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75)

어둑한 골목에서 요사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훑는다. 감은 듯 보이는 얄팍한 실눈 사이로 보이는 연한 갈색 눈동자. 술기운에 취했다기엔 너무나도 또렷한 시선이 나를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걸 여자 입으로 굳이 말해야 해요?”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에서 맛 좋은 식사를 즐긴 뒤 헤어진 우리. 한세아는 로그아웃을 위해서인지 곧바로 열쇠를 챙겨 숙소로 올라갔지만, 그레이스는 달랐다. 아까 전 이야기를 나눴던 여종업원이 내게 다가오자 취한 척 내 품에 안겨 여관 밖까지 나를 밀어내듯 데리고 나왔으니까.

억울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짓씹는 종업원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품에 안긴 그녀. 놈팽이 여관을 숙소로 잡아 줬으니 저 여종업원을 계속 마주칠 텐데 망설임도 없는 모습이 여러모로 대단해 보인다.

 “으음… 상급 모험가의 숙소가 조금 궁금해졌다고 하죠.”

밋밋한 가죽 갑옷으로도 미처 억압하지 못했던 커다란 가슴이 팔뚝을 꾸욱 꾹 눌러댄다. 장식 따위 하나 없는 밋밋한 싸구려 천 옷이 저렇게 여성의 매력을 담아낼 수 있는 옷이었나 놀랄 정도.

어둑해진 거리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만 남았다. 술 냄새 가득 풍기며 비틀거리는 남자 모험가들과 거기에 착 달라붙어 있는 창녀들. 한세아가 이 게임 세상에 접속했다 해도 원래 있던 창녀가 사라지는 일은 없네.

 “이래 보여도 꽤 용기를 낸 건데, 언제까지 거리만 돌아다닐 생각인가요.”

이런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다. 워낙 잘생긴 얼굴이다 보니 죽음의 위기를 겪어 스트레스가 가득한 여자 모험가부터 의뢰를 핑계로 나를 부른 미망인과 귀부인까지 다양한 여자들을 겪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그녀의 눈이었다. 내 외모와 육체를 보고 욕망에 불타는 끈적한 눈빛이라기보단, 그리움에 가득 차 있는 기쁨의 눈빛. 판타지 세상에서 전사로서 10년간 굴러 살의와 악의 따위를 읽을 수 있게 된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녀는 분명 내가 처음 보는 3★ 캐릭터. 그런데 어째서 나를 저토록 애틋하게 바라보는 걸까.

 “…우리, 초면이 아닌 건가?”

 “어머? 여자 꼬시는 멘트는 조금 구식이네요.”

 “아니, 하….”

내 질문은 능글맞게 넘겨버리는 그레이스. 얇은 눈꼬리가 스윽 휘며 얄밉게 휘어 보이니 마치 여우처럼 보인다. 회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얇은 눈매까지 회색 여우를 모티브 삼아 만든 캐릭터라 해도 믿겠네.

그레이스가 내게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해도 달빛 아래서 멍청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재촉하듯 팔뚝을 꾹꾹 짓누르는 그 풍만한 감촉과 올라온 술기운에 못 이겨 나는 내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오면, 장난이 아니게 되어버리는데. 감당되겠어?”

 “장난이라뇨? 저는 처음부터 진지했는데.”

 “아니, 이걸 감당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나는 숙소까지 천천히 걸으며 내게 착 달라붙어 있는 그레이스를 분석했다. 그녀를 적대시한다던가, 암살자라고 오해한다던가, 꿍꿍이를 내뱉으라며 공격하려는 건 아니고―

 “상급 모험가의 육체를 너무 얕보는 것 같은데, 숫처녀가 감당하기엔 힘들 수도 있어.”

수많은 여성을 겪어 온 남성으로서, 오늘 밤 나를 즐겁게 해 줄 여자를 분석한 것이다.

