그레이스 언니, 뿔늑대를 추적할 때 주의할 게 있나요?”

 “뿔늑대는 이름 그대로 후각이 좋아. 따라서 추격하다 보면 녀석이 되려 우리를 습격하는 때도 있어. 그러니 높게 솟은 수풀이 있다면 언제나 쉴드 마법을 염두에 둬. 물론 뿔늑대가 우리 파티의 전위를 뚫고 후열까지 올 수 있다면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 뿔늑대 따위에게 내가 뚫릴 리 없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슬쩍 흘려서 대응력을 알아보고 싶지만 그건 다른 전위가 왔을 때 해봐야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웃어 보인 그녀들이 다시 진형을 잡고 걷는다. 진형이라 해 봤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을 뿐이지만. 10층까지 가는 길은 역시나 평온 그 자체였다.

가끔 다른 모험가 파티를 만났지만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으니 데면데면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칠 뿐. 탑이 넓고 모험가도 많다 보니 저층에서는 아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나랑 친분이 있는 양반들은 다 30층 위쪽에 있는 탑 공략 전초기지 비슷한 곳에서 노숙 중이니까.

그렇게 도착한 10층.

 “그레이스 언니, 뿔늑대는 어떤 방식으로 추적해요?”

 “뿔여우가 수풀에 남긴 흔적을 보는 것처럼, 뿔늑대가 숨어있을 법한 높은 키의 수풀을 찾을 거야. 거기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으면 흔적을 따라가다 네가 만든 유인향을 쓸 거고.”

 “그럼 이 늑대 유인향은 언니가 들고 있는 걸로.”

그레이스와 대화를 나눈 한세아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다. 질 낮은 종이에 둘러싸여 있는 주먹 크기의 둥근 덩어리. 그레이스가 확인 차 덩어리를 작게 떼어 부순 뒤 검지와 엄지로 살살 비비니 비릿한 냄새가 훅 올라온다.

약초에 시약을 섞어 피비린내와 비슷한 악취를 풍기게 한 건가.

탑에서 뿅 하고 생겨났다 해도 밖의 몬스터와 특성이 다른 점은 없었다. 뿔늑대도 늑대인 만큼 피 냄새에 예민해서 상처를 입은 모험가를 노리는 일이 많거든. 초보 모험가에겐 재앙과도 같지만, 중급 이상의 모험가에게는 굴러들어오는 용돈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이거, 그냥 갑옷에 바르면 되나?”

 “어… 네! 동물 기름과 약초를 배합해서 만든 거라 갑옷이 상할 일도 없어요. 그냥 닦아내면 닦이거든요.”

 “이렇게? … 이거 반응이 좋은데요? 바로 오겠네.”

한세아의 대답을 듣더니 곧바로 덩어리를 갑옷의 배 부분에 으스러트려 문대는 그레이스. 생긴 건 무슨 한약을 키워둔 것처럼 생겼는데 마치 연고나 구두약처럼 갑옷에 착 달라붙는다. 그러더니 그레이스가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는 제 활을 꺼내 든다.

…이걸 한세아가 운이 좋다고 봐야 하나?

 “어, 무슨!?”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어리둥절한 한세아가 황급히 뒤돌아보는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뿔늑대가 고개를 낮게 숙인 채 달려든다. 늑대라기보단 염소나 사슴처럼 뿔로 사람을 들이박겠다는 흉악한 돌격. 한세아의 등허리를 꿰뚫고 척추를 부쉈어야 할 돌격은 당연하게도 내 손아귀에 막혔다.

이러면 전투 훈련은 나중에 해야겠는데.

 “…그거, 진짜 죽었어요?”

 “와, 놀래라.”

마치 카우보이처럼 재빠르게 활을 꺼내 들고 화살을 시위에 매긴 그레이스. 하지만 그녀가 화살을 쏘기도 전에 늑대는 숨이 끊어진 지 오래다. 한세아가 제때 쉴드를 못 쓸까 봐 늑대의 대가리를 양손으로 잡았더니 그 반탄력으로 골이 깨진 것 같네.

다행인 점은 내 손바닥이 늑대의 피와 뇌수 따위로 질척하게 젖지 않았다는 점.

 “그레이스, 나를 믿는 것도 좋지만 다음부터는 한나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말해. 그리고 한나, 당황한 것 치고는 마법이 빨라서 좋았다. 하지만 방금처럼 전위가 막아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쉴드가 아니라 공격 마법을 사용해.”

손아귀 안에서 하급 마석으로 변한 뿔늑대였던 것을 보여주며 약간의 잔소리를 하자 한세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이거, 어, 10층의 보스 몬스터 맞죠? 세상에… 나는 막 움직이는 늑대를 상대로 그레이스 언니랑 협공해서 화살과 마법으로 사냥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근데 이러면 미션은 성공인가? 센세가 잡았어도 일단 우리 파티가 성공한 거니까.”

