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75)

모험가 선배인 롤랑도 그렇고, 모험가 길드 접수원인 엘리스도 다 금발 벽안의 미남 미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시민들은 리얼리티 있는 생김새인데, 그 두 사람 만큼은 현실성이 없는 외모였다.

 ‘내일은 마탑에 가서 스킬 좀 배우고, 동료 모집에는 시간이 걸린다 했으니 모집 좀 걸어놓고 한 5층까지 올라가 볼까.’

계획을 세우면서도 게임 속에서 겪었던 일 때문에 쉽사리 잠이 들 수 없는 그녀. 게임 시작과 동시에 마차에 타서 구경한 판타지 세상의 풍경부터 우뚝 솟은 탑을 품은 도시의 모습과 고블린과의 싸움까지 판타지 마니아를 흥분시킬 수밖에 없는 일들.

특히 고블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침착하게 스텝을 밟아 포위진을 붕괴시키고 순차적으로 무찌른 일은 그녀를 다른 의미로 잠 못 들게 했다. 롤랑과 엘리스에 관한 게 아닌, 한세아에 관한 글 대부분은 그녀의 전투 센스에 대해 극찬하느라 바빴으니까.

정확히는 그녀와 대비되는 다른 방송인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칭찬을 받는 처지에서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

 ‘진짜, 이대로 나 1위 먹어버리면 어쩌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값비싼 가상 현실 캡슐을 팔아 재낀 BB 게임즈의 젊은 여사장. 그 정도 자산이면 부모님 집 한 채씩 사 드리고, 가방부터 시계까지 명품으로 싸악 도배해 드린 다음, 평생 놀고먹으면서 게임만 하면서 사는 거야―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며 한세아는 조금이라도 더 일찍 잠들기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동이 트기 전, 수탉 우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어둑한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닭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짜증이 살살 밀려오지만 어쩔 수 없다. 저 닭, 초보 모험가 시절 나한테 공짜 밥을 잔뜩 준 여관 아주머니가 키우는 닭이니까. 내가 얻어먹은 달걀 개수를 헤아려보면 저 닭 대신 내가 울어야 할 수준이다.

성능 좋은 육체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바닥을 붙이자마자 잠기운이 사악 달아난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기도 전에 또렷해지는 정신은 익숙해지기 힘드네.

[한세아에게 기초 마법 학습시키기 5/5 ※ CLEAR]

[보상 : 방송인 한세아 채널 구독 알람권]

그렇게 눈을 비비다 보니 또 헛것이 보인다.

아니, 뭘 했다고 그새 벌써 기초 마법을 배웠어. 수탉이 울고 있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부터 이게 무슨 일이래? 욕실로 향해 마석 수도꼭지를 돌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며 자연스럽게 방송국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에 몸 지지면서 웹서핑을 하는 시간 낭비를 이 세상에서도 하게 될 줄이야.

-물법 vs 불법

-마법 응용하면 치도리 가능?

-이 와중에 마법사도 될놈될이누

-섹스

-NPC에 마법까지 가져가면 양심 ㅇㄷ?

어젯밤 잠들기 전보다 확연하게 많아진 게시물들. 범람하는 게시판을 천천히 읽어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된다. 채팅창이 멈추길래 방송을 끈 줄 알았는데, 잠시 쉬고 와서 2부 야간 방송을 달린 거구나.

모험가 마법사들은 마탑에 돈을 내고 마법을 배워야 하지만 플레이어는 스킬창으로 익힐 수 있는지 밤새 시청자들과 함께 공용 스킬을 가지고 스킬트리를 짠 모양. 퀘스트가 딱 5개의 마법이라 꼬집어 말한 걸 보니 스킬창의 한계가 5개인 것 같고.

 ‘그 와중에 마법사의 재능도 랜덤이라니… 근본이 가챠겜이라 그런지 장난 아니네.’

