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처음 파티에 들어왔으면서 뭘 안다고?”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티의 리더 2★ 여검사와 파티에 처음 들어온 3★ 여궁수가 의견 차이로 싸우는 것 같았다. 2★ 여검사는 별의 개수가 적지만 저층에서 오래 활동한 경력이 있고 3★ 여궁수는 이제 저층에 진입한 상황.
쉽게 말해 2★ 고렙과 3★ 쪼렙의 비등비등한 싸움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가슴이 옹졸하다는 드립이 나왔구나.
물론 이건 스탯창만 비교한 경우고 실제로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이야기를 들어야 알 수 있겠지. 노련한 여검사가 신입 여궁수에게 텃세를 부렸을 수도 있고, 반대로 신입 여궁수가 제 재능만 믿고 상식과 어긋난 짓거리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마침 좋은 교보재가 있네. 가서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앗, 그래도 되나요?”
“이제 파티를 짤 텐데, 저런 싸움이 왜 벌어지는지 알아두면 좋겠지.”
눈을 떼지 못하는 한세아에게 슬쩍 운을 띄우니 해맑게 웃는 그녀. 시청자들도 형님이니 센세니 하며 나를 열심히 띄워준다. 한세아가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상대는 고작 고블린. 시청자로선 고블린 상대로 무쌍 찍는 것도 슬슬 질릴 때가 되긴 했지.
천천히 접근하자 말싸움을 곤란하게 바라보고 있던 두 전위가 내 쪽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린다. CCTV 따위 없는 세상답게 모험가 겸 강도를 하는 놈들이 많다 보니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경계 태세. 이럴 땐 말보단 패를 까놓는 게 더 쉽고 빠르다.
“이봐, 너무 경계하지 마. 동전 몇 푼짜리 빼앗아갈 정도로 가난하진 않으니까.”
“상급, 모험가…!”
제대로 된 갑옷도 없이 초원에서 설렁설렁 다니던 내가 품 안에서 상급 모험가의 패를 꺼내 드니 곧바로 검을 내리는 두 남자. 당장 중층에 올라가서 노숙 생활을 시작하면 금화를 잔뜩 벌 수 있는 사람이 중고 갑옷을 빼앗기 위해 강도질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사실 상급 모험가쯤 되면 경계를 하든 말든 맨손으로 넷 다 제압할 수 있기도 하고.
“무슨 일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아, 내가 후배를 하나 키우고 있어서 다른 모험가 파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거든. 그런데 소리를 듣고 가까이 와 보니 사냥을 하는 게 아니라 말싸움을 하고 있네.”
“이것 참. 신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의 모험가. 행동만 보면 이 남자가 파티의 리더처럼 보이는 데 역시 태생 ★의 차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젊은 쪽의 남자는 소심한 것인지 아직도 경계 중인지 말없이 뒤로 물러나 있는 모양새.
두 남자로부터 시선을 떼어 내고 아직 말다툼 중인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말싸움이 끝나지 않는 두 사람. 모르는 파티가 접근해 와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데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음… 3★ 정도면 탑의 중층까지 파티원으로 쓸모 있긴 하지만, 저 독한 말다툼의 원인이 여궁수라면 데려가고 싶지 않을 수준. 탑에서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 왔는데도 말싸움을 이어나가다니 얼마나 독기로 가득한거야.
“그래서, 무슨 일로 저렇게 싸우는 거야?”
“의견 충돌입니다. 의뢰 때문에 임의로 짜인 파티여서 그런지 의견이 잘 맞질 않네요.”
“그게 저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는 중년 남성. 별이 없는 캐릭터답게 저층에서 의뢰로 먹고사는 상황인지 지금 상황에 불만이 많아 보인다. 하기야 돈 벌어 먹고살기도 바쁜 모험가가 계집애들 자존심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면 짜증이 나겠지.
호기심 잔뜩 담긴 한세아의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고 사정을 설명해준다.
“저희가 받은 의뢰는 초원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캐 오는 겁니다. 그런데 코라 양은 주변을 정찰하며 고블린도 사냥을 하자는 의견, 반대로 그레이스 양은 약초 자생지를 여럿 체크해 의뢰에 집중하자는 주장을 했죠.”
