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가 울분을 토하며 올린 스크린 샷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남성이 서 있었다. 10년이나 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보자 덱 추천 탱커였지만 남캐여서 무시당하던 캐릭터였던가.
…설마 저 사람도 나처럼 게임 속에 떨어진 사람은 아니겠지.
아무튼 가벼운 갑옷을 대충 챙겨입고 방송국 게시판을 쭉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가상현실 게임의 이름이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아니라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라는 이름의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점. VR 고글 따위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회사가 갑자기 등장해 캡슐에 뇌파로 접속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 솔로 게임인 히어로즈 크로니클의 탑 최초 등반자에겐 게임 회사가 회사의 주식을 걸었다는 점―
‘이거 완전히 겜판소 설정 아니야?’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가 초과학적인 기술로 내놓은 가상현실 게임이며, 그 게임을 클리어하면 회사를 차지할 수 있다니. 하긴 게임 속에 환생한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 조건은 애교가 아닐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방송인 한세아가 게임과 운동 방송을 병행하던 전문 방송인이며, 몸 쓰는 일에 자신 있다고 히어로즈 크로니클 정복을 선포하여 캡슐 지원비 등 후원금을 잔뜩 땡겨 먹었다는 점. 기존의 다른 방송들 대부분을 제쳐두고 크로니클을 달리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분탕 종자가 별로 없고 호평 일색인 방송국 게시판. 열정 넘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호감형 인터넷 방송인이며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승부욕까지 가지고 있다는 게 그녀의 주된 평가. 그 정도면 갑자기 한세아가 방송을 접어 내가 이 게임 속에 유기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마음이 놓였다.
“오셨습니까, 롤랑 님!”
얇은 철판으로 만든 경장갑을 입은 채, 적당한 철퇴와 한 손 망치를 챙겨 들고 다시 길드로 향했다. 짐이 잔뜩 늘어났지만, 훨씬 가볍게 느껴지는 발걸음.
“한나 양이 그래도 기본적인 소질은 뛰어난 것 같습니다!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당장 전위로 나서도 5층까지는 무리가 없을 정도군요.”
“감사합니다!”
“그래? 가르치느라 수고했다. 내가 봉술은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하하, 저도 겉핥기로 배워 딱 기초만 아는지라 별로 가르친 것도 없습니다.”
통나무 앞에서 젖은 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정리하는 한세아와 그걸 보며 호탕하게 웃는 대머리 전사. 방송국 게시판 덕분에 기분이 좋은지라 챙겨 온 한 손 망치를 남자의 손에 억지로 쥐여줬다.
“저, 이건?”
“내가 중층에서 예비 무기로 사용하려고 챙겼던 망치.”
한 손으로 쥐기엔 좀 기다란 손잡이와 새하얗고 커다란 대가리. 망치라기보다는 철퇴에 가까운 크기지만 중급 모험가쯤 되면 마력을 이용할 줄 아니 이 정도 무게도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꽤 멋지게 생겨 충동적으로 구매했지만, 이 세상에 넘어올 때 얻은 철퇴가 너무 강해 예비 무기를 써본 적 없어 창고에 처박혀 있던 물건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 없겠지.
“이, 이런걸….”
“덕분에 시간을 아꼈으니 주는 거야. 자네도 알지 않나, 상급 모험가의 시간이 얼마나 비싼지.”
험악한 인상이 흉측할정도로 찌그러진 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제 손에 들린 망치를 노려보는 그. 옆에 있던 한세아도 망치의 외형만 보고 감탄을 할 정도로 잘 빠진 녀석이니 감격할 수 밖에. 나도 그 멋진 외형에 홀려 충동구매를 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과분한 무기지만 정말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공터에서 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모험가들의 시선에 질투와 선망의 시선이 가득 담긴다. 이렇게 약을 좀 쳐 두면 한세아의 행복한 길드 라이프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을 담은 선물이니 효과가 참 좋네.
