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75)

초보 모험가들의 처참한 일상부터 시작해 그레이스가 만난 진상들 썰까지. 재능 있는 플레이어, 기본이 충실한 3★ 궁수, 깡스탯이 미쳐 날뛰는 6★ 탱커. 탑의 1층이 안방처럼 안락하고 안전한 조합의 우리는 별다른 위기 없이 초원을 헤쳐나갔다.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오늘은 3층에서 멈춘다.”

 “네?”

 “슬슬 바깥에서는 해가 질 것 같은데 상점 거리에 갈 곳이 있거든. 그리고 저녁은 새 동료가 생긴 기념으로 밖에서 먹자고.”

탑의 입구처럼 초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석제 아치문. 사다리 밑을 통과하듯 텅 비어있는 아치 아래로 들어가면 시야가 어그러지며 다음 층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게 퍽 신기했는지 아치를 툭툭 건드리며 랜턴을 확인하는 한세아와 그런 한세아를 또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그레이스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슬슬 카페에 가서 호화스러운 디저트 세트를 건네주지 않으면 엘리스가 삐질 테니까. 사랑을 나누는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먼저 친절하게 다가와서는 길드 내부에서의 일마다 편의를 봐 주는 고참 접수원의 비위는 맞춰주는 게 인생에 이롭다. 고작 디저트 몇 개로 인맥을 만들고 귀찮은 서류 업무가 프리 패스 되면 무조건 남는 장사지.

 “후훗, 상급 모험가가 사 주는 밥이라니. 모험가 생활도 오래 하고 볼 일이네요.”

 “오래 하다니, 누가?”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긴 하네요. 무려 10년 차 베테랑이 파티에 있으니까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다시 3층에서 1층으로 향하는 여정. 마법 실력도 탐색 능력도 전부 증명되었으니 귀찮게 고블린을 추적하는 일 없이 모험가의 패를 확인하며 출구로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다시 도착한 1층.

 “여기선 잠시 헤어져야겠네요. 탑 입구에서 만날까요?”

 “탑 입구는 번잡할 테니 모험가 길드에서 만나자고. 파티원 모집해둔 것 중에서 궁수는 구했다고 말해 놔야지.”

내 말이 일종의 확답이라고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어 보인 그레이스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더니 초원 저 너머로 걸어 나간다. 그 뒷모습을 보던 한세아가 몸을 홱 틀어 성큼성큼 초원을 걷기 시작한다. 마치 삐졌다고 시위하는 어린이 같은 뒷모습. 물론 그 삐짐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시청자들이 아주 짓궂더라고.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레이스는 전형적인 글래머 미인이었다. 한세아가 가죽 갑옷을 입어도 여성스러운 곡선이 드러나는 몸매라면, 그레이스는 가죽 갑옷으로도 미처 모성의 상징을 숨길 수 없는 수준. 시청자들이 보자마자 궁수‘눈나’ 라며 헤헤 떠받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 몸매 좋은 두 사람이 착 달라붙어 대화를 계속 나누니 시청자들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파티 모집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비키니 아머 여전사와 큿죽여라 여기사 이야기로 도배된 놈들이니 가슴 이야기를 안 하는 게 이상하지. 리얼리티에 전투 장면까지 있어서 그런지 방송 자체가 19금으로 분류된 건가 싶을 정도로 어질어질한 채팅이었다.

 “한나 양, 술은 좀 할 줄 알지?”

 “그럼요! 어린애 취급하시는 건 아니죠!?”

이거 봐, 엄청 신경 쓰고 있네.

손때 묻은 테이블과 시끄럽게 떠드는 모험가들. 음식 쟁반을 들고 바쁘게 오가는 여종업원들과 그 잘록한 등허리와 빵빵한 엉덩이를 노리다 찰싹 소리가 나도록 얻어맞는 털북숭이들의 손등들. 그 난장판 속에서도 값비싼 마도구 덕에 현대의 식당처럼 청결이 유지되는 기묘한 모양새.

 “어서 오세요! 운수 좋은 놈팽이들에!”

마리앙 아줌마의 여관이 노가다판 아저씨들이 가득한 국밥집의 느낌이라면 이 놈팽이 여관은 식당보다는 대학로의 술집이나 카바레에 가깝다. 카바레는 가본 적 없고 영화에서나 봤지만,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외치며 반갑게 인사하는 미녀 여종업원부터 바쁘게 맥주를 나르는 여종업원까지 미녀가 아닌 사람이 없었거든.

길드의 접수원처럼 눈에 번쩍 뜨이는 미녀는 아니지만, 청결을 유지하고 단정하게 화장까지 한 종업원들. 청결이 유지되는 1층의 식당과 값싼 생활용 마도구가 준비되어 있는 2층의 숙소, 양에 비해 양심이 없는 가격과 그래도 가격만큼의 맛을 자랑하는 음식.