뻐꾸기라 하든가 비둘기라 하든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른 방송인 소식을 계속 퍼 나르는 놈도 있었다. 어디 여캠이 마법사 못 해서 울었다는 소식부터 아저씨 방송인 하나가 마법 배우게 해 달라고 진상 피우다 카운터 여직원의 매콤한 쇼크 마법에 지져진 채 쫓겨났다는 소식까지.

-이 와중에 마법사도 될놈될이누

-[신고되어 블라인드 처리된 글입니다]

-NPC에 마법까지 가져가면 양심 ㅇㄷ?

-롤랑센세 만나려면 길드로 가면 될듯

-BB게임즈 먹으면 구독자한테 아파트 뿌리냐

잠시 머리를 감는 동안에도 게시판이 활발히 움직인다. 채팅창은 켜지지 않는 걸 보니 밤새 기초 마법을 고른 다음 자러 갔나 보네. 오후 방송, 야간 방송 이후 오전에는 취침인가. 이러면 한세아가 모험가 길드로 오는 건 오후쯤이려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초보 모험가 시절에는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길드로 달려가 가성비 좋은 임무를 선점했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 탑 등반 대신 안정된 삶을 선택한 나의 은행 계좌에는 금화가 두둑하게 쌓여 있으니 느긋하게 나서도 되겠지.

한세아 한 명 상급 모험가로 키워줄 금화는 있으니까.

온수 샤워에 헤어드라이어까지 마도 문명의 편리함을 만끽한 뒤 숙소 밖으로 나와 단골 여관으로 향했다. 숙소로 삼기에는 좀 낡았지만 음식 하나는 잘 만드는 데다 아주머니에게 입은 은혜가 있는 곳으로.

평소에는 술에 취해 늘어져 있어야 할 시간에 아침을 먹으러 나오니 분주하게 움직이던 여관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란다.

 “어머, 웬일로 아침을 먹으러 왔대?”

 “후배 하나 키우느라 한동안 아침에 얼굴 내비칠 생각이에요.”

후한 인심만큼 뺨이 통통한 작은 체구의 아줌마가 반갑다는 듯 크게 외친다.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쟁반을 든 채 목청도 좋게 나를 반기니 잠에 취해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

몇몇 사람들은 흘낏 보고 시선을 돌렸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너스레 좋게 농담을 던지는 여관 아주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선. 아마 입 가벼운 아줌마가 상급 모험가인 내 이야기를 단골손님에게 좀 떠든 것 같네.

그 롤랑이 초보 모험가 시절 밥을 얻어먹었다던가, 중급 모험가가 되어서도 자기 손맛을 못 잊고 찾아 왔다든가 하는 다양한 이야기. 후한 인심으로 음식을 넉넉히 주는 손 큰 아주머니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초보 모험가가 입소문을 듣고 오는 곳이다. 그러니 상급 모험가의 이야기는 손님 잡아두기에 효과적이었겠지.

 “후배? 세월 참 빠르네, 길드 위치도 모르던 초보 모험가가 어느새 후배를 육성하게 되다니….”

 “에헤이, 언젯적 이야기를.”

당장 나 또한 초보 모험가 시절 선배 모험가의 소개로 이 여관에 왔으니까. 동전 몇 개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숙소 겸 식당은 이곳뿐이다. 거기에 물 탄 맥주나 찌꺼기 고깃국 같은 다른 여관의 음식에 비해 이곳 음식은 질도 꽤 좋았으니 사람이 몰릴 수밖에.

그렇게 초보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구석 자리에서 따끈한 스튜로 속을 데우길 잠시.

[한세아 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세아_롤랑 센세에게 숙제 검사 받으러 가기~]

허공에 홀로그램이 저절로 등장해 내 눈길을 잡아끈다.

 ‘이게 알람권이구나.’

게임 세상으로 끌려오기 전, 좋아하던 인터넷 방송인들의 영상이 올라오면 스마트폰에 알림이 왔듯 홀로그램으로 한세아의 방송 시작을 알려주는 게 지난 퀘스트의 보상. 뭐 이딴 게 보상이야? 라고 따져 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이 보상은 꽤 좋은 보상이었다.

그야 나는 한세아를 스토커마냥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상황이니까.

