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75)

들어갈 땐 많아봤자 서너 마리여서 쉽게 쑤욱 들어갔는데, 체력 다 쓰고 나오는 길에 열 마리, 스무 마리씩 불합리하게 몬스터가 우르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게 이 빌어먹을 탑. 익숙해지기 전까지 그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쉬려고 할 때 나오고, 자려고 할 때 나오고, 식사를 준비하는데 나오고, 되돌아올 때 나오고― 숙련된 모험가가 아니면 대응할 방법이 없는 몬스터의 등장.

 “물론 모험가들에게는 그걸 방지하는 방법이 있지만, 모험가가 아닌 사람이 멋대로 들어가면 알지도 못한 채 그대로 포위당하거나 체력이 깎여 나가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거지.”

 “어… 탑이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네요?”

 “그러니까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지. 물론 저층에서는 그럴 일이 없지만.”

씨익 웃어 보이고 탑을 향해 걸어가자 후다닥 따라오는 한세아. 내가 한 말이 선배 모험가가 후배 모험가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한 농담 정도라고 생각했는지 큼큼 헛기침하며 말을 걸어온다.

 “하긴, 1층은 괜찮겠죠?”

 “모험가에겐 괜찮지. 헛바람 든 녀석들이 모험가 길드의 도움 없이 들어오면 1층에서도 죽어.”

 “어, 왜 그런 거죠? 욕심만 안 부리면 될 것 같은데.”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한동안 놀고 있었으나 유명세가 어딜 간 건 아닌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거든. 뻐드렁니, 주근깨, 비듬, 뚱뚱이와 홀쭉이와 지저분한 못난이들 사이에 금발 벽안의 조각상 같은 외모가 툭 튀어나와 있으니 시선이 끌릴 수밖에.

거기에 뒤따라 오는 게 가죽 갑옷으로도 풍만한 몸매를 가리지 못한 어여쁜 미녀라면 사내놈들의 시선이 집중되다 못해 매섭다.

목적지는 탑의 외벽에 뻥 하고 뚫려 있는 아치형의 거대한 문. 워낙 커다래서 문보다는 터널의 입구처럼 보이는 그 어둑한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아무 대꾸도 없이 탑에 쑥 들어간 나를 후다닥 쫓아오는 가벼운 발소리.

 “같이 가요!”

어둑한 그림자가 우리 두 명을 감싸니 눈 깜빡할 사이에 풍경이 바뀐다.

 “왜 갑자기… 어!?”

 “왜냐하면, 이게 탑의 1층이거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초원이 눈앞에 드러난다. 다른 모험가를 만나기도 힘들 정도로 광활한 초원이.

새파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새하얀 구름.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초원과 다양한 높이의 식생들. 발목까지 오는 잔디 비슷한 풀부터 허리춤까지 오는 갈대 비슷한 녹색 수풀까지 다양한 풀이 가득한 세상.

 “와… 경치가 진짜 멋지다.”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의 초원과 같은 풍경이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이 바로 탑의 1층, 초원. 몇몇 멋 부리는 걸 좋아하는 음유시인이나 허세 가득한 녀석들은 무한의 초원이니 풍요의 초원이니 하며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대부분의 모험가는 그냥 초원이라고 부른다.

위로 올라갈수록 다양한 지형이 나오니 짧게 줄여 말하겠다는 거지. 초원, 동굴, 늪지, 설원 뭐 이런 식으로.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돌리며 사방팔방을 둘러보는 한세아에게 탑 밖에서 들었던 질문의 대답을 들려준다.

 “이래서 모험가 길드의 도움 없이 들어온 사람들이 죽는 거야.”

 “네? 왜요?”

 “초원에는 이정표가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러면 어떻게 나가요?”

어둑한 터널에 발을 내디뎠는데 눈을 떠 보니 광활한 초원이다. 공간의 제약을 무시하는 기묘한 탑의 행태는 둘째 치고 걱정해야 할 건 바로 그 점. 나가는 문이 문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거.

탑 밖에서 탑 안으로 들어올 땐 분명 문처럼 생긴 곳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는데 눈을 떠 보니 문은커녕 벽도 나무도 바위도 하나 없는 초원이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간에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무언가 도구가 있어야 가능할 수밖에 없는 장소.