스태프 대용인 길쭉한 봉을 양손으로 꾸욱 잡고 눈을 빛내는 그녀.
자신의 시작 NPC가 다른 사람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채팅 때문에 알게 되었는지 나를 향해 날아오는 시선이 매섭다. 거기에 방송 각이라도 잡는지 카메라 드론이 한세아를 제쳐두고 나와 대머리를 찍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들리는 끼요오오오옷! 하는 괴성을 뒤로 한 채 한세아를 데리고 길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도시의 중심에 있는 탑…이 아니라 모험가가 알아둬야 하는 다양한 장소들.
“일단 도시 내부에서 꼭 알아둬야 할 장소를 알려주마.”
“어떤 장소들인가요?”
“솜씨 좋은 대장간, 초보 모험가가 머무르기 좋은 여관, 밥이 맛있는 주점과 신전 정도일까.”
모험가로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모험가 길드와 마탑 지부를 더해 저게 전부다. 중요한 만큼 시골뜨기들을 벗겨 먹는 가게가 많은지라 상급 모험가로서 소개해 둬야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이 없지.
대장간은 장비를 수리하거나 새로운 무구를 맞출 때 바가지를 쓰거나 불량품을 떠넘기는 일이 있다. 싸구려 여관은 방문이 잠기지 않아 소지품을 털리는 일이 있고 주점은 중세풍 개밥 같은 게 나오는 곳도 있어 알아두는 게 좋지.
물론 한세아는 플레이어니까 아이템 감정이나 인벤토리 따위가 있어 그러한 일에서 면역일지도 모르지만… 지도역 선배 모험가의 체면이 있으니까.
“여기가 주점… 나중에 동료 뽑기를 할 수 있나봐요?”
“…….”
“길치라뇨, 지금 롤랑 님이 알려주니까 맵에 다 찍혔는데 뭘 길을 잃어요. 왜 님이냐구요? 너도 6성 NPC 뽑으면 모시고 다닐 거면서. 파티로 모시고 다니면서 좋은 모습 보여주면 삐까뻔적한 풀 세트 맞춰주지 않으려나? 속물적? 어허, RPG 초반 장비 차이가 등반에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소리를 해? 넌 가짜구나?”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다 뒤에서 들려온 한세아의 혼잣말에 반응할 뻔했지만, 초인적인 반응속도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동료 뽑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반응해도 될 단어가 아니야.
나에게 하는 말과 시청자들에게 하는 말의 필터 기능 같은 게 있는지 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한세아. 시청자들과의 대화를 엿듣다 보니 어느새 신전을 지나 도시 중심의 탑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입구에 도착한 것 같으니까 다시 게임에 집중할게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구름을 향해 쭈욱 뻗어있는 높은 탑. 3~4층 건물도 쉽사리 보기 힘든 판타지풍 도시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구조물치곤 너무나도 높다. 입구에서 탑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 구도는 게임의 로딩 화면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이 게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풍경 중 하나다.
“우와~ 엄청 높아요!”
그 웅장한 광경에 놀란 건 한세아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떡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질수록 각도가 함께 변하는 카메라 드론. 구름을 꿰뚫는 거대한 탑은 10년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니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우리라.
가죽 갑옷을 입고, 길쭉한 스태프를 들고 구름을 허리에 낀 높디높은 탑 앞에 서자 뭔가 벅차오르는 감동이라도 있는지 몇 분을 가만히 있는 그녀.
맑은 날씨의 하늘로 솟구쳐오른 탑 또한 절경이지만 그 아래 입구에서 오가는 모험가들의 풍경 또한 판타지다운 한 장면이니 만끽할 시간을 줘야겠지. 강철 투구를 눌러쓴 채 발을 쿵쿵 울리는 전사들의 집단, 새것인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로브 자락을 펄럭이는 오만해 보이는 마법사들, 오물이 잔뜩 묻은 낡은 갑옷 차림으로 비틀비틀 탑 밖으로 나오는 모험가들까지.
