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영과 일훈 –셋- (4/7)

남영과 일훈 –셋-

 1 

 “저기…… 기억 안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고등학교로 진학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시점. 맨 앞자리에서 자주 나를 힐끗힐끗 보던 여자애가 수줍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차분하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 내 가슴께와 턱 근처를 배회하는 커다란 눈. 울림이 적은 얇은 목소리. 내성적인 말투.

 “아……”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기억 나?”

 하마터면 ‘코토’라고 말할 뻔했다. ‘코토’는 이 여자애의 초등학교 때 별명으로 수업시간에 코로 토하는 바람에 붙여진 돼먹지 못할 거였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 별명을 싫어했었지.

 “반갑다.”

 웃으며 인사하고 명찰을 확인했다.

 김가나.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이런 이름이 있었지, 하고.

 “응, 반갑다. 처음에 너 보고 바로 말 걸어볼까 했는데…… 왠지 네가 나 기억 못하는 거 같아서.”

 말끝을 흐리며 부끄러운 듯 웃기에 “기억 나. 분위기가 달라져서 못 알아 봤어.”하고 냉큼 말했다.

 “분위기가 다르다니…… 어떻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묻는데 시선은 여전히 내 가슴에 고정된 채, 양 볼은 복숭아 같은 핑크빛이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은 대개 정해져 있다.

 “더 예뻐졌네.”

 연한 핑크색이던 것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라 흐드러진 붉은 색이 됐다.

 역시나, 정답.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냐.”

 장난스럽게 놀려주고 씩 웃었다. 그제야 날 올려다보던 가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한 곳은 내 입. 정확하게는 송곳니가 빠지고 없는 빈자리.

 고등학생이 된 후 치아가 왜 그러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 가나는 묻지 않았다. 염려하는 기색으로 살피듯 보고, 보지 않은 척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가 하나 없는 정도로도 사람들의 안색은 버라이어티하게 달라진다. 그것을 보는 건 꽤 재미있다. 같은 질문을 매번 받는 건 조금 지치지만.

 “저기…….”

 “송일훈.”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가나가 입을 뗐을 때, 불렸다. 누구에게 불렸냐면, 남영. 울림이 풍부한 미성. 잘 익은 대추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목소리. 반사적으로 돌아보고 돌아보기도 전에 일어났다.

 남영은 교실 뒷문에 기대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심한 눈길로 나를 보고 “체육복”하고 말했다.

 “안 가져왔어?”하고 묻자 “까먹었어.”하고 손을 내밀었다. 어서 달라는 듯.

 아주 잠시, 고민했다. 가나에게 물어볼까. 나 대신 빌려줄 수 있는지. 우리 반도 오늘 체육이 있으니까 체육복을 가져왔을 거다. 사이즈도 얼추 비슷할 테니 내 것을 입는 것보다 활동하기도 편할 테다. 하지만 고민은 찰나뿐으로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낸 나는 남영에게 그것을 건넸다.

 “땀 흘리지 마.”

 “웬 깔끔.”

 심각해서 심각하게 당부했더니 남영은 코웃음을 치고 빼앗듯 체육복을 받아갔다. 남영이 돌아서며 일으킨 바람에서 남영의 냄새.

 상반신과 하반신이 서로 다른 이유로 동시에 긴장했다.

 미쳤네, 송일훈.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듯 쓸어 올리고 뒷문에 이마를 쿵 박았다.

 “누구야?”

 등 뒤에서 가나가 묻기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사람.

 * 

 그러니까 내가 미치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것은 아마 봄. 열여섯이 된 봄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남영은 조금 자랐다. 키가 자랐고 손발이 자랐고 머리카락이 자랐고 가슴도 골반도 엉덩이도 예전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다. 소년처럼 밋밋하던 것이 여성스러워진 것,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남영을 보는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새삼스러워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영은 남영,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비범하고 차가운 애. 그리고 가끔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사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앞으로도 같을.

 비가 내렸다. 화창한 날 쏟아진 소나기로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던 남영의 반 애들이 그 비를 쫄딱 맞고 교실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이동수업이 있어 2층으로 내려가다가 올라오던 남영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평소처럼 인사했고 평소처럼 무시당했다. 어째서인지 남영은 하복 체육복을 입고 있었는데 비를 맞은 탓에 속옷이 비쳐 보였다. 브래지어 보인다고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가고 있는데 뒤에서 작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봤냐?”

 “뭘.”

 “7반 최남영.”

 “걔가 누군데.”

 “몰라? 작년에 나랑 같은 3반이었는데.”

 “너랑 같은 반이었던 애를 내가 어떻게 아냐.”

