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시간으로는 오후쯤 방송을 시작해 한나절 내내 게임을 하다 야밤에 방송과 게임을 종료.
게임 시간으로는 아침에 여관에서 눈을 떠 한나절 내내 게임을 하다 저녁에 여관에서 게임을 종료.
…이거, 탑 오를 순 있나?
탑의 중층부는 가는 데만 며칠이 걸리는 대장정이며 최상층의 통로 탐색은 달 단위로 진행되는 극한의 노숙 생활이다. 그 끔찍한 시간을 1:1 흐름으로 방송한다면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노동에 가깝다. 게임으로 즐길 만한 일은 아니며, 방송으로 송출할 내용은 더욱 아니지.
인벤토리나 미니맵처럼 게이머의 편의를 봐 주는 패치가 잔뜩 생기지 않는 이상 탑 공략은 빠르게 진행되기는커녕 제자리걸음밖에 못 할 것 같은데.
“아침부터 왜 그리 죽상이에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서 사서 와야 할 디저트도 깜빡 했구요?”
“어제 파티원을 구했다니까. 카페는 오늘 가야지, 두 명 다 데리고.”
한세아의 방송 알림과 동시에 채팅창을 켜둔 채 멍하니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있자 엘리스가 슬그머니 찾아온다. 격일 근무라는 널널한 환경에서 꿀을 빠는 주제에 디저트가 늦는다고 투정을 부리는 그녀.
오늘은 내가 디저트를 반드시 사와야 하는 이유라며 어제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다.
“전위 쪽에는 쓸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몇 명 적당한 사람은 있었는데 팔라딘 롤랑과 유망한 마녀에게 붙여주기엔 조금 애매한 사람들이라서. 사제 쪽도 아직 탑으로 고행을 자처하는 사람이 없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고. 대신 궁수 쪽에서 꽤 유능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하필 궁수야?”
“사냥꾼 출신인데 탑 밖의 모험가들이랑 좀 떠돌아다니던 사람인 것 같았어요. 혼자 탑의 7층까지 돌아다니며 소재 수집 의뢰를 완료할 정도로 유능했는데….”
“그래, 알았어. 부탁해 놓고선 멋대로 파티원 구해와서 미안해.”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축축 늘어트리는 엘리스에게 양손을 들어 올리고 항복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말은 이렇게 장난스럽게 해도 민폐는 민폐였을 테니까.
아마 7층 레인져는 엘리스가 미리 눈여겨보던 인재였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에게 파티에 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겠지만… 한창 설득하고 있던 와중 이미 레인져를 구해버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좀 짜증이 나겠지.
“그나저나 그런 예쁜 아가씨는 어디서 데려오는 거예요? 나중에 모험가 접수원 후배도 몇 명 구해줘요.”
“내가 데려온 게 아니야, 그녀가 날 찾아온 거지.”
그렇게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모험가 길드의 문이 열리고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들어온다. 엘리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하고 빈 테이블에 앉아 그녀들을 부르니 대화를 나누며 들어온 두 사람이 내 앞에 나란히 착석한다.
어젯밤 있었던 일은 한밤의 꿈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레이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변했다.
“그 갑옷, 돈 좀 들었겠는데.”
“마을에서 나올 때 모아둔 자금을 다 써서 맞춘 장비예요.”
한세아의 것처럼 통짜였던 그레이스의 밋밋한 가죽 갑옷이 여성성을 강조하는 잘록한 맞춤형 갑옷이 되었다는 점. 몸매를 가리는 대신 잘록하게 조여진 허리와 불룩 튀어나온 가슴 부분이 마치 중력처럼 사람의 시선을 잡아 이끈다.
어쩐지 잠깐 본 채팅창에 ‘눈나가 아니라 마망’ 이라는 개소리가 도배되어 있더라니.
“아쉽게도 전위와 사제는 구해지지 않았어. 그러니 임시 전위를 내가 담당하고 5층에서 손발을 맞춰본 뒤 10층까지 곧바로 올라간다.”
“10층이요?”
“네, 알겠어요.”