정말 별 것 아니지만 싸움이 나려면 얼마든지 날 수 있는 의견의 차이. 저층의 고블린이야 고작 한두 대만 때려도 죽으니 4인 파티로서는 부담감 없는 사냥감이다. 하지만 탑에서의 몬스터는 랜덤으로 등장하는 만큼 고블린을 찾아다니다 허탕을 칠 수도 있지.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한 몬스터와 만나 목숨을 잃지만, 다른 누군가는 먹고살려고 몬스터를 찾아 헤매는데도 못 만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은근 따스한 초원에서 갑옷에 무장을 쫙 챙겨입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고블린을 찾아 헤매면 체력 소모가 있을 수밖에.
정리하자면 확실하지만 사소한 보상과 불확실하지만 조금 더 많은 보상에 대한 의견 차이. 거기까지라면 저렇게 싸움이 벌어지지 않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맨 처음 들은 고함이 아마 ‘그게 내 잘못이야?’ 였던가.
“그럼 내 잘못인가요? 나는 분명 약초 군생지로 가자고 했는데.”
“몬스터 탐색에 실패한 게 파티 유일한 탐색꾼의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인데?”
화를 내는 건 파티의 리더인 2★ 여검사 코라. 삐죽 올라간 눈매와 얄팍한 입술 때문에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갈색 머리 미녀. 반대로 조곤조곤 받아치는 건 3★ 여궁수 그레이스. 실눈에 가까워 보이는 얇은 눈에 축 처진 눈꼬리 때문에 순해 보이는 인상의 미녀였다.
그러니까 둘 다, 미녀라고.
‘가챠 캐릭터의 특성인가?’
이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라는 게임 세상을 이루는 근간이 내가 하던 씹덕 가챠겜 히로인즈 크로니클이어서 그런 걸까? 한세아의 등장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두 가챠 캐릭터들은 모험가 거리에서 보기 드문 미녀들이었다.
대낮부터 저녁까지 테이블에 앉아 밖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사람 수 백 명을 봐도 못 보던 미녀들이 어떻게 필드에, 같은 파티로 모여있냐. 이게 한세아의 운이라면 그녀의 칭호는 행운의 여신 정도로 정해야 하지 않을까. 팔라딘 롤랑과 행운의 여신 한나, 뭐 그런 느낌.
아무튼, 외모 평가를 뒤로하고 두 사람의 말만 들어보자면 일단 여궁수 그레이스의 의견이 맞았다. 별이 한 단계 더 높아서 그렇다던가, 얼굴이 더 취향에 맞는 미녀라던가, 우리 파티에 필요한 게 여검사가 아니라 궁수라서― 같은 이유가 아니다.
“한나, 어떻게 생각해?”
“에, 저요? …어, 저는 그레이스 양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뭐얏!”
제 욕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제야 우리 쪽을 바라보는 여검사 코라. 두 여자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한세아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그런 판단을 내렸지?”
이어진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라는 듯 눈을 부라리는 여검사 코라와, 신기하다는 듯 이쪽을 살펴보는 여궁수 그레이스. 통성명도 안 한 두 남자 모험가들은 드디어 이 지루한 말싸움을 끝낼 수 있어 기쁘다는 듯 조용히 입을 닫았다.
다섯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여는 그녀. 하기야 그녀의 시청자만 만 명 가까이 된다고 들었는데 고작 다섯 사람이 대수겠는가. 평소 게임과 운동, 미모로 유명하던 그녀다 보니 6★ NPC의 등장과 맞물려 평균 시청자 1만 대에 도달했다~ 라는 축하 게시글이 있었지.
“그, 코라 양이 파티의 리더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게 뭐!”
“리더가 의견을 제시했고, 파티원이 의견에 따랐으면 그 결과도 리더의 책임이라 생각해요. 고블린을 많이 만나서 마석을 잔뜩 벌었다면 코라 양의 덕이고, 반대로 지금처럼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모험이 끝나게 생겼어도 코라 양의 탓이죠. 그게 파티 리더… 라고 생각해서요.”
또박또박 내뱉어진 한세아의 정론적인 이야기. 그 말을 들은 여검사 코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진다. 초보 모험가 주제에 뭘 아느냐고 따져 들고 싶겠지만 옆에는 내가 떡하니 서 있었으니까.
가죽 갑옷에 판금을 덧대 입은 숙련된 초보 모험가들과는 달리 산책하러 나가는 듯 가벼운 옷차림에 작은 철퇴 하나 허리춤에 달랑달랑 매달고 있는 남자. 마나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냥 상황 파악 못 하는 미친놈이지만, 마나가 존재하고 초인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런 허접스러운 옷차림은 되려 실력을 증명하는 모양새가 돼버리니까.