 “그게 탑의 무서운 점이지. 탑 밖으로 나가려면 1층의 초원, 우리가 들어온 장소로 다시 돌아와야 해. 정확히 이곳으로.”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발아래를 가리키니 한세아의 작달막한 머리통이 아래로 쑤욱 숙여진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초원의 풀이 짓눌려 생긴 일종의 미스터리 서클. 지름이 고작해야 1m도 되지 않아 사람 한 명 딱 서 있을 크기의 작은 원.

 “…이 발판 위에 올라와야 하는 거예요?”

 “그래. 이정표 하나 없는 이 드넓은 초원을 멋대로 돌아다니다, 수풀 속에 있을 이 발판을 다시 찾아와야 탑 밖으로 나갈 수 있어.”

내가 탑 등반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것도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 때문이다. 초원으로 들어와서 탑을 올라 고층지대까지 간 뒤, 사냥을 해서 마석을 잔뜩 모은 다음 탑을 내려와 초원에서 이 쬐깐한 발판 위에 올라서기까지.

게임 시스템처럼 순간이동이나 미니맵 따위 없이 모험가 길드에서 만든 마법의 나침반 하나 믿고 거의 행군하듯 돌아다녀야 하니 귀찮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인벤토리 같은 게 없으니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식료품과 식수를 잔뜩 들고 다녀야 하니 짐꾼 파티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모험의 귀환은 대부분 노숙자가 되어 돌아오는 꼴이 된다. 탑에서 나오는 꾀죄죄한 모험가들이 많은 이유기도 하고. 몬스터가 랜덤 스폰 되는 만큼 돌아오는 길이 더 고생이니까.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맵에 점으로 찍어주기는 하네요. 아까 도시도 그렇고 내가 밟은 곳만 맵핑이 되는 것 같고. …1층 컷 고블린한테 일기토 패배할 예정이라고 채팅친 놈 너 닉네임 기억해 둔다.”

바닥의 문양을 내려다보며 시청자들과의 대화를 끝마친 한세아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새카만 눈동자에 어려있는 건 호승심 뒤섞인 호기심. 당장이라도 몬스터와 싸우고 싶다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는 게 어지간히 게이머의 자존심이 강한 것 같았다.

물론 나 또한 최하급 마석 10개 퀘스트를 오늘 곧바로 클리어하고 싶었기 때문에 슬쩍 턱짓한 뒤 어느 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있는 게 모험가 길드지. 수수료를 비싸게 떼어가는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그 녀석들이 없으면 탑의 공략이 불가능하거든. 모험가의 증표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 탑의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아, 진짜 인벤토리에 모험가의 증표가 들어있어야 탑 내부 미니맵이 활성화된다고 설명이 쓰여 있네요.”

너, 인벤토리도 있냐?

하마터면 질투 어린 비명을 지를 뻔한 걸 목구멍 너머로 꿀떡 삼켰다. 탑의 몬스터들은 다 마석으로 변하기 때문에 식량 계산 한 번 잘못하면 초원의 풀을 뜯어 먹으며 노숙 생활을 하게 되니 그 무엇보다 부러운 능력이 인벤토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보여줄 기능은 인벤토리와 미니맵 연동 같은 게임 시스템과 멀기 때문에 품 안에서 황금색 패를 꺼내 들었다. 중앙에 커다란 방패와 투구와 철퇴가 새겨진 육각형의 금속 패.

 “자, 이렇게 패를 보면 중앙의 문양에는 작은 마석이 박혀 있는데, 이걸 꾹 누르면 잠깐 이정표가 나오지.”

방패 중앙에 자연스럽게 박혀 있는 쬐깐한 마석을 누르자 마치 홀로그램처럼 모험가의 증표 위로 솟아오르는 화살표. 그저 앞으로 조금 걸어왔을 뿐이니 홀로그램 화살표는 자연스럽게 내 가슴팍, 우리가 걸어온 뒤쪽을 향해 빛난다.

 “물론 방향 하나만 알려주기 때문에 초원이 아닌 곳에서는 전문적인 길잡이들을 파티에 채용하는 편이야. 대부분의 파티에 도적이나 궁수를 반드시 데려가는 이유지.”

