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75)

내가 엉뚱한 깨달음을 얻는 동안 고블린과 한세아가 서로를 노려보며 달려든다. 물론 사거리가 압도적으로 긴 것은 당연히 한세아 쪽. 한세아가 아무리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라 해도 1m도 안 되는 허리 굽은 난쟁이보단 배는 커다랗다. 거기에 들고 있는 무기도 짱돌과 스태프라는 차이가 있고.

 “하얏―!”

그 짧은 시간 동안 잘 배웠는지 스태프를 마치 장창처럼 쭈욱 내밀어 찌르는 한세아. 앞으로 쿵 내디뎌 밟는 진각부터 허리를 비틀며 내찌르는 스태프가 여인의 것 치고는 꽤 위력적이다.

 “어, 어라?”

 “음, 자세가 좋네.”

바람을 가르고 휙 날아든 스태프가 무방비한 고블린의 목젖 아랫부분을 쿡 찌른다. 그것만으로 전투는 끝. 켁! 하고 단말마를 내지른 고블린이 푱~ 하는 묘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멩이로 바뀐다.

[한세아와 파티를 이룬 채 1층에서 최하급 마석 획득 1/10]

퀘스트 진행, 순조롭네.

고블린과의 첫 번째 전투 이후 자신감을 잔뜩 얻은 한세아가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쭈욱 펼친 채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향한다. 내가 설명한 네 종류의 몬스터, 슬라임 뿔토끼 뿔여우 고블린 중 가장 위험한 고블린이 원샷 원킬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번엔 이쪽으로 가요!”

고블린, 고블린, 슬라임, 뿔여우, 슬라임, 뿔토끼― 만나는 몬스터마다 한 방에 잡는 게 의외로 전사의 자질도 있어 보이는 그녀. 힘 좋은 농부도 뭔가를 때려잡은 경험이 없거나 마음이 약하면 두, 세 번 정도 두들겨 패야 죽일 수 있는 1층의 몬스터를 그녀는 스태프 찌르기로 한 놈씩 착실하게 사냥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자질이 없었으면 그대로 창을 잡아도 될 정도인데.”

 “헤헤, 칭찬 감사해요!”

덕분에 꽝이 몇 번 있었어도 최하급 마석은 순조롭게 모이는 추세. 거기에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입구를 중심축 삼아 빙빙 돌며 몬스터를 탐색하는 게 게임에 꽤 익숙한 모양새다. 달려드는 괴물에게 쫄지도 않고 무기를 찔러버리는 걸 보니 게임 방송인답긴 하네.

꺅꺅거리며 1층의 고블린 상대로 고전을 해도 퀘스트를 위해 내가 데려가야 할 상황인데 이렇게 1인분 이상을 한다면 감사의 절을 올려도 모자랄 지경.

 “첫날이니까 맛보기로 마석 10개 정도만 모으고 돌아가면 되겠다.”

 “10개… 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걷던 한세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아까 멋모르고 들어온 사람들이 왜 죽는지 설명했던 이유 때문에.

앞에 고블린 둘, 뒤에 고블린 하나.

한 마리의 고블린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으니 옆의 수풀에서 한 마리가 스폰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 사이에 우리가 지나온 뒤편에서도 스폰되어 슬금슬금 접근하기 시작한다. 한 방에 한 놈씩 보낼 수 있다 해도 3:1이라는 수적 열세가 주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고블린이 세, 세 마리인데요?”

 “마석을 하나씩 주면 바로 돌아가도 되겠어.”

그래도 곁에 내가 태평하게 있다는 점에서 곧바로 깊은숨을 후우우― 토해내며 마음을 추스르는 그녀. 아직 내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는지 앞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 발을 살살 끌며 옆으로 자리를 움직인다. 앞뒤로 포위당하는 것보단, 정면에 세 마리를 두겠다는 건가.

 “피격 안 당하고 3:1 이기면 10만 원? 안전 자산에 투자하세요? 너 딱 대라… 잠깐만, 선배님이 끼어들면 미션 실패라니. 불안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면 된다고? 말은 쉽지 진짜.”

말없이 구경만 하고 있으니 시청자에게 미션을 받은 그녀가 중얼거리다 곧바로 발을 내디딘다. 그 대머리 전사 녀석, 간단한 밀어내기를 알려준다더니 어떻게 봐도 훌륭한 하단 찌르기처럼 보이는데.

플레이어 스탯 보정인지 기세 좋게 바람을 가른 봉이 중앙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오던 고블린의 미간을 퍽! 소리가 나게 후려친다. 전력을 다한 찌르기에 뒤로 나동그라지며 푱~ 하고 마석으로 변한 중앙의 고블린.

키에에에엑!

캬아악!

그 모습을 본 양옆의 고블린이 들짐승처럼 돌멩이와 나무 곤봉을 들고 달려든다.

 ‘나설 필요는… 없나.’

겁을 먹고 움츠러들면 한 마리 정도 붙잡아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힘차게 내뻗어졌던 봉이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차게 휘둘러지며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좌측 고블린의 머리를 후려쳤으니까.

캬아악?!

끼에엑!

자세가 엉성해서 그런지 죽지는 않았지만, 돌멩이도 놓치고 나동그라진 녀석. 믿고 있던 동족이 자빠지자 혼자 달려들게 된 곤봉 고블린이 무방비 상태가 된 한세아에게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지만―

 “어딜!”

퍽, 소리와 함께 내뻗어진 늘씬한 다리에 얻어맞고 뒤로 나뒹군다. 한 번에 처리하진 못해도 하나씩 넘어트리며 상대하는 건가. 게임 속이라는 생각 덕분에 과감한 것인지, 어지간한 시골뜨기보단 훨씬 전사다운 모습이었다.