술에 취한 척 품 안에 안겨 오는 것까지는 참으로 능숙했다. 그런 쪽 업계의 프로인 종업원이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곧바로 포기할 정도로 능숙했지. 팔을 휘감고 가슴으로 짓눌러 걸음을 유도하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느리게 걷는 탓에 십여 분간 밤바람을 만끽하는 동안 그 이상의 터치가 없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성에 굶주린 미망인이나 유부녀들은 내 근육과 허벅지를 미친 듯 더듬다 자연스럽게 아래쪽이 얼마나 튼실한지 확인까지 해 보거든.

품 안에 안긴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이후 가슴팍을 쓰다듬는 손길 따위 없었다. 팔짱을 끼며 가슴을 밀어붙이긴 했지만, 팔뚝을 붙잡은 손이 그대로 내 팔꿈치와 팔오금에 얌전히 놓여 있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는 딱 하나.

 “후후, 힘들다뇨, 오….”

내 팔뚝 위에 곱게 올려진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허벅지 쪽으로 보낸다. 긴장한 듯 움찔거리는 손가락이 거부는 하지 않고 얌전하게 내 인도를 따라가야 할 곳으로 향한다. 바지 위로도 알 수밖에 없는 묵직한 감각.

 “오, 어엇―”

손아귀에 쥐어진 현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벌어지는 자그마한 입술. 벌벌 떨리는 손이 슬그머니 힘을 줘 크기를 재단해보려 하지만 되려 손길에 반응해 껄떡거리니 화들짝 놀라 손을 떼버린다.

자지가 꿈틀거렸다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 버리다니, 어딜 봐도 남자를 모르는 숫처녀 맞네.

그 얄팍한 눈매가 휘둥그레 커진 모습이 꽤 귀엽네. 속내가 뭐든 간에 여기까지 왔으면 물러설 순 없지. 발걸음을 멈춘 그레이스의 등허리에 팔을 휘감고 아랫배 부분에 손바닥을 덮듯이 올려 이끌었다.

 “물론 감당 못 한다 해도 놔주지 않을 거지만. 파티원 신고식, 거하게 하겠네.”

 “…….”

허세가 들켜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는 그레이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뽀얀 귀가 어둑한 골목 사이에서도 보일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배 위에 올린 손바닥에 느껴질 정도로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 박동.

건물로 들어가 숙소의 문을 열고 마석 키로 전등을 켜니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인제 와서야 깨달은 건데, 마석 키로 숙소의 마도구를 활성화하는 이거… 모텔 아닌가?

 “후우우― 하아….”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품 안에서 빠져나온 그레이스가 자연스럽게 욕실로 쏙 들어간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뭔가 알 수 없는 다짐을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침대에 앉아 옷을 벗었다.

대충 벗어 던진 셔츠 아래로 드러난 잘 갈라진 조각상 같은 근육. 얇은 천 속옷으로는 미처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우뚝 솟은 자지. 욕실 쪽으로 몸을 활짝 드러낸 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으니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린다.

 “그래요, 나, 꺄악!”

 “음? 뭐라고?”

욕실 안에서 마음을 다잡았는지 머리카락 정도만 단정하게 다듬고 나온 그녀. 하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래로 주욱 내려가 자기가 만졌던 녀석의 크기를 대충 확인한 뒤 휙! 하고 다시 올라간다.

 “아니, 왜 벗, 벗고 있어요?”

 “벗겨주길 기다리기엔 밤이 너무 짧으니까.”

씨익 웃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그녀. 경력이 조금 있다 해도 아직은 초보 모험가인 그녀에게 탱커가 무엇인지 몸소 알려 줘야겠네. 허를 찌르고 상대를 당황하게 해 전투의 흐름을 내 마음대로 가져오는 것. 그것이 모험가 업계에서 유명한 ‘팔라딘’ 롤랑.

 “욕실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야?”