 “좀 유명한 앤데. 암튼 지나갈 때 브래지어 보이더라.”

 “씨발,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검정색. 존나 야해.”

 “의리 없는 새끼. 그래서 꼴리냐?”

 “어. 존나. 걔 좀 예뻐진 것 같애.”

 “너 눈 낮잖아.”

 “아니야, 안 예쁜데 이상하게 예쁘다니까. 나 요즘 걔가 빨아주는 상상하면서 하는데……”

 뒤돌아섰다. 열심히 숙덕거리던 두 녀석이 멀뚱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개중 한 녀석이 “아, 씨……”하고 난처한 듯 표정을 굳혔다.

 “뭘 빨아주는데?”

 묻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한 놈이 쓰러지자 다른 한 놈이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왜 이러냐고, 갑자기 처돌았냐고, 개새끼, 또라이 새끼, 온갖 욕을 해대는데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대 치면 두 대 맞고 또 한 대 치면 세 대 맞고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게 분노였는지 흥분이었는지도 모르겠고 호르몬 이상 때문인지 뭐에 씌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남영을 봤던 눈을 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야하다고 말했던 혀를 짓뭉개고 싶었고 더러운 상상을 하는 뇌를 갈아버리고 싶었다.

 빨아주다니 뭘 빨아주는데. 걜 가지고 무슨 더러운 상상을 하는데. 대체 왜 남영인데. 왜 하필 남영인데. 왜 너 같은 새끼 눈에도 걔가 예뻐 보이는데.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지 못했다. 대신 죽을 듯이 맞았고 부모님이 호출을 당했다. 은숙 씨의 눈물을 봤고 아버지의 설교를 들었다. 남영은, 남영은 내게 입을 벌려보라고 했다. 입안을 무심히 살피고는 이번엔 안 빠졌네, 라고 말했다. 어쩐지 조금 실망한 기색이어서 앞니라도 하나 부러뜨릴걸…… 하고 병신 같은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남영의 꿈을 자주 꿨다. 깨고 나면 까맣게 사라져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가끔은 기억나는 꿈도 있었다. 기억나는 꿈을 꾼 날엔 백퍼센트의 확률로 몽정했다.

 예전엔 무방비하고 무심한 남영 때문에 불안해지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미친 새끼가 된 나 때문에 불안해졌다. 남영과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아도 불안했다. 함께 있으면 내가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고 함께 있지 않으면 세상이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다. 어느 쪽이든 싫었고 어느 생각이든 정상이 아니었다.

 평범해지고 싶다고, 다만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었는데, 이젠 평범한 게 대체 뭔지, 그것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0 

 첫 모의고사 성적이 나왔다. 수능 모의고사라는 건 내신에 반영되는 학교 시험과는 다른 모양인지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꽤 높은 점수가 나왔다. 이래서야 올해의 냉소는 글렀다. 하긴 이젠 벼락치기 같은 건 그만할 때도 됐다. 대학 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일훈이 첫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한다. 각 교과목 선생들이 1반 송일훈이 만점을 받았다고 남의 반에 와서까지 떠들어댔다. 그 애가 알면서도 일부러 틀리는 병신 짓을 종종 해왔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선 조금 의외였다. 어쩌면 그 애도 똑같이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고.

 앞으로 3년. 3년만 더 버티면 성인이 된다. 나는 생일이 빠르니까. 성인이 되면 혼자 살 수 있다. 혼자서, 나라는 사람은 온전히 내 책임. 죽어도 살아도 내 책임. 홀가분하게 내 책임이 된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므로 자유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일훈과도 헤어지겠지. 요즘 일훈을 보다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헤어지겠지.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않겠지.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결국 헤어지겠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삶을 살겠지.

 그런데 쟤는 왜 저럴까. 꼭 헤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갚을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갚지도 못할 빚을 자꾸만 자꾸만 안긴다. 마치 빚이 아닌 것처럼 떠안기는 통에 나는 그것에 차츰차츰 무뎌지고 있다. 너무 사소해서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목 끝까지 차올라 넘실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매일매일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는 물론이고 쓸데없는 오지랖까지. 배려심 넘치는 사람들이 으레 저지르는 행동들. 그러니까 나를 위해 한 행동들 때문에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그런 행동들.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아무튼 나는 그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일훈의 배려를, 그 애의 사소한 희생을, 당연시 하는 사태에 이르러 있다. 하지만 오늘,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그 애의 그런 행동들은 그 애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나만 특별한 게 아니니 따로 부채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

 타인의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에 맞춰주는 것. 그것은 그 애의 특기였는데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하고 나 자신에게 냉소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영어시간이었다. 복도 저 끝에서부터 바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다가 우리 반을 스치고 지나가는 발소리의 주인공은 일훈이었다. 중3 여름방학 때 키가 부쩍 자란 일훈은 이미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어 있었고 그런 일훈의 상체가 복도 쪽 창을 통해 고스란히 보였다. 일훈의 등에 업혀 있는 누군가도.