발차기에 한 놈이 나동그라지는 동안 돌멩이도 놓친 채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나는 좌측의 고블린. 녀석이 겨우 자세를 잡고 눈을 뜨니 앞으로 날아드는 건 마찬가지로 다시 자세를 제대로 잡은 한세아의 찌르기였다.

퍽! 하나의 고블린이 다시 최하급 마석으로 변한다.

 “확실히 전투 센스가 좋네. 하지만 이런 발차기는 고블린한테만 통하니, 층이 올라가면 발차기가 아니라 마법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고.”

 “네!”

무기의 사거리와 체구 차이를 이용해 상대의 이동을 방해하고 1:1 구도를 여러 번 만드는 것. 확실히 재능이 있는지 키보드와 마우스 대신 직접 몸으로 움직이게 되었어도 망설임 없이 휙휙 움직이는 게 아주 흡족하다.

까놓고 말해 나도 이 세상에 처음 떨어져서 포위당했을 땐 얼타다가 육체빨로 이겼거든. 현실에서는 겜창이던 내가 이세계에 떨어지니 방패술 천재?! 같은 전개는 없어서 고생 좀 많이 했지.

 “흐음, 최하급 마석 10개. 생각보다 빨리 모았네.”

 “그러게요. 원래는 잘 안 나오나요?”

 “고블린 이하의 몬스터에선 잘 안 나오기도 하고, 초보 모험가들은 생명을 해친다는 것에 어색해하면서 고블린 상대로도 시간을 많이 끌거든. 그런 부분에서 생각해보면 한나양은 모험가로서 아주 훌륭한 자질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칭찬을 계속 이어나가자 입꼬리가 이죽거리는 걸 참지 못하고 히히 웃는 그녀. 시청자들이랑 투닥거리는 모습이 여러 번 있던데, 면전에서 대놓고 칭찬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지 몸을 베베 꼬는 게 퍽 귀엽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는 눈동자.

-그래도 3:1 하는 거 보면 재능은 있는 듯?

-팩트:다른 여캠 읍읍읍은 고블린이랑 눈 마주치고 울었다

-3:1이고 뭐고 설명 안 듣고 꼴박했다가 길 잃은 방송인 개많음 ㅋㅋ

-첫 NPC 6★ 뽑으니까 초반 꿀이 달달하네

-저저저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라

[한세아와 파티를 이룬 채 1층에서 최하급 마석 획득 10/10 ※ CLEAR]

[보상 : 방송인 한세아의 채팅창 접속 권한]

한세아가 계속 채팅창을 곁눈질로 보기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카메라 드론이 바닥의 최하급 마석으로 향한 사이 보상으로 받은 채팅창 접속 권한을 몰래 사용해봤다. 역시, 다른 방송인들보단 실력이 좋은 건가.

 ‘이거 은근 보는 재미가 있네.’

유흥거리라고는 결투나 오페라, 연극 같은 것밖에 없는 중세 판타지 세상에 살다 온갖 비속어와 줄임말이 가득한 인터넷 채팅창을 보게 되니 중독성이 좀 강하다. 10년 만에 보는 게시판과 채팅창인지라 쓸데없이 웃고 떠드는 줄글만 봐도 재미가 느껴지니 원.

적당히 채팅창을 구경하다 카메라가 다시 나를 향할 즈음 열심히 마석과 채팅창을 번갈아 바라보는 한세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첫날부터 무리하는 건 안 좋으니 마석을 챙겨서 돌아가자.”

 “네! …저기, 롤랑 선배님?”

 “음?”

 “선배님은 얼마나 강한지 궁금한데,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애교를 부리듯 눈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헤헤 웃는 그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웃으면서도 눈동자가 계속 옆을 슬금슬금 쳐다보는 게 보인다. 채팅창 아니면 무슨 미션 같은 거라도 걸렸나?

한세아는 강함을 보여달라는 게 조금 미안하고 창피한지 머뭇거렸지만,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시청자와 한세아 앞에서 어느 정도 과시를 해 놔야 나를 끝까지 파티원으로 데려갈 확률이 높아지니까.

6★이라는 독보적 성능의 NPC를 버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10년 만에 드디어 얻게 된 퀘스트 기회인데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는가.

 ‘근데 뭘 보여줘야 하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마법사나 검객이 아닌 탱커라는 점.

도적이었으면 비도술이나 은신술 따위를, 궁수였다면 먼저 쏜 화살을 나중에 쏜 화살로 맞추는 기교를, 마법사였다면 초원을 날려버릴 화끈한 공격 마법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들은 상급 모험가들이 제 자랑을 할 때마다 자주 나오는 자랑용 기술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탱커, 게임 아이템처럼 보이는 방패와 갑옷을 믿고 무식하게 육체적 능력으로 찍어 누르기 원툴인 중장갑 기사. 거인의 몽둥이를 맨몸으로 막아낸다던가, 아룡종의 브레스를 받아 흘려낸다든가 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적수가 없는 초원에서는 보여줄 만한 기술이 없었다.

 “흐음, 보여달라….”

 “어,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해요.”

 “무례한 부탁은 아니야. 원래 모험가라는 것들은 다 겉멋이 잔뜩 들어서 자랑하듯 보여주는 걸 좋아하니까. 단지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뭘 보여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런 거지.”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한세아를 급히 달랜 뒤 고민을 이어나갔다. 대충 고블린을 딱밤으로 반갈죽 시켜버릴 수 있지만 그게 뭐 대단해 보이겠는가? 당장 한세아만 해도 스태프를 잘 휘두르면 일격에 죽일 수 있는데. 게시판과 채팅창을 보니 나 또한 모험가로서의 허세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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