 “그, 초면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레이스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조각상.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신장 차이에 떡 벌어진 가슴은 갑옷과도 같다. 속옷 한 장 덜렁 걸치고 있는 육체에 위압감이라도 느끼는지 능글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그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은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말해주려 한다.

하지만 지금 그딴 건 알 바 아니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욕실로 다시 들어가려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선다. 코앞에 들이 밀어진 넓적한 가슴 근육에 뺨을 붉힌 그녀가 고개를 숙이지만, 고개를 숙이면 보이는 건 속옷을 밀어내다 못해 찢어버릴 기세의 자지. 고개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그녀에게 손을 뻗어 그대로 들어 올린다.

 “앗, 잠까안―”

술집에 올 때부터 가볍게 씻고 나왔는지 땀 냄새 대신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그녀. 초보 모험가의 수입으로는 큰마음 먹고 구매했을 입욕제의 달큼한 향기에 별로 있지도 않은 인내심의 끈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팔뚝에 느껴지는 말캉한 허벅지의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를 향해 직진. 공주님 안기로 들려진 게 부끄러운지 잠시 팔이 버둥거렸지만, 팔을 버둥거릴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을 핥듯이 노려보자 얌전히 가슴 앞에 손이 모인다.

 “내, 내가 왜 파티에 들어오려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침대에 눕혀지자 여유로운 척을 하기 위한 일말의 평정심도 사라졌는지 존댓말조차 멈춰버린 그레이스. 그녀의 필사적인 대화 시도를 무시한 채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가죽 갑옷조차 억압하지 못한 커다란 모성의 상징.

선크림 따위 없는 중세 시대에서 레인져 훈련을 받은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뽀얀 피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단추가 하나하나 풀릴 때마다 드러나는 깊고 깊은 가슴골. 얼굴을 파묻는다면 질식도 가능할 것 같은 깊은 가슴골이 내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린다.

그 풍만한 가슴골을 지나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손길. 툭툭 단추 빠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레이스가 움찔거리고, 그 움찔거리는 미세한 몸짓에 셔츠가 흐트러지며 양옆으로 벌어진다. 밑가슴이 드러나고 뽀얀 배와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이 보일 때까지.

 “예쁘네, 정말.”

 “아, 진짜… 이렇게 멋대로일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몸으로 유혹하는 데 어떤 남자가 참을 수 있겠어.”

 “몇 명의 여자들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거야?”

 “지금은, 너 하나지.”

불쾌한 체취를 가리기 위해서 뿌려진 독한 향수 냄새 대신 은은하게 풍기는 입욕제 냄새와 그 향기로도 가려지지 않는 달큼한 살 내음. 등허리 아래로 손을 슬쩍 집어넣으며 그대로 배에 입을 맞추자 허벅지가 오므라들며 바르르 떨린다.

그렇게 움찔거리는 틈을 타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기다란 치마까지 스윽 아래로 당겨버렸다. 6★의 스탯 덕이라 해야 할지, 한 손으로도 여자를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으니 이럴 땐 편하더라고.

경험 없는 숫처녀인 만큼 치마를 벗기기 쉽도록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주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그 정도의 높이는 손목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거든.

 “어릴 적 만났을 땐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제 치마가 홀랑 벗겨진 걸 뒤늦게 눈치챘는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그녀. 얼굴을 가렸다 해도 이미 새하얀 속옷은 전부 드러난 상태라 자지가 아플 정도로 발기되었다. 중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브래지어. 가끔 보이는 치킨 닮은 음식처럼 이 또한 플레이어를 위해 준비된 디자인일까.

미묘한 곳에서 현대적이란 말이지… 게임 속 세상이라 그렇지만.

물론 게임 속 세상이라 해도 내 감각이 가짜인 건 아니다. 피 튀기는 전투도 진짜였고, 나를 덮치던 여자 모험가도 진짜였고, 의뢰를 핑계 삼아 날 침실로 끌어들인 귀부인들도 진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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