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75)

다 마신 술잔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 두니 한세아에게 몰리던 시선이 꺾여 내게 날아든다. 휴일에는 해가 져서 마스터에게 쫓겨날 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놈이 왜 저러냐는 눈빛.

거기에 이쁘장한 신입이 엮여서 그런지 미묘해진 눈빛이 몇 개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평판 따위가 아니었다. 10년 만에 나타난 변수인데 늦장 부리다 놓쳐 버리면 누굴 탓하겠어.

술기운을 몰아내고 거리를 걷는다.

평소와 같은, 그러나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거리. 게임 요소가 뒤죽박죽 섞여 들어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번잡한 거리가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진다. 10년이라는 세월 간 셀 수 없이 오간 거리지만, 허공에 게임 시스템처럼 보이는 환각 하나 보이니 모든 게 낯설다니.

 ‘…지금은 이런걸 의심할 때가 아니야.’

이 세상의 기묘한 구성에 대한 의혹을 끊어 내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나름 유명 인사인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지만 전부 외면한 채 한세아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아는 척하려는 모험가들을 대충 외면해 버렸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모험가 길드.

이 세상은 모바일 게임에 판타지 RPG 게임을 대충 섞어둔 듯한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이었다. 도시 중앙에 있는 탑에서는 마력석과 다양한 보상을 주는 강력한 인공 몬스터가 등장하고, 이를 사냥하기 위한 모험가들이 도시에 모여든 상황.

그러다 보니 모험가들을 통제함과 동시에 모험가들의 권익을 챙기기 위한 모험가 길드가 거리에 버젓이 존재한다. 탑의 출입증을 관리하거나 전리품을 처분해주고 개인의 의뢰를 받아주는 등 수수료를 쪽쪽 빨아먹는 길드.

이 세상이 정말로 게임이라면, 도시에 처음 도착한 한세아는 모험가 길드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지.

 “와 판타지 배경이라 해서 거리에 말똥 같은 게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이쪽 거리는 거의 현대풍이네요. 튜토리얼 시작 때 타고 온 마차는 낡고 허름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행동력 참 좋은 여자네.

혹시 카메라에 뒤따라 가는 게 보인다면 스토커처럼 비칠까 다른 길을 통해 최대한 빨리 걸어왔는데, 벌써 모험가 길드 간판 앞에서 쫑알 대고 있는 한세아. 남들 눈에는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이 보이지 않는지 꿈에 푹 젖은 소녀 모험가처럼 보이는 듯하다.

딸자식 많은 여관 아줌마가 되게 걱정 어린 눈빛으로 혼잣말하는 한세아를 쳐다보고 있거든.

…이쪽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이 좀 많은데 입이 가볍네. 일종의 필터링이라도 있나? 반투명 카메라 드론을 못 보듯이 튜토리얼이나 NPC 같은 단어는 넘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거지.

안 돼.

이 세상이 게임이며 내가 NPC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자 모든 사고방식이 그쪽을 향해 쏠린다. 탑이 있는 도시와 바깥세상과의 극명한 차이, 현대 문물에 가까울 정도로 편리한 마도 문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탑의 존재….

 “음? 오늘은 휴일 아니신가요?”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순 없잖아.”

 “마스터가 기뻐할 만한 말을 하시네요. 혹시 도박에 손을 대신 건 아니죠? 밑천이 필요해서 급하게 한탕 뛰러 왔다던가.”

 “에이, 돈이 궁해서 왔으면 여기로 안 오고 게시판으로 달려갔겠지.”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려는 정신을 다잡고 접수원, 엘리스에게 향한다. 길드의 얼굴마담답게 수려한 외모의 금발 벽안을 지닌 미인. 이렇게 보니까 또 의심스럽기 시작하네. 탑이 있는 모험가의 도시 밖, 농민들은 피부 관리 따위 없이 햇볕 아래에서 혹사당해 대부분 피부가 삭아 있거든.

하지만 모험가 도시의 여자들은 어째서인지 뽀얀 피부에 주근깨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미녀들이 꽤 있다. 엑스트라와 조연과 주연의 차이인가?

 “그러면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지금쯤이면 한창 취해서 늘어져 있어야 하는 분이.”

 “혀가 너무 날카로운 거 아니야? 간만에 봤으면서 왜 그래.”

 “간만에 보니까 그런 거죠.”

안면이 있는 접수원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슬금슬금 시선이 모인다. 이래 봬도 10년 동안 명줄 질기게 살아남은 베테랑 모험가. 길드에 죽치고 있는 초짜들이 선망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편리하게 만들어진 판타지 세상이지만, 몬스터와의 싸움은 다크 판타지처럼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발달한 마법력 덕분에 중세 지구보다 인구가 많은 것까진 좋은데… 그 많아진 인구 대다수가 몬스터한테 갈려 나가는 게 이 꿈도 희망도 미묘하게 박살이 난 판타지 세상이다. 평범한 농민이라면 늑대만 만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데,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의 몬스터 무리도 인간을 노리고 마을을 습격하니까.

 “그래서, 이른 시간에 길드에 오신 이유가 뭐예요?”

엘리스의 호수처럼 맑은 벽안이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나를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내 쪽으로 자연스럽게 몰리는 이목. 길드의 아이돌이라 불러도 될 미녀와 10년 차 베테랑이 카운터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모험가들은 정보의 편린이라도 주워듣는 게 이득이란 걸 알고 있는 놈들이 잔뜩 있으니까 일부러 유도한 것이지만.