 “몇 분이실까요?”

 “식사는 세 명, 숙소는 두 명!”

명백하게 길드의 제복을 따라 만든 것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여자에게 크게 외쳐주며 대놓고 드러난 가슴골 위에 금화 한 장을 찰싹 붙여준다. 모험가가 가득한 이 거리에서 금화 한 장은 일종의 명함과도 같으니까.

중급 모험가까지는 금화를 벌 순 있어도 술값이나 유흥 값으로 금화를 팁으로 턱 내밀 정도는 아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내밀어지는 금화가 뜻하는 건 일종의 신분 증명. 식당에 들어가서 여종업원에게 상급 모험가 패를 들이미는 건 모양새가 안 살잖아. 내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 거리에 있는 일종의 문화였다.

아직 한세아도 그레이스도 합류하지 않았으니 추파 정도는 던져도 되겠지. 이런 세상에 이런 외모로 살아가는 사내놈이 순결을 유지할 이유도 없고. 내 외모를 보고 눈을 빛내던 종업원이 가슴골의 금화를 보고 도톰한 입술을 혀로 삭삭 훑는다.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일행은, 여성분?”

 “여자 둘은 숙소에 두고 갈 거야.”

 “헤에, 그렇구나.”

갑옷을 다 벗고 셔츠만 간단히 챙겨 입고 나온 나와 다르게 신경 쓸 거라도 있는지 조금 늦는 두 여자. 덕분에 종업원에게 가게가 끝나는 시간 정보까지 듣고 테이블에 잠시 앉아 있으니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보인다.

 “이쪽!”

팔을 번쩍 들고 부르니 아쉬워하듯 혀 차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린다. 나처럼 두 사람 다 갑옷을 벗고 평상복인 천 옷을 입은 상태. 그 때문에 여성스러운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은 머리카락의 이국적이고 활발한 미녀가 여성스러운 곡선을 자랑하며 뚜벅뚜벅 걸어오고, 회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출렁거리는 커다란 가슴을―

좀 많이 큰데?

궁수가 아니라 성녀에 어울릴 것 같은 모성의 상징이 술에 잔뜩 취한 남정네들의 시선에 노출되었으니 음흉한 시선이 날아드는 건 당연한 이야기. 진득한 시선을 무시한 채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두 사람이 앉는다.

 “여관 이름이 왜 운수 좋은 놈팽이에요? 그건 그레이스 언니도 모르더라고요.”

 “내가 탑에는 자주 들어갔는데 이런 곳은 잘 몰라서.”

오는 길에 만나서 수다라도 떨었는지 어느새 친해져 있는 두 사람. 분명 1시간 전까지는 서로를 한나 양, 그레이스 양 이렇게 부르더니 지금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같은 파티가 되었다는 친밀감 때문이려나.

그레이스가 탑에서는 한세아보다 숙련된 모습을 보여줬다 해도 이런 여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가슴골 까고 다니는 글래머 여종업원에, 청결을 유지하는 마도구만 봐도 여기가 어떤 가게인지는 명확하니까. 여관의 탈을 쓴 채 대놓고 남자 모험가를 노리는 가게니까 아는 게 이상하지.

 “말 그대로, 탑에서 운수 좋은 놈팽이들이 오는 곳이니까.”

 “운수가 좋다뇨?”

 “안 죽고 중급 모험가가 된 놈들, 그리고 초보 모험가 주제에 희귀 소재를 얻어 한탕 친 녀석들이 오는 가게거든!”

여기 있는 여종업원들을 꾀는 방법은 간단하다. 두둑한 팁과 곁들여진 무용담만 있으면 옆에 착 달라붙어 있어 주는 곳. 물론 홍등가처럼 여자의 몸만 파는 곳은 아니다. 운 좋은 놈이 회포를 풀 정도로 고급스러운 음식을 파는 곳이기도 하니까.

잡탕 스튜나 물 탄 맥주 따위가 아니라, 왕국 수도에서 이름 좀 날린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상단이 인증한 명품 주류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고급 음식점. 가장 싼 메뉴가 동전이 아니라 은화 단위기 때문에 어지간히 운 좋은 놈이 아니면 초급 모험가는 발도 못 들이는 장소다. 거기에 손등을 찰싹찰싹 얻어맞는 저 모험가들. 돈은 있지만, 모험담이 없어 거절당하는 중이기도 하고.

 “많이 비싸요?”

 “네가 먹을 스테이크의 가격이 고블린 350마리 정도 될 거야.”