그렇게 넋 놓고 구경하던 한세아가 갑자기 어깨를 움찔거리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듯 놀란다.
“앗! 죄송해요. 너무 멋져서 그만.”
“걱정하지 마, 이 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그러니까. 나도 초보 모험가 시절 한참 구경하다 들어갔고.”
“……한 번만 더 음성 도네이션 그따구로 틀면 싹 다 차단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라?”
펄쩍 뛰며 놀란 한세아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아래를 향해 시선을 내리깐 채 작게 중얼거린다. 어금니를 꽈악 물고 중얼거리는 게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아니면 놀라는 모습이 창피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뭔가 묘한 협박을 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다. 허리에 구름을 낀 높은 탑이 아니라 입구에서 바삐 오가는 모험가들을 향해.
“별다른 검문 절차는 없나요?”
“딱히 없어. 사실 탑은 모험가가 아니어도 들어갈 수 있거든.”
“정말요?”
“그래. 모험가 길드는 죽으러 가겠다는 걸 말릴 정도로 친절하지 않으니까.”
“…에?”
이어지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한세아. 게이머인 만큼 탑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한세아 입장에서 보면 NPC인 사람들에겐 탑은 그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초보 모험가들이 돌아다니는 저층만 봐도 그렇다. 탑 바깥세상에도 야생 동물과 몬스터가 있다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은 그다지 볼 일이 없거든. 짐승은 마을의 사냥꾼이 쫓아내거나 사냥하고, 몬스터는 도시에서 파견된 군인과 모험가들이 처분한다.
정말 재수가 없다면 떠돌이 몬스터들에게 마을이 통째로 전멸당하는 일이 생기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 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보호받지 못하는 화전민 마을 같은 곳들.
평범하게 도시 근처에서 농사짓고 사는 농부들이라면 살면서 본 가장 위험한 존재라 해 봤자 굶주린 들개나 모험가가 실수로 놓친 늙고 병든 고블린 따위가 전부. 그 정도는 마을 장정들끼리 몽둥이를 들고 와서 때려죽일 수 있다.
하지만 탑에서는?
“탑 안에서는 몬스터가 나오고, 그 몬스터는 죽으면 시체가 사라지면서 마석으로 변하지. 바깥에서 등장하는 몬스터와 전혀 다른 방식이야.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어?”
“어… 탑 안에 있는 몬스터가 더 강한가요?”
“아니, 강한 건 아니야. 그냥…, 그냥 많을 뿐이지.”
탑 안에서는 몬스터가 랜덤하게 스폰되서 문제가 된다.
분명 몬스터를 정리하며 나아갔는데 등 뒤에서 몬스터가 다시 등장하고, 소란을 피우면 근처에 없던 몬스터가 뿅! 하고 또 달려들고, 그것들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은 또다시 등장한 몬스터로 막혀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저층이라 해도 모험가들은 파티를 짜서 탑에 들어간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들어가는 길에 포위당하고, 돌파해서 나오는 길에 또 포위당하고,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몬스터가 등장할 수 있으니까.
“바깥에서 고블린 한두 마리는 몽둥이로 때려잡았다고 자신만만하게 들어가는 녀석들이 있어.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고 자랑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지. 1층의 떠돌이 고블린 한두 마리 잡고 손에 마석을 쥐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그렇다고 탑 깊숙한 곳에 들어가 버리면…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가 생기지.”
“어떤 문제요?”
“탑 안에는 특별한 안전지대가 따로 있거든. 그 외의 공간에서는 언제 몬스터가 등장할 줄 몰라. 쉬려고 앉았더니 수풀에서 고블린이 툭 튀어나올 수 있고 싸우는 중에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몬스터에게 뒤를 잡힐 수도 있는 거지.”
게임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랜덤 인카운터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