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75)

 “선배… 모험가, 롤랑?”

 “네에. 마음 같아서는 접수원 카운터에 함께 앉아 있고 싶지만, 모험가를 꿈꾸신다면서요.”

사근사근한 엘리스의 말에 한세아의 눈동자가 나를 스윽 훑는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가슴팍에서 턱 아래쪽의 허공을 흩어보는 것 같은데. 게이머라서 무슨 홀로그램 같은 거라도 보는 건가?

뭐 대단한 거라도 보는지 눈동자가 댕그랗게 커지는 한세아.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엘리스가 씨익 웃으며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롤랑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져 시골 촌년이 입을 떡 벌렸다고 생각하나 본데, 조금 다르다.

방금 눈동자가 분명하게 내 명치 아래까지 내려갔어.

초인적인 육체와 10년의 전투 경험으로 인해 나는 상대방의 눈동자 움직임 정도는 손쉽게 읽어낼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턱 아래에서 배꼽 위까지, 눈동자가 좌에서 우로 다시 좌측 하단으로 반복돼서 움직이는 게 명백하게 텍스트 박스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흩어보는 모양새.

여기가 게임 세상이 아니었다면 나도 엘리스처럼 명성에 눌려 눈을 마주치지 못 하는 초보 모험가라 생각했겠지.

[방송인 ‘한세아’와 합류하여 파티를 맺자 0/1]

눈동자의 움직임만 보면 대충 내 앞에 뜬 홀로그램보단 폭이 넓네. 이건 퀘스트 창이고, 쟤가 읽는 건 캐릭터 정보창 같은 거라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호기심이 쑤욱 몰려든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건 롤랑,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6★ ‘위대한 팔라딘’ 롤랑】의 스탯창일 가능성이 크니까. 남캐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제외하고 스탯과 스킬창을 읽어보면 운영진이 작정하고 밀어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괴물 같은 숫자들.

물론 10년 전에 5초 정도 봤던 스탯창을 전부 외운 건 아니지만, 앞자리 수가 다르다는 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티어 메인 탱커의 5★ 1레벨 체력이 1만 몇천이라면, 롤랑의 6★ 1레벨 체력이 2만 초반대였으니까. 레벨링에 각성에 스킬작 등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순정 1레벨로도 4★ 이하의 어중간한 캐릭터는 전부 씹어먹는 괴물 같은 스펙.

그걸 보았다면 한세아가 나를 거절하는 일은 없을 거다.

 “우, 우와아…!”

 “네에, 그 ‘팔라딘’ 롤랑과 모험을 시작할 기회랍니다?”

 “그, 정말, 저랑요? 파티를 맺어 주시는 거, 건가요?”

그녀가 본 내 정보창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말을 더듬는다. 카메라 드론 앞에서 아무리 적어도 수십 명은 넘을 게 분명한 시청자에겐 말을 더듬기는커녕 멈추지도 않고 나불나불 떠들던데.

엘리스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자꾸 오른쪽으로 쓱쓱 움직이는 걸 보니 채팅창이 저기에 있나 보네. 중앙에 상태창이 뜨고 오른쪽에 채팅창이 뜨는 배치라면 내가 알던 인터넷 방송이랑 별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해서 마음이 놓인다.

금발 미녀가 추천해 준 금발 미남의 씹사기 캐릭터. 방송인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 새카만 흑발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그녀의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나야 그러려고 찾아왔으니까 상관없지. 근데 이쪽 후배님은 아직 등록도 안 한 것 같은데?”

 “아, 맞다! 일단 모험가 등록부터 해줄게요.”

슬쩍 카운터에서 비켜서니 느릿하게 카운터 앞으로 걸어오는 한세아. 등록 절차를 궁금해하는 것인지 카운터 뒤쪽의 선반을 부산스럽게 뒤지는 엘리스에게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그런 한세아의 시선을 받으며 엘리스가 꺼내 든 것은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수정 구슬.

판타지 소설에서 꽤 자주 봤던, 사람이 손을 대면 등급을 알려주는 일종의 판별기였다.