내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와 화들짝 놀라 되묻는 한세아. 1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10층으로 훅훅 뛰어버리니 탑의 사정을 모르는 초보자는 놀랄 수밖에. 그런 한세아의 옆에 착 달라붙은 그레이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11층부터라면 몰라도, 1층부터 10층까지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층계가 높아질수록 몬스터가 강해지는 건 맞지만 뿔토끼와 뿔여우 정도는 강해져 봐야 조금 덩치가 커지고 마니까. 등장하는 고블린도 비실비실한 건 마찬가지고.”
“그래서 10층까지만 가는 거야?”
“맞아. 10층에서는 돈이 좀 되는 녀석이 나오니까.”
테이블에 착 달라붙어 앉아서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두 명. 역시나 같은 초보 모험가라 해도 그레이스는 저층에서의 경험이 좀 있어서 그런지 잘 알고 있네.
“탑은 10층마다 특별한 몬스터가 나와. 같은 계층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데다, 사냥하면 마석이 아니라 다른 부산물도 남기고 사라지는 녀석이지.”
쉽게 말해 보스 몬스터다. 10층에서 초원의 보스 뿔늑대를 잡으면 11층부터는 초원이 아니라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20층에서 숲의 보스 오크 사냥꾼을 잡으면 21층부터는 동굴이 시작되는 방식.
“전위를 내가 맡는다면 우리 파티 수준으론 뿔늑대를 사냥하러 가는 게 맞아. 물론 곧바로 갈 건 아니고, 저층의 다양한 의뢰를 경험한 뒤 뿔늑대를 사냥한다.”
“뿔늑대면, 뿔토끼나 뿔여우처럼 늑대한테 뿔이 달려 있나요?”
“맞아. 물론 뿔여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지.”
판타지 세상에 와서야 알았지만, 늑대는 크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늑대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뿔늑대는 보스 몬스터라 그런지 더욱 커다란 편.
인터넷에서 봤던 늑대 실물 사진.GIF 이런 자료에서 본 늑대는 딱 사람보다 큰 수준이었다. 두 발로 서면 사람보다 크고 늑대 머리통도 사람 두, 세배는 될 크기. 보스 몬스터인 뿔늑대는 그런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더 커다랗고.
“뿔여우와는 달리 뿔늑대의 뿔은 가죽 갑옷도 뚫어. 덩치가 큰 만큼 아가리도 커서 방패 사용에 미숙한 녀석이 소형 방패를 어중간하게 쓰다간 방패와 팔을 통째로 씹어 먹혀버린다. 9층까지는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10층에서는 무조건 파티를 유지한 채 돌아다녀야 하는 이유야.”
물론 가죽 갑옷을 뚫는다고 해도 강철 갑옷까지 뚫는 건 아니다. 저층에서의 의뢰를 통해 저금을 모아 강철 갑옷과 방패를 맞춰 10층에 도전하는 게 정석적인 모험가의 성장.
나야 강철 갑옷과는 비교도 안 될 가챠 캐릭터용 장비가 있으니 모험과 의뢰로 번 돈은 전부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장비에 투자하면 되겠네. 장비를 살 때 몰래 보태주는 일이라면 몰라, 시작부터 중급 모험가용 장비를 둘둘 두르고 시작하면 좀 그렇지.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고 의뢰를 한번 보자고.”
테이블에서 일어나 구석의 의뢰 게시판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지런한 모험가들이 쉽고 돈 되는 일을 싹 쓸어가 조금은 휑하게 보이는 게시판. 두 사람에게 읽어보라는 듯 게시판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기다려 줬다.
탑에는 두 번 들어가 봤지만, 의뢰는 처음 보는 한세아. 그런 한세아의 옆에 또다시 그레이스가 착 달라붙어 상냥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게시판을 찍다 말고 두 사람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는 걸 보면 채팅창은 안 봐도 뻔한 상태겠네.
“초원에 있는 의뢰 대부분은 약초 관련이야. 딱 봐도 풀밖에 없는 동네니까 어쩔 수 없지. 연고나 화장품, 마법 시약용 재료로 사용되지만, 초원이 넓고 초보 모험가가 많은 만큼 보수는 저렴해. 그래서 의뢰는 여러 개를 한 번에 받아두는 게 좋아. 특히 너는 그, 인벤토리? 라는 마법이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 여러 개를 받는 게 좋아?”
