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75)

 “위층으로 올라간다 했으니 가는 길에 몬스터의 흔적이 있다면 알려드릴게요.”

 “몬스터의 흔적이요?”

내가 말없이 채팅창을 보는 사이, 통성명을 마친 두 사람이 어찌 움직일지 정하기 시작했다. 한세아가 탑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보니 조금이라도 경력이 더 많은 그레이스가 그녀에게 설명을 해 주는 식으로.

 “탑에서는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나는 거, 알죠? 바깥 놈들은 둥지를 만들거나 굴을 파서 번식하는데, 탑에서는 그냥 나타나요.”

 “네, 그건 아는데요.”

 “그러다 보니 탑의 몬스터는 제 보금자리가 없어요. 갑자기 등장해서는 정처 없이 헤맬 뿐이죠. 파티의 탐색꾼들은 그 흔적을 보고 몬스터를 찾아내요. 몬스터가 등장하기를 바라면서 탑을 헤매는 것보다는, 발자국 따위를 보고 추적하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요.”

그레이스의 친절한 설명에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첫날, 몬스터를 만나겠다고 미니맵을 보며 출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닌 경험이 있으니 탐색꾼의 중요성을 알 수밖에 없지. 그나마 초원은 탁 트여 있기라도 하지, 시야가 제한되는 탑의 위쪽에서는 마법사만큼 탐색꾼도 중요하다.

울창한 나무가 가득한 숲이라던가 라이트 마법이 없으면 앞도 안 보이는 동굴 층계에서 흔적 없이 싸돌아다니면 돈을 벌기는커녕 장비 수리비로 적자를 볼 수 있으니까. 저층에서밖에 활동해본 적 없는 초짜 레인저가 이제 탑 입장 2회차 뉴비 마법사를 열심히 지도하는 모습. 두 사람 다 미녀여서 그런지 보기에 참 좋다.

…내 팬들, 중급 모험가쯤 돼서 나를 돕겠다고 가끔 목소리를 모으거나 술 한 잔 사 주는 것까진 좋은데 근육질 털보 아저씨가 대부분이란 말이지. 모험가라는 게 애초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직업이다 보니 남자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씻을 돈으로 술을 더 마시겠다는 시커먼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있다가 미녀 두 명이 오순도순 하하호호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면, 제가 앞장설게요.”

 “네!”

그렇게 말한 그레이스가 내 쪽을 흘깃 바라보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방향은 당연하게도 전 파티원들과 다른 방향. 여검사 코라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있긴 한지 제 허리춤에서 랜턴을 꺼내 들고 방향을 확인하는 모습이 한세아보다 퍽 노련해 보인다.

전생의 어디 인터넷 잡지식 같은 데서 봤는데, 사람이란 게 직진을 못 한다더라. 사막 같은 데서 조난하면 빙빙 헤매다 조난 시작 지역 근처에서 발견된다고 했던가. 정확한 지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었다.

랜턴,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직진했다고 생각했는데 슬쩍 방향이 바뀌어 있었으니까. 현실에서 몸을 움직이는 건 화살표 키를 눌러 게임 캐릭터를 올곧게 전진시키는 것과 달라서 말이야.

 “고블린의 흔적은 없고 뿔여우는 있네요. 어떻게 할까요?”

 “발자국 같은 게 있는 건가요?”

그렇게 두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설렁설렁 걷고 있으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여궁수 그레이스. 회색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납작 엎드려서는 풀의 아랫부분을 살살 긁는다. 그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한세아가 카메라 드론과 함께 그레이스의 옆에 찰싹 달라붙는다.

 “발자국은 아니고, 여기 이 짧은 풀 아래쪽을 보면 미세하게 흔적이 있어요.”

 “……이게 흔적?”

 “잔뿌리처럼 보이지만 뿔여우의 털이에요. 뒷발로 몸을 긁으면서 이 자리에 조금 누워 있던 것 같네요.”

그레이스가 흔적이랍시고 찾아낸 것은 뭉친 풀에 달라붙어 있는 몇 가닥의 여우 털. 아무리 여우가 붉다 해도 한 두 가닥짜리 털을 찾아내다니, 시력은 나보다 좋은 게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탐색꾼들이 저리 흔적을 찾는 걸 보면 마법보다 신기하게 느껴진다. 마법이란 게 있고 게임 시스템도 있으니 저런 귀신 같은 탐색도 일종의 스킬이겠지.

 “길잡이니 탐색꾼이니 하더니 이유가 있네요. 마법의 재능이 없었으면 두 번째로 하고 싶던 게 궁수인데 진짜 다행이다. 이런 걸 어떻게 찾아? 아니, 지금 카메라에도 잘 안 잡히지 않아요? 손가락으로 붙잡아서 눈앞에 들이밀어도 난 잘 안 보여.”