 “히엑?!”

저층의 최하급 마석과 약초 탐색 의뢰로 번 돈에서 숙박비, 식비, 장비 수리비 따위를 제거하면 꿈도 못 꿀 호화스러운 식사. 그러므로 이 가게에 온 손님은 두 종류의 놈팽이다. 초보 모험가 주제에 큰돈이 생겨 목숨을 건 혈투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온 행운아. 아니면 탑에 꾸준히 들어갔으면서도 죽지 않고 초보 모험가에서 중급까지 올라간 행운아.

실력도 실력이지만 탑에서 안 죽고 활약하는 걸 운이라 생각하는 게 전반적인 모험가들의 사고방식. 몬스터가 워낙 랜덤으로 튀어나오니 운빨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이런 몸이 아니었으면 동굴 구석에 처박혀있는 시체가 되었을 테니까.

 “물론 초보 모험가한테나 비싼 거지, 중급 모험가쯤 되면 달에 한두 번은 올 수 있을 정도야.”

 “그 정도로 수익 차이가 큰가요?”

 “초보 모험가는 넘쳐나는 만큼 최하급 마석도 넘쳐나지만, 중급 모험가부터는 머릿수가 확 줄어드니까. 하급과 중급 마석은 둘째 치고 중층에서의 연금술 재료나 약초 따위는 보수의 자릿수가 달라진다고.”

그레이스의 파티가 받은 의뢰가 약초 탐색으로 초원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뿌리는 건드리지 않고 캐서 길드에 제출하는 초보자 전용 퀘스트라 볼 수 있다. 자생지 몇 개를 돌며 사람 머리통 크기의 자루 하나를 채워도 동전 스무 개 정도를 받는다.

하지만 중급 모험가가 받는 숲의 소재 채집 임무는 보상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은화 2개. 동전 100개가 은화 1개라는, 게임식 100:1 환전 단위를 생각해보면 비슷한 의뢰라 해도 보상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오늘의 운 좋은 놈팽이지. 상급 모험가가 사 주는 밥을 얻어먹는 초보 모험가, 어디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아! 그리고 숙소도 잡아놨으니 여기서 생활하면 돼.”

 “숙소까지요?”

내 말에 그레이스가 조금 당황한 듯 되묻는다. 한 끼 거하게 얻어먹는 것과 숙박비를 받는 건 느낌이 좀 다르긴 하지. 하지만 이런 호의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금화부터 팬에게 준 망치까지 이어진 입소문 문제.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 팔라딘 롤랑이 파티를 짠 초보 모험가를 어디 마구간보다 못한 하급 여관에 머물게 하더라~ 같은 소문이 퍼지면 골이 아프거든.

같은 모험가들끼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내 호화스럽고 안락한 삶을 책임져주는 물주들은 대부분 귀족. 귀족들은 모험가들을 천대하는 면모도 있지만, 반대로 낭만을 추구하는 이야기 속 존재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많다.

 “상급 모험가가 자기 파티원, 그것도 이런 미녀들을 이상한데서 재우면 남들이 욕해. 그러니까 건방지게 초급 모험가 주제에 상급 모험가가 주는 지원을 거부하지 말라고.”

 “미녀라니… 몬스터 말고 여심도 공략하시나?”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며 규정되지 않은 미지의 장소를 탐색하는 낭만 넘치는 칼잡이들. 대충 그런 마인드로 모험가를 대하기 때문에 호방하고 호쾌하고 손 크고 정의로운, 대충 그런 이미지를 유지해야 좋은 의뢰가 들어온다.

몇몇 모험가들은 굽실거린다느니, 푸른 피에게 아부한다느니 욕하지만 뭐 어때. 금화를 턱턱 내놓고 예비 무기를 선물해도 결국 돌아오는 이득이 더 큰데. 내 말에 모험가 업계를 대충 아는 그레이스가 내 말뜻을 이해하고 농담으로 받아쳐 준다.

한세아는 뭐… 이해를 했다기보단 스탯도 빵빵한 데 지갑도 빵빵한 물주를 만나 행복해할 뿐 거절할 마음도 없어 보였고.

 “아무튼, 한나 양과 그레이스 양,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미지근한 싸구려 맥주와 달리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 중세의 맥주를 원래 차갑게 먹던가? 따위의 의문은 접어둔 채 잔을 들어 올리자 두 사람도 기세 좋게 잔을 들어 올린다. 꽤 커다란 한세아와 그보다 더 커다란 그레이스의 훌륭한 기세가 주변 모험가들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끌지만 벌써 분위기에 취한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

탁! 소리가 나게 나무 잔이 맞부딪치고 그 여파로 새하얀 거품이 테이블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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