“이건 약초학을 조금 알아야 하는 건데…, 황금억새는 솜뭉치풀과 자생지가 겹쳐 있는 경우가 많지. 그리고 황금억새가 우거진 곳에는 뿔토끼가 자주 숨어 있어서 최하급 마석을 추가로 얻을 수 있는 경우도 많고.”
전직 레인져 겸 사냥꾼인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았다더니 약초도 대충은 알고 있는 건가.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약초 관련 의뢰를 받아 돌아다니고 있었지. 그렇게 설명을 하던 그녀가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한세아의 어깨너머로 슬쩍 눈웃음을 보낸다.
어젯밤과는 달리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 드론에 찍히는 각도로.
그레이스의 외모는 원화 팀이 온 힘을 기울여 빚어낸 걸작이었다. 외모를 가꾸기는커녕 씻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화전민 마을의 꼬맹이가 이렇게 자랄 수 있나 의심이 되는 아름다움. 그런 미녀가 살살 눈웃음을 흘리는데 이에 시청자들이 반응을 안 할 리 없지.
그 때문인지 의뢰를 받아 탑으로 향하는 중 한세아의 입이 쉬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시청자들과 떠들고 있었다.
“그레이스 언니가 롤랑 센세 꼬시고 있다고? 둘 다 선남선녀라 어울리긴 해. 그리고 매니저, 저기 저 NTR 뭐시기 드립친 놈 밴 해주시고. 그레이스 언니랑 친해져서 기분 되게 좋으니까 괜히 칼춤 추게 만들지 마라.”
한세아가 남자 플레이어였다면 조금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섹시한 NPC보다는 탑 등반에 도움이 되는 NPC에 관심이 많은 공략러. 카메라의 존재를 모른 채 내게 살금살금 신호를 보내는 그레이스를 그런갑다~ 하고 넘기고 있었다.
하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만난 지 3일도 안 된 가상 현실 게임 속 NPC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와 그레이스의 오묘한 분위기보단 10층에서 잡을 뿔늑대에 대한 생각밖에 없을 거다.
“아니 뭔, 결혼해서 은퇴 엔딩 드립이야. 6★ NPC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면 유저들 모아서 비비게임즈 본사 앞에서 텐트촌 만드는 거지.”
이쯤 되면 채팅창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하지만, 카메라 드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한세아보단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온 그레이스가 더 신경 쓰인다. 어젯밤에는 용기를 내기 위해 술에 취한 척 다가오더니 오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파티원으로서 행동하는 그녀.
하기야, 눈웃음 정도가 아니라 직접 팔짱을 끼는 등 대놓고 달라붙으면 되레 곤란한 건 내 쪽이지. 그레이스 정도 되는 미녀가 몇 년 전에 한 번 구해줬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사랑을 키워 온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10년 만에 시작된 퀘스트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너무 쓰레기 같은 생각인가. 하긴, 꼬시면 넘어가서 여러 여자랑 잔 주제에 깨끗한 척 하는 건 좀 웃기지.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요?”
“뿔늑대를 잡을 때 어느 정도로 막아줘야 할지 계산 중이야.”
“그런 것도 계산해야 해요?”
“힘을 잘못 줘서 막으면 위험하거든.”
“…뿔늑대가 그렇게 강해요?”
“아니, 뿔늑대가 위험해. 지난번에 만난 놈이 뿔로 찌를 때 방패로 밀어냈는데, 힘을 잘못 줘서 뿔이랑 목이 부러졌거든.”
만렙 전사가 초보자를 위해 튜토리얼 존 보스 몬스터 앞에서 탱킹을 하는 상황이다. 스킬은커녕 평타도 잘못 때리면 보스가 픽 쓰러져 죽을 수 있다고. 내 대답은 상상하지도 못했는지 잠시 발걸음이 멈추는 그레이스.
감탄사 비슷한 무언가를 내뱉는 것인지 입술을 달싹거린 그녀가 슬쩍 내 팔뚝을 터치하고 다시 뒤로 살짝 빠져 한세아의 곁으로 향한다.
“한나, 무슨 생각을 하느라 뒤에 따로 빠졌어? 그 인벤토리 정리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