그 섬세한 관찰력과 뛰어난 시력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는 한세아. 역시나 방송용 음성은 NPC인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지 뿔여우의 흔적 이외의 것을 찾는 그레이스가 반응하지 않는다. 옆에서 궁수 언니니 영입이니 떠드는데 눈도 깜짝 안 하고 수풀을 뒤지는 게 연기일 리 없지.

그렇게 잠시 시청자와 떠든 한세아가 이번에는 그레이스에게 묻는다.

 “뿔토끼랑 뿔여우는 마석을 잘 안 주죠?”

 “그렇죠. 거기에 고블린보다 잽싼 편이어서 추적을 잘 안 하기는 해요.”

 “그럼 무시하고 지나가는 거로.”

마석 소득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 웃는 상이 된다. 한세아는 3★의 탐색 능력을 맛보고 연달아 얻게 된 행운에 질투하는 시청자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레이스는 합류하자마자 뿔여우의 털로 자신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입증해서 기뻐하고 있고.

한세아, 운 진짜 좋네.

나랑 만난 건 둘째 치고 저렇게 정상적인 탐색꾼은 정상적인 마법사만큼 찾기 힘들다. 이상한 곳에서 사실적인지라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게 모험가거든. 그런데 파티 조합을 보면 벌써 탱커, 탐색꾼, 마법사가 다 모였네.

이제 모험가 길드에서 지속딜과 서브탱을 맡을 전위, 파티의 회복 역을 맡을 사제만 구하면 1층 모험가 주제에 5인 풀 파티를 결성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호화로운가.

슬라임이 풀을 짓누르고 간 흔적, 뿔토끼가 풀을 갉아낸 흔적, 뿔여우가 바닥을 긁은 흔적, 지친 고블린이 주저앉아 있던 흔적. 높낮이만 다른 풀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에서 탐색꾼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바라본다.

 “와, 진짜 대단해요!”

 “탑에서 나가면 사냥꾼은 이미 찾았다고 해도 되겠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물론 그레이스 또한 한세아를 아주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지쳤는지 한참 앉아 있다가 발을 질질 끌고 이동하는 고블린을 추적한 뒤 혼자 깔끔하게 처리해버렸으니까. 주저하지 않는 영창, 화살처럼 재빠르게 나아가는 매직 미사일,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하게 급소를 타격하는 컨트롤까지.

실력 미달의 마법사 몇 명을 만나 보았는지 한세아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얇은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다. 상급 모험가가 달라붙어 있다는 점에서 한번 말이나 걸어 봤는데, 이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면 당연히 기쁠 수밖에.

재능 있는 탐색꾼이 장래가 유망한 마법사를 만났다. 인간 관계적인 문제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저 두 사람은 탑의 상층부까지 함께할 수 있을 수준.

 “이 정도면 입증이 된 것 같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로 안내할게요.”

 “그렇게 해요. 아니면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을까요?”

 “점심, 이요?”

한세아의 의견에 그레이스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다. 짐꾼을 데려온 것도 아니고 배낭을 멘 것도 아닌데 점심이라니. 식사 대신 주머니에서 육포라도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허기를 달랠 생각이었던 것 같은 그레이스.

한세아가 그런 의아한 시선을 즐기듯 허공에 손을 집어넣는다.

 “짠! 어제 롤랑 님이 추천해주신 여관 음식이 참 맛있더라고요.”

 “허공에서 스튜가 나왔어?!”

아니 씨발, 그거 막 써도 되는…… 되겠구나?

하긴 어떤 미친 게임이 NPC 앞에서 인벤토리 사용 금지령을 내리겠냐고. 시청자와 대화를 할 때 NPC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인벤토리 또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나 보다. 아마 다른 방송인이 자기 파티원 앞에서 대놓고 꺼내 들지 않았으려나? 6★ NPC인 나를 만났다고 마구잡이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송인을 보고 판단하는 걸 보면 게임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실제로 그레이스는 별다른 의심 따위를 하지 않았다. 마탑에서도 보기 힘든 아공간 마도구에서 여관집 아주머니가 푹 끓인 동전 몇 푼짜리 스튜와 갓 구운 빵이 나왔음에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이거 마리앙 아주머니댁 스튜인가요? 세상에, 탑 안에서 따듯한 스튜를 먹게 될 줄이야.”

 “확실히, 파티에 마법사가 있으면 편하긴 하네.”