 기다란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학생이라는 것만은 누구나 알 수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몇몇이 뭐야? 뭔데? 송일훈 아니야? 업혀 있는 앤 누군데? 하고 떠들어대는 통에 영어가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짧은 해프닝.

 그리고 점심시간에 만난 일훈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체육 있었어?”

 없다는 걸 알면서 물었다.

 “아니.”

 “근데 웬 체육복?”

 “교복이 더러워져서.”

 “어쩌다가?”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웬만한 건 묻지 않아도 혼자 잘만 떠들면서 물어도 대답이 없다는 건 즉, 그런 거겠지.

 뭔가 켕긴다거나, 뭔가 담아두고 싶다거나.

 비밀이거나, 비밀이 아니라도 본인 입으로 말하기는 싫은 것.

 말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캐묻는 성미는 아니라서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데 일훈이 자신의 식판에서 계란말이를 집어 내 식판으로 옮겼다.

 영양가 많고 씹기 편해서 자주 먹지만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바보 같은 일훈은 내가 계란말이에 환장하는 줄 안다.

 평소엔 군말 없이 먹지만 오늘은 먹고 싶지 않아서 도로 일훈의 식판에 갖다 놨다.

 왜? 라고 묻듯 보는 일훈에게 “안 좋아해.”하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싫어해?”

 당황한 얼굴로 바보 같이 묻기에 “안 좋아한다고.”하고 다시 일러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따로 먹자.”

 “갑자기 왜?”

 “네 친구들이랑 먹어. 나도 그럴 테니까.”

 빚을 지든 친절과 배려를 받든 그건 모두 편할 때의 얘기다. 귀찮아도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던 건 그것이 편했기 때문. 더 이상 편하지 않다면 받을 이유가 없다. 왜 갑자기 편하지 않게 됐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

 식판을 들고 가려는데 일훈이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내 손목을 힘껏 잡았다가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가 놨다가 마지막엔 내 교복 소맷자락을 잡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로 꼭 붙잡고 “뭐 기분 나쁜 거라도 있어?”하고 물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어쩐지 떨리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

 기분 나쁜 거라니. 왜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너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말이야.

 생각하는 중에 정말로 기분이 나빠져 버려서 나쁜 말이 하고 싶어졌다.

 나쁘게…… 일훈이 상처받을 만한 말을 아주 나쁘게 하고 싶어졌다.

 “너 지금 이러는 게 기분 나빠. 징그러우니까 손 좀 치워 줄래.”

 내뱉고 벌레를 털어내듯 팔을 흔들었다. 그렇게나 꼭 붙잡고 있었는데, 있는 힘껏 붙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일 뿐이었는지 일훈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일훈을 두고 식당을 빠져나오면서 거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북하다고. 체하지도 않은 주제에 거북하다고.

 여기서 내가 토해버리면 너는 어떻게 나올까.

 왠지 웃음이 나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네가 뭔가를 해도 하지 않아도 볼만하겠지, 하고.

 다시 영어시간으로 돌아가서.

 3교시 영어가 끝나자마자 1반으로 몰려갔던 여자애들이 교실로 돌아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송일훈이 업고 뛰었던 애는 가나라는 여학생이라고. 수업시간에 갑자기 토한 가나가 움직이지 못하자 일훈이 업고서 보건실로 뛰었다고. 업고 뛰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토하는 바람에 일훈의 교복이 토사물로 범벅이 됐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러니까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다. 여자애들이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떠들어댔으니까.

 기분이 나빴냐고?

 나빴는지도 모르겠다.

 왜 나빴는지 정말로 나빴는지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숭이나 떨어대고.

 정말로 징그러운 사람은 일훈이 아니라 나인지도.

 1 

 남영은 원래도 차갑지만 훨씬 더 차가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남영은 웃는다. 그럴 때 외에는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오늘, 남영의 그 미소를 봤다.

 아니, 미소라고 해도 될까…… 냉소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이겠다.

 다시.

 오늘, 남영의 그 냉소를 봤다.

 명백히 나를 향한.

 점심시간, 왜 체육복을 입고 있느냐고 남영이 물었다. 체육 수업도 없고 축구나 농구 내기도 없는 날 체육복을 입고 있었던 이유는 교복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교복이 어쩌다 더러워졌냐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점심시간이었고, 점심시간이니까 밥을 먹고 있었고, 밥을 먹고 있으니까 더러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밥을 먹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 이유로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네가 웃었다. 아주 짧은 순간, 아주 차가운 미소.