탁 트인 초원이야 화살표 따라 쭈욱 걸으면 되지만, 미로처럼 되어 있는 동굴 같은 곳에서 화살표만 따라갔다가는 막다른 길에 기대어 있는 해골이 되어 모험가에서 이정표로 전직할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이 꽤 신기했는지 허리춤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모험가 패를 꺼내는 한세아. 저 가죽 주머니가 인벤토리인가, 아니면 눈속임을 위한 걸까.

그녀가 꺼낸 잡철로 만든 작은 패 위에 새겨진 건 X자로 교차한 길쭉한 지팡이와 마녀의 고깔모자 문양. 패의 재질이 다르다지만 마석은 똑같기에 지팡이의 교차점에 있는 마석을 꾹 누르자 그녀의 패에서도 화살표가 둥실 떠오른다.

 “제 껀 문양이 다르네요?”

 “그야 모험가의 패는 일종의 신분 증명을 겸하고 있으니까. 마법사가 전사의 패를 들고 다닌다든가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거지. …사실은 저 패를 처음 만든 대장장이가 밋밋한 게 싫다고 멋대로 문양을 새겨 넣은 거지만.”

 “진짜요?”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야. 이름과 신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칼과 지팡이를 새겨 넣는다고 뭐 신분 증명이 되겠어?”

요컨대 모험가 길드에서 대량 발주를 받은 대장장이 하나가 겉멋으로 막 새겨넣은 게 얼떨결에 전통이 된 케이스. 틀에 맞춰 짠 게 아니므로 문양도 가지각색이다. 전사만 해도 검부터 철퇴에 도끼에 투구나 방패, 갑옷 등 다양하게 어레인지 되어 있거든.

그 때문에 모험가 길드에 영향력 좀 있는 상급 모험가들은 멋을 부리기 위해 패에 자신의 무장을 새겨넣기도 한다.

…나처럼.

개고생 끝에 상급 모험가가 될 때 감동이 벅차올라서 내 무구를 패에 새겨달라고 요청했거든. 입 밖으로 꺼내 설명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그땐 상급 모험가 대부분이 자신만의 패를 만드는 분위기였다.

 “패를 확인했으니, 몬스터를 찾아보자. 초원에서는 어디를 가나 똑같으니 원하는 곳으로 적당히 걸어가 봐.”

 “어, 아무 곳으로나요?”

 “마음 가는 대로.”

고개를 끄덕거린 채 팔짱을 끼자 침을 꼴딱 삼킨 채 살짝 옆으로 꺾어 앞을 향해 걸어가는 한세아. 스태프를 양손으로 꽉 쥔 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토끼밖에 없을 것 같은 푸른 초원. 하지만 판타지 게임 속 탑의 1층인 만큼 몬스터가 있는 건 당연하다. 물론 1층은 튜토리얼에 가까운 만큼 단일 개체로 위험한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지만… 첫 플레이인 한세아는 그걸 모르겠지.

발로 걷어차서 죽일 수 있는 물렁물렁한 슬라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뿔이 달린 토끼와 여우, 늙고 병들어 허약한 고블린. 슬라임은 가끔 마석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약해 왜 등장하는지 모를 연약한 몬스터고 토끼와 여우는 깨물거나 뿔로 찌르는데 가죽 갑옷은커녕 두툼한 솜 갑옷도 못 뚫는다.

위험한 건 돌멩이나 나무 곤봉 따위를 들고 덤벼드는 고블린 정도. 그조차도 패닉에 빠지지 않으면 한 마리 정도는 누구나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다.

 “저게 고블린이에요?”

 “맞아,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그야 엄청나게 약하니까. 늙고 병들어 1층으로 추방되었다는 설정인지 위쪽에서 볼 수 있는 고블린보다 훨씬 작은 체구. 빼빼 마른 몸에 허리까지 굽어 있어 작고 왜소해 보인다.

키에에엑!

 “어, 온다?!”

딱히 기척을 죽이지도 않고 초원을 걸어가고 있으니 고블린 또한 우리를 발견한 지 오래. 파삭파삭 수풀을 헤치고 녹색의 땅딸막한 난쟁이가 달려든다. 낡은 거적때기로 덜렁거리는 하물만 겨우 가린 추레한 난쟁이.

 ‘…고블린부터 트롤까지, 팬티는 입고 생성되는 이유가 게임 세상이어서 그런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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