자연스럽게 풀이 낮은 지대를 찾아 적당히 맨바닥에 앉은 일행들. 둥글게 앉은 세 사람의 가운데에 커다란 스튜 냄비가 등장하더니 국자와 앞접시, 숟가락과 빵 따위가 뒤이어 등장한다. 인벤토리 안에 거의 나들이 세트를 준비해 왔네.

그래도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은 큰 메리트가 있다. 탑에 짐꾼을 잔뜩 데려올 게 아니라면 모험가의 식량은 결국 육포와 건과일, 건빵일 수밖에 없으니까. 물이야 마법 또는 마도구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허공에서 맛있는 빵을 만드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거든.

그 덕에 한세아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먹이를 노리는 암사자의 눈이 되었는걸. 생각보다 먹는 것에 진심인지 스튜에 들어 있는 콩을 씹으며 파티에 뼈를 묻을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여관이 많이 유명한가 봐요.”

 “네, 초보 모험가들에겐 필수적인 곳이에요. 듣기로는 마리앙 아주머니의 남편분도 고명한 모험가셨는데 탑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나.”

 “아….”

즐거운 식사 시간에 말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주제. 하지만 죽음과 가까이 사는 그레이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스튜에 푹 적신 빵을 으적 씹으며 간단하게 말했다. 그야 모험가들이 탑에서 못 나오는 경우는 흔하니까.

물론 바깥세상에서도 죽음이 생각보다 흔하긴 하지. 양치기가 늑대에 물려가거나, 약초꾼이 고블린 굴을 잘못 건드리거나, 왕국 외곽으로 나간 화전민이나 개척단, 보부상들이 몬스터 웨이브에 쓸려나가거나 하는 일이 거의 매달 있으니까. 연락이 끊기면 연락도 못 할 정도로 바쁘다는 생각 대신 죽었나보다―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세상.

 “다른 여관들은 모험가 등골 빨아먹는 놈들이 많거든요. 어차피 돈 있는 중급 모험가는 오지도 않을 테니 세상 물정 모르는 초보 모험가 등쳐먹겠다는 심보로. 도시 물 좀 먹고 모험가로 구르다 보면 찾아가지도 않을 여관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거나 돈이 궁한 사람이면 니가 뭘 어쩌겠냐는 식으로.”

내가 해준 이야기가 상급 모험가가 알려주는 초보 모험가 가이드라면, 그레이스가 말해주는 이야기는 초보 모험가가 초보 모험가에게 알려주는 일상 이야기. 알려주는 것도 관점도 다르다 보니 한세아는 빵 씹는 것도 까먹고 이야기에 집중한다.

뜨끈한 스튜가 담긴 접시를 빵으로 박박 긁어먹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담겨있는 음식이 줄어들지 않는 두 사람의 앞접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데 여긴 미녀 둘이 모여서 접시의 스튜를 차게 식히고 있네.

 “아,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네요.”

멍하니 앞접시를 들고 대화를 듣고만 있으니 곁눈질을 하던 한세아가 화들짝 놀라 입안에 빵을 욱여넣는다. 그레이스 쪽도 내 쪽도 아니고 애매하게 위쪽을 흘겨봤으니 시청자가 훈수라도 뒀나. 채팅창이 아래쯤에 있다면 위에는 아마 도네이션 창?

누가 돈 내고 잔소리라도 했나.

한세아가 아무리 엉뚱한 짓을 해도 NPC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게임 시스템의 어시스트. 그 때문인지 허공을 본다던가 혼잣말을 한다든가 하는 행위를 너무 티 나게 해서 알아보기 쉬웠다. 조금 난처하다는 듯 애매하게 웃어 보이는 게 유료와 무료 원투펀치 잔소리에 얻어맞고 있는 게 채팅창을 열어보지 않아도 뻔하거든.

 “그러네요. 어서 2층을 향해 가죠. 랜턴은 가지고 있나요?”

 “네. 등록 안 된 새 물건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랜턴을 꺼내는 그녀. 분명 아까 허리춤에 걸어둔 것 같았는데 그 새 인벤토리에 넣어놨네. 아직 탑의 통로에 도착하지 않아 마석 조각이 얌전히 가라앉아 있는 새 랜턴.

한세아의 손에 들린 랜턴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린 그레이스가 설명을 이어나간다. 나 대신 탐색꾼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긴 하네. 이래서 대학교 교수들이 대학원생과 조교를 부려 먹는 걸까.

 “랜턴과 모험가의 패는 잃어버리지 않게 파티원 개개인이 전부 들고 다니는 게 좋거든요.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파티가 분산된다면 믿을 건 랜턴뿐이니까. 한나 양은 마법사라 잃어버릴 일이 거의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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