듣기로는 피부에 흐르는 마력을 감지해 패턴을 어쩌구~ 라던데 마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할 순 없었지. 손바닥만 가져다 대면 인간의 능력 알 수 있는 물건이라니? 물론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납득이 되네.

 “자! 여기에 손을 올려보세요. 양손으로 감싸 쥐듯이, 그렇게요.”

 “이러면 될까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운터를 중심에 두고 미녀 둘이 얼굴을 맞댈 기세로 마주 보고 있으니 시선이 한층 더 짙어진다. 새내기의 첫걸음에 대한 호기심도 더해지니 길드 내부의 시선이 전부 여기에 쏠린 것 같네.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길드의 수정구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판별의 결과를 알려 준다. 내부에 환영이 어리는 것도 아니고, 형형색색 다양한 빛으로 등급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다만 새하얀빛이 잠재 능력에 비례하여 밝게 빛날 뿐. 피부에 있는 마력을 읽는다면서 왜 잠재력을 읽는가― 따위의 의문은 게임 시스템 덕에 해소되었네.

 ‘유저가 수정 구슬을 상태창이랑 같이 쓰면 파티 짤 때 편하겠네.’

탑 하나 때문에 세상의 모험가란 모험가는 싹 다 모여 있는 모험가의 도시. 이곳은 중세 배경 주제에 유동 인구가 만 단위에 가까울 정도로 커다란 비상식적인 도시다. 하루에도 수십 단위의 신규 모험가가 들어오는데, 그걸 일일이 정보창을 열어 확인할 수 없겠지.

 “흐음, 나쁘지 않네요!”

 “그런가요?”

수정 구슬에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구슬을 감싸고 있는 손이 환하게 밝아질 정도의 빛을 뿜어낼 뿐. 한세아라는 개인의 재능을 측정한 것인지, 아니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다 적당한 상위권으로 나오는지 좀 궁금하네. 다른 사람의 게임 속에도 나, ‘팔라딘 롤랑’이라는 캐릭터가 있을까?

 “네! 이 수정 구슬이 빛나지 않고 어둑한 사람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거든요. 여기서 조금만 더 어두웠으면 모험가 말고 제 후배가 되라고 권유했을 텐데.”

 “그러면 절차는 끝난 건가요?”

 “원래는 초보 모험가를 위한 기초 교육이 있는데… 그건 심심하신 선배님을 위해 남겨둘게요.”

 “남겨두는 게 아니라 너무 떠넘기는 거 아니야?”

 “에이, 떠넘기기라뇨. 선후배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인걸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게 퍽 얄미웠지만, 외모가 받쳐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기야 심심하다고 초보자를 키우겠다고 말한 상황이니 튜토리얼 담당자가 되어 줄 수밖에 없기도하고. 그나저나 뒤에서 한세아가 작게 혼잣말로 ‘튜토리얼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게 들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 들리나?

하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게임과 관련된 무언가가 보였다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은 중세 판타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려운 물건이니까.

반투명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며 사람을 따라다니는데 혼잣말까지 한다? 그런 꼴을 보였다간 이번 신입 중에 강철의 정령사가 있다느니, 유령을 부리는 마녀가 있다느니 소문이 쫙 날걸.

 “저기….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길드 내부를 촬영하는 카메라 드론을 몰래 눈으로 쫓는 와중 기초 교육에 대한 설명을 다 들었는지 내게 다가오는 한세아. 그녀의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드론이 이동하는 걸 보니 나를 정면으로 찍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드론과 눈을 마주칠 순 없으니 시야를 내려 한세아의 새카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서양 배경인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흑발 흑안의 미녀.

 “그래요, 나도 잘 부탁합니다. 후배님은 이름이?”

 “아, 제 이름은 한……나입니다!”

 “나는 롤랑, 전위를 맡은 전사입니다. 잘 부탁해요, 후배님.”

한세아라는 이름이 판타지 배경에선 써먹기 힘들어서 급히 지어낸 건가.

그나저나 현대인이랑 말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입에 익은 말투가 어색하다고 느껴진다.

인터넷 방송인 한세아, 이제는 초보 모험가 한나가 된 그녀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으니 활발하고 친화력이 좋다고 말하는 게 좋으려나. 길드 건물의 뒤쪽 공터로 가는 중에도 끝없이 질문을 던졌으니까.