 “이른 시간이라니, 해가 중천에 떴는데.”

 “해가 지는 시간이 아니니까 이른 시간이죠.”

 “뭐, 그건 맞지. …사실 심심해서 놀러 왔어.”

 “심심하다고요?”

 “그래. 뭐… 후배나 하나 잡고 키워볼까 해서.”

미묘하게 현대의 냄새가 묻어 있는 체계적인 길드 시스템. 그중에는 선배 모험가가 후배 모험가를 도와주는 일종의 멘토링 시스템 또한 존재했다. 표면적으로는 격전지에서 벗어난 은퇴 모험가가 용돈 벌이를 위해 아래층의 개인 교관이 되어 주는 방식이지만… 게임 시스템을 전제로 하면 이야기가 조금 바뀐다.

이건 게임사에서 뉴비를 배려하기 위해 넣어 둔, 첫 동료 영입 이벤트가 아닐까?

시작하자마자 뭣도 모르는 농부 출신 촌뜨기 한스와 파티를 맺는다면, 어지간한 게이머들은 1층 구석에서 고블린 똥이 될 테니까. 축복 받은 육체를 지닌 나도 전투에 익숙해지는 덴 거의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VR 게이머들 대다수는 나보다 더 오래 걸리겠지.

그러니 내가 노리는 위치는 튜토리얼 뽑기에서 주는 이벤트 5★ 캐릭터 같은 느낌.

초반에 공짜로 주면 절하면서 파티에 무조건 끼워 넣게 되는 초반 스토리 날먹용 캐릭터. 물론 내 육체와 능력을 생각해 보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데려가는 인권캐 정도라고 자신할 수 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힘숨찐을 연기해야 했다. 완전히 약한 건 아니고, 적당한 선배 모험가 정도로.

나 혼자 압도적으로 필드를 밀어 버리면, 방송의 재미 때문에 나를 포기하면 어떻게 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한세아가 방송인이라는 점이다. 게임 공략에 진심인 여자라면 내 압도적인 능력치에 반해 끝까지 함께 하겠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방송인이라면 밑바닥 스타트를 위한 예능형 파티를 짤 수도 있으니까.

 “세상에, 그 게으른―”

 “저기, 안녕하세요!”

 “어머?”

대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문을 벌컥 열고선 깡 좋게도 카운터까지 다가와 인사를 하는 한세아. 이국적인 흑발 미녀의 등장에 엘리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뜨인다.

길드 접수원 중 미녀로 소문난 엘리스. 금발 벽안의 미녀라던가, 길드 사무원 복장 아래 가려진 거유라는 점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굳이 그녀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후배 육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딱 하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모험가가 되기 위해 이 도시에 오신 분인가요?”

 “네? 아, 네!”

 “흐음, 접수원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으시죠?”

 “네. 저는 꼭 탑에 가고 싶어서요.”

 “그러면… 마침 타이밍이 딱 좋네요.”

접수원 엘리스는 외모를 심각하게 따진다. 못생긴 사람에게 차갑게 대하는 게 아닌, 특출난 미남 미녀에게 엄청나게 살갑게 대해주는 방향으로.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일정치 이상의 매력 수치에게 호감도 보정이 들어 있다고 봐야겠지.

 “어때요 롤랑 씨?”

 “…롤, 랑?”

 “뭐가 어때?”

 “여기 있잖아요, 예쁘고 귀여운 후배.”

그러니 길드에서 초짜들은 감히 말도 붙이기 힘든 대선배 모험가인 내게, 도시에 처음 온 검증되지 않은 촌뜨기 후배를 당당하게 추천하는 거고.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퀘스트를 위해 한세아를 졸졸 따라다니기 위해서는 그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고 마차를 타며 이동, 도시의 입구로 들어오는 게 튜토리얼의 시작. 불편한 마차와 마차 창밖 시골 풍경과는 다르게 은근 현대식으로 세련되어 있는 모험가 도시를 보여 준다.

지나다니는 시민과 모험가의 복장을 비교하며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유도하다가 그대로 길드 안으로 진입했겠지. 길치가 아니면 이 커다란 건물을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손 때 탄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험가들, 의뢰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시판, 말끔하게 정돈된 깨끗한 카운터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금발 벽안의 미녀― 아마 여기서 시청자들이 폭발하듯 반응하지 않을까.

판타지 세상에 떨어진 지 10년이지만, 사내 새끼들 반응이야 전생이나 이쪽이나 똑같을 거 아니야.

피부 곱고 얼굴 작고 가슴 커다란 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호의를 가득 품고 선배 모험가를 추천해주는데 그걸 거절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 같은 여자여도 저 어여쁜 미소 앞에서는 싫은 소리를 못 하거든.

게이머 한세아도, 방송인 한세아도 이걸 거절할 리 없다.

뭐, 거창한 척 이야기하지만 사실 논리는 간단했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말 걸면 수상하지만 미녀 접수원이 알선해주면 개연성이 생기잖아. 그걸 시청자들이 더 좋아하기도 할 테고. 미녀 방송인인 만큼 그 뭐냐… 육수라 불리는 사심 가득한 남자 시청자가 많겠지. 그러니 남자인 내가 접근하는 것보단, 미녀 접수원 원 쿠션을 통해 접근하는 게 더 좋아 보였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