왜 넋 놓고 있나 했더니, 뿔늑대 관련 시청자 미션이라도 받고 있었나보다.

한세아가 셀 수 없이 다양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정확히는 내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라와 있는 하급 마석을. 고블린이 주는 최하급 마석보다 조금 크고 색이 선명한 마석. 최하급 마석이 불량품 유리구슬처럼 모호한 색상이라면, 이건 명확하게 은은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시청자들에게 미션을 받으며 한눈을 팔다가, 내 고함에 화들짝 놀라 조금 주눅 든 모습. 혼내는 건 이미 끝났고 마법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니 그제야 눈을 끔뻑거리며 헤헤 웃는다. 좀 더 잔소리할까 했지만 쉴드 마법이 엄청 빨랐거든, 막아주지 않았어도 될 정도로.

 “와, 이게 10층의 보스, 였군요….”

 “저층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힘이 과했어. 다른 놈을 찾아봐야겠는걸.”

 “방패로 잘못 막으면 죽는다면서요? 맨손으로 막아도 죽네?”

 “방패의 반탄력보다 내 손아귀 힘이 더 세니까.”

내 스탯이 다른 NPC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현실감은 없었던 한세아. 눈을 껌뻑거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나와 그레이스의 대화를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방패로 막아도 죽는다뇨?”

 “아까 못 들었구나? 지난번에는 방패로 막아낼 때, 살짝 튕기듯 막아내기만 해도 뿔늑대가 목이 부러져서 죽었대. 우리는 일단 부산물부터 챙기자.”

그런 한세아에게 대충 설명을 해 준 뒤 마석을 챙기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산물을 챙기는 그레이스. 그런 두 명을 바라보며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쥐었다 폈다 감각을 확인했다.

분명, 힘을 최대한 빼서 막았는데 왜 죽었을까?

내가 아무리 악력이 뛰어나다 해도 움켜쥐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랑 만난 여자들이 벌써 허리가 부러지거나 팔다리가 온전치 못하게 박살이 났겠지. 단순히 막아 세운 반탄력으로 몬스터의 두개골이 박살이 나는 건 명백하게 비정상적인 일이다.

10년을 굴렀는데 마력으로 하는 육체 강화의 감도 못 잡겠냐고, 내가. 스킬을 사용할 줄은 몰라도 평범한 판타지의 기사처럼 마력을 이용한 육체 강화에는 자신이 있다.

그렇기에 짐작이 가는 건 하나. 그레이스가 아름다운 외모를 받았고, 초보 모험가 중 별이 있는 여자들이 피부 미백 효과를 얻은 것처럼―

 “다 챙겼어요!”

 “그러면, 다시 탐색을 시작하자. 다음 뿔 늑대는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10년 만에, 내 패시브 스킬이 활성화 되었다는 거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롤랑의 스킬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캐릭터의 정보가 사전 공개가 되던 평소와는 달리 [찬란하게 빛나는 6개의 별] 이벤트는 캐릭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모르는 상태로 85만 원 주고 남캐를 뽑은 내가 매크로로 악질 댓글을 도배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남캐인 걸 보고 등장할 때 보여주는 스탯창만 잠시 눈에 담았을 뿐, 스킬창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근데 뭐, RPG 게임의 탱커가 특이할 게 있나. 방어형 캐릭터, 장비는 대형 방패와 철퇴, 스탯은 체력과 방어력이 가장 높으며 나머지 스탯도 상당한 편. 전형적인 체력 돼지형 캐릭터니 방어 스탯 비례 공격 기술이랑 아군 보호기 비슷한 게 있겠지. 설마 체력형 마법사라고 철퇴 들고 메테오를 부르는 일은 없을 거 아니야.

이러면 패시브는 반사뎀인가? 탱커다운 스킬이긴 하네.

 “오늘은 운이 좋네요? 뿔늑대를 바로 찾은 것도 그렇고 뿔늑대의 눈도 바로 나왔어요.”

주섬주섬 부산물을 챙겨 한세아의 인벤토리에 집어넣던 그레이스가 손바닥에서 주먹 크기의 보석을 살살 굴린다. 뿔늑대의 눈알은 체액 질질 흐르는 진짜 눈알이 아닌 마석과 비슷하게 생긴 둥글고 붉은 보석.

뿔늑대 눈을 건네받은 한세아가 인벤토리에 집어넣지 않고 지폐를 확인하듯 위로 추어올려 햇빛에 비춰본다. 발톱과 송곳니도 옥으로 만든 조각처럼 생겼고 가죽도 생가죽이 아니라 담요나 망토로 사용해도 될 물건이니 신기할 수밖에.

 “이게 눈이에요?”

 “맞아, 나도 뿔늑대는 처음이라서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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