 “모험가들이 이 도시에 모이는 이유가 있나요?”

 “길드에서 책정한 등급이 오르면 좋은 점이 뭔가요?”

 “탑을 오르는 모험가들의 파티는 어떻게 구성되나요?”

초보 모험가가 물어보기엔 너무 기초적인 지식. 이 정도 질문 수준이면 사냥꾼 지망생이 왜 사냥꾼은 발소리를 안 내나요? 하고 물어보는 거랑 비슷한 정도로 질문에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

아마 채팅창에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질문이 아닐까?

본인 딴에는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곁눈질이 벌써 수십 번을 넘어 백 단위로 넘어갈 것 같거든. 저렇게 옆을 힐끔힐끔 보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따라오는 게 신기하네.

물론 질문이 아무리 많다 해도 나는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미묘하게 불편한 중세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로 갈 수 있다면 발이라도 핥을 수 있지 않을까.

마석 수도꼭지는 있는데 비누 등 목욕용품 따위는 1000원짜리 일회용품보다 질이 낮다던가, 치킨 등 현대식 요리가 가끔 보이지만 맛은 자취생 첫 요리와 비슷하게 맛이 없다던가, 상하수도가 있어 청결을 유지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 값비싼 마도 문명의 혜택을 못 누려 지저분하고 냄새난다든가 하는 미묘한 불편함.

 “모험가들이 모이는 이유야 당연히 저 탑을 오르기 위함이죠. 어째서인지 탑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시체가 사라지고 마석이 등장하거든요.”

 “등급이 오르면 더 좋은 의뢰를 알선받을 수 있습니다. 카운터 앞 게시판에 있는 의뢰는 모두에게 요청하는 공용 의뢰지만, 등급이 오르다 보면 개인에게 직접 부탁하는 의뢰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런 의뢰는 조건이 더 좋고 보상이 후한 편이죠.”

 “모험가들의 파티야 마음 맞는 대로 모집된다지만… 대부분은 4명에서 5명 정도가 모이는 걸 선호하죠. 그보다 적으면 장기 의뢰에 곤란함이 생기고 그보다 많으면 보상을 나눌 때 떨어지는 양이 적으니까요.”

…까놓고 말해서 모험가 길드의 시스템은 모바일 게임 시스템과 똑같다고 볼 수 있었다. 4인 파티로 도는 필드와 5인 파티로 도는 던전 시스템부터 안 쓰는 캐릭터를 탐험에 보내면 몇 시간 뒤 보상을 들고 오는 것까지.

보모가 된 기분으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하니 눈을 반짝 빛내는 한세아. 게이머로서의 기본 지식은 있는지 내 설명을 곧바로 알아듣고 전반적인 구조에 대해 감을 잡은 것 같은 눈치였다.

 “아! 그리고 지금, 저희 어디로 가요?”

 “길드 뒤편에는 꽤 넓은 공터가 하나 있어요. 음,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곳인데 주로 파티를 결성하기 전 합을 맞춰보는데 쓰이죠.”

그 외에도 등급 높은 미녀 모험가에게 깝죽대던 밑바닥 인생들이 박살 나는데에도 쓰이고. 뒷말은 목구멍 너머로 꿀떡 삼킨 채 나무 문을 열고 공터로 나아갔다. 통나무나 짚단 따위가 잔뜩 쌓여 있는 커다란 운동장처럼 생긴 장소.

역시 사람 많은 길드여서 그런지 한구석에서 통나무를 망치로 퍽퍽 후려치는 남자들의 등판이 보인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좀 사람이 있네. 망치로 통나무를 내리찍으며 손에 무기를 익히는 사람, 짚단으로 만든 엉성한 허수아비에 단검을 던지는 사람, 길이가 다른 창 서너 개를 챙겨 와 훙훙 휘두르고 있는 사람까지.

판타지다운 풍경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한세아. 그런 그녀 앞에 묵직한 통나무 하나를 질질 끌고 와 바닥에 기둥 세우듯 박아 넣었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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