생방송을 하는 걸 보니 바깥과 게임의 시간은 1:1의 비율로 흐르고, 새벽까지 마법을 조합하다 로그아웃한 주제에 8시에 칼같이 접속한 걸 보니 로그아웃 뒤 다시 접속하면 바깥의 시간과 상관없이 아침이 되어 있는 방식인가.

설마 3시간 수면 21시간 방송이라는 미친 스케쥴로 달리진 않겠지.

 “벌써 가는 거야? 좀 있으면 고기 다 구워지는데.”

 “그건 저기 굶주린 애들한테나 줘요.”

 “어휴… 누가 스튜 한 그릇에 금화를 던져줘?!”

이미지관리 겸 은혜 갚기의 일환으로 손사래를 치는 아주머니의 손에 금화를 쥐여준 뒤 후다닥 여관 밖으로 나선다. 조금 속물적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 선한 인상을 남겨 줘야 두둑한 개인 의뢰가 들어오거든.

민증이나 CCTV 따위 없이 오롯이 개인의 신뢰도만 가지고 의뢰를 맡겨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 입소문이 날 정도로 착하게 살면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는 세상이다. 그게 같은 업계 사람이라면 더욱더.

내가 무슨 세계 최강의 용사님이라 아랫것들과 함께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뢰를 받다 보면 중급 모험가, 짬 좀 먹은 초보 모험가랑도 임시 파티가 짜이니까.

 “아, 롤랑 님!”

그렇게 생각하며 설렁설렁 거리를 걷고 있으니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모험가 길드 앞에 서서 한 손으로는 스태프를 쥔 채, 다른 손을 번쩍 들고 열심히 흔드는 한세아.

잠에 취하고 삶에 찌들어 피로해 보이는 초보 모험가들과 달리 활발한 미녀의 모습에 초보 모험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중급 모험가쯤 되면 수입이 껑충 오르는데다 개인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해 뜨자마자 길드 문을 두드릴 일이 없거든.

 “저 마법 배워 왔어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깔끔한 청결 상태에 중고지만 장비를 다 갖춰 입고 마법부터 배워 온 미녀. 몇몇 사람들, 특히 초보 모험가 중 여자들의 시선이 매섭게 바뀌는 게 보인다. 인권이나 복지 따위가 없는 세상이다 보니 먹고 살기 위해 초보 모험가가 된 여자도 많고, 재능이 없는 대부분은 죽거나 창녀가 되니 줄 잘 잡은 것처럼 보이는 한세아가 부러울 수밖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그렇게 길드에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건 엘리스가 아닌 다른 여직원. 졸린 눈으로 서류를 탁탁 쳐서 정리하는 모습을 흘낏 쳐다본 뒤 적당히 비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게시판에 있는 의뢰서 앞에는 주머니에 먼지만 가득한 초보 모험가가 매달려 있으니 의뢰는 패스. 있는 놈이 동전 몇 개 털어먹는 건 보기에 안 좋다.

 “그새 마법을 배워 왔다니?”

 “어제 헤어지고 나서 좀 더 수련하고 싶어서 마법을 좀 배워 왔어요.”

테이블에 앉아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뒤따라 내 맞은편에 앉아 생글생글 웃는 그녀. 새벽까지 시청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짜 온 5개의 마법 스킬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보다. 당장 자랑하고 싶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그녀.

 “일단, 가장 먼저 쉴드 마법부터 배웠고요.”

 “흠, 다행이네. 솔직히 엉뚱한 마법을 배워 왔을까 걱정했는데.”

 “엉뚱한 마법이요?”

사실 방송국 게시판으로 이미 한세아가 배워 온 마법이 뭔지는 확인했지만 그녀의 방송에서 모험가 썰을 풀기 위해 모른 척 넘어갔다. 오픈 베타의 선두 주자인 만큼 6★ NPC가 푸는 썰은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 같거든.

10년간 구르면서 초등학교와 같은 기초 교육 따윈 없는 세상에 비상식적인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망토 때문에 죽은 놈은 양반일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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