“아, 됐어! 의뢰의 최소치는 채웠으니까 그만두던가!”
마지막 자존심으로 빼액 소리를 지르는 여검사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파티 리더로 꽤 오래 구른 것 같은데, 성격 때문인지 어지간히 사람들에게 미움받나 보네.
그렇게 해산하게 된 초보 모험가 파티. 약초 의뢰를 최소치로 달성했다 했으니 떨어지는 돈이 거의 없을 것이다. 1층에서는 따로 움직여도 저층의 베테랑들에겐 위험할 일이 거의 없으니 험한 꼴 보지 말고 서로 떨어져서 가자는 암묵적 합의인가. 입장 위치는 비슷해서 그런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한쪽으로 향하는 사람들.
하긴 파티의 리더와 파티 유일의 탐색꾼이 삿대질을 하며 싸웠는데 네 명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도 웃기지. 그 때문에 우중충해진 남자들을 뒤로한 채 여궁수 그레이스가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온다.
“저기, 초보 모험가를 교육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아직 파티원을 구하지 못했다면 저는 어떤가요? 이래 봬도 아버지께 레인저 교육을 받은 탐색꾼이에요. 어지간한 사냥꾼보다 제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죠.”
그녀가 3★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저 자부심이 진짜일 가능성이 훨씬 컸다.
1★ 캐릭터는 선천적으로 육체가 조금 뛰어난 정도. 힘이 강한 농부라던가 도끼를 잘 다루는 나무꾼, 숙련된 사냥꾼 같은 느낌이라 전력으로 데려갈 수가 없었지. 2★은 여검사 코라처럼 검술 등 특정 기술에 재능이 있어 빠르게 강해진 정도다. 그래서 3★의 완벽한 하위호환 캐릭터들이라 마찬가지로 파티에 넣질 않았고.
그레이스같은 3★부터는 자신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는 느낌. 그녀가 말한 레인저 기술이나 도적의 함정 해제 같은 기술이 여기에 속하겠지. 그 외에도 별이 늘어날수록 막무가내식 실전 검술 대신 어디 귀족 집안의 비전 검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 거라면 이쪽에 말해야지. 내 파티가 아니라 이 녀석의 파티니까.”
“어머, 그런 쪽에서는 엄격하시네요.”
그리 대답하며 슬쩍 턱짓하자 자연스럽게 한 걸음 걸어 나가 한세아 앞에 서는 여궁수 그레이스. 카메라로 그런 그레이스를 집중적으로 촬영하며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3★을 만났다는 행운에 기뻐 날뛰기 직전으로 보인다.
남들은 시작 NPC로 3~4★이랑 만나서 2★파티원을 겨우 구하고 있는데, 자신은 6★ NPC와 만나 1:1 개인 교습을 받는 와중 3★ 캐릭터가 필드에서 알아서 다가오니 얼마나 기쁘겠나.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 몰래 본 채팅창에는 장난 반 진심 반 섞어 한세아를 욕하는 채팅이 많았다.
“그래서, 저는 어떤가요? 원하신다면 지금 잠시 합류해서 실력을 보여드릴 수 있어요.”
“저야 좋죠! 그런데….”
그레이스의 말에 활짝 웃어 보이는 한세아. 그러더니 슬쩍 내 쪽을 바라보며 눈치를 본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내가 지금 파티를 이끌며 교육을 해 주고 있으니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뜻대로 해. 지금은 내가 파티의 리더인 게 아니야. 네가 리더고 내가 도움을 주는 상황인 거지. 파티의 리더란 그런 것이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으흠! 그러면 같이 가죠!”
한세아가 명언처럼 내뱉은 말을 인용해 돌려주자 헛기침을 하며 홱 돌아서는 그녀. 아까부터 몰래 띄워 둔 채팅창에선 짓궂은 시청자들이 곧바로 그녀를 놀려먹기 시작했다. 판타지 롤플레잉에 진심이라면 당연하게 나올 수 있는 대사지만… 클립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그 부분만 따로 놓고 보면 재밌는 장면이니까.
가죽 갑옷을 입은 미녀가 ‘그것이… 리더니까’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데 시청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 있나. 가상현실 게임이 등장한 다른 평행 세계라 해도 밈이나 유머 코드는 거의 비슷한 것 같네.
문득 바깥세상, 그러니까 가상현실 게임이 발매된 한세아의 현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전형적인 현대 게임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를 따라 한 모양새던데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하면 나도 캡슐에서 눈을 뜬다는 결말이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