 실수했다는 건 바로 알아챘다.

 수습했어야 했나.

 오후 수업 내내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 생각에 골몰하느라 수학시간에 두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수학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묻자 “가나 걱정이요.”하고 앞자리 영태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픈 애를 업고 보건실에 데려다 준 게 이렇게 화젯거리가 될 일인가. 90킬로그램은 족히 나가 보이는 영태가 토하고 쓰러졌더라도 나는 똑같이 업고 뛰었을 건데?

 중3 수련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 같은 반응들은 아니었다. 등산을 하던 중에 발목을 다친 남학생을 업고 산을 내려갔었다. 하산 중에 수십 명의 학생들과 마주쳤지만 아무도 우리를 보고 낄낄거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유독 이번 일로만 다들 성가시게 굴까. 가나가 여자라서?

 유치한 걸 좋아하는 편이고 악의에 가득 찬 유치함조차 귀엽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이때는 좀 진절머리가 났다.

 가나가 조퇴하기 전부터 이미 몇 번이나 놀림을 당했고, 놀림의 원인이 된 일, 그러니까 내가 가나를 업고 보건실까지 달려간 일은 벌써 다른 반에까지 소문이 나 있는 상태였다.

 착한 척이라고 비아냥대는 것도 좋고 사실을 부풀려 미화시키는 것도 좋고 악의적으로 깎아내리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가나와 그런 식으로 엮어 장난을 치는 건 피곤했다.

 초조해서 피곤했다.

 남영에게 괜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에 피곤했다.

 무서웠다.

 남영이 차갑게 웃어서.

 달걀말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앞으로 점심은 따로 먹자고 말해서.

 징그러우니까 손 좀 치워달라며 마치 더럽다는 듯이 내 손을 뿌리쳐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징그럽다고. 세상 징그러운 놈이라고. 그런 내 본질을 그 애에게 들킨 것만 같아서 초조하고 무서웠다.

 남영의 차가운 미소가 질투 같은 귀여운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을 세상 저쪽으로 확 밀치는 듯한 미소였다.

 너도 별수 없구나, 라는 듯한.

 너도 저쪽에 속한 사람이구나, 라는 듯한.

 너도 이젠 필요 없어, 라고 말하는 듯한…… 냉소였다.

 방과 후, 남영을 기다렸다. 본체만체 무시하고 가는 남영을 쫓아가 나란히 걸었다. 늦은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발치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교복이 더러워진 건…….”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데 남영이 휙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심상한 얼굴로 내 말을 잘라먹듯이 “너 때문에 나 따 당해.”하고 말했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던 일. 남영은 원래 그런 성격이고, 나는…… 굳이 나 때문이 아니어도 남영은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 같은 거 사귀는 성격 아니잖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중학교 때처럼 맞기도 하고 그러는 걸까. 나 없는 곳에서 나 모르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나.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빠르게 물었다.

 “누가 괴롭혀?”

 묻고 보니 정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럭 겁이 났는데, 남영은 “괴롭히든 말든.”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도 너 이러는 거 안 좋아해.”

 이 역시 새삼스러웠다.

 은숙 씨는 처음부터 남영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부자(父子)가 조그만 여자애 하나 때문에 쩔쩔맨다고 자주 퉁명스럽게 불평하곤 했다. 남영이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고 별반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어서 저런 성격이라 다행인 점도 있네, 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은숙 씨…… 엄마는 원래 좀 예민하잖아.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많은 사람이니까. 그보다 누가 너 괴롭히냐고.”

 남영이 남몰래 은숙 씨를 신경 쓰고 있었다 한들, 그건 차후에 생각할 문제고 우선은 이거였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목적어도 없이 다짐하며 남영을 쳐다봤다.

 걸음을 멈춘 남영이 “너.”하고 툭 던지듯 말했다.

 “니가 괴롭히잖아.”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보며 “고등학교는 편하게 다니자.”고 어쩐지 조금 지친 것 같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따라오지 마.”하고 돌아서서 걸었다.

 자동적으로 따라가려던 발을 억지로 억지로 멈춰 세웠다.

 남영을 괴롭히는 사람은 나.

 가만두지 말아야 하는 것도 나.

 나였다.

 0 

 또또라는 이름의 개가 있었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말티즈였는데 5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주쯤 뒤에. 할머니 없는 세상 따위 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죽어버렸다.

 또또는 할머니가 아닌 내 개였다. 열 살이던 해의 가을, 아빠가 내게 주었던 생물.

 “장 씨가 그러는데 애들 정서발달에는 동물을 키우는 게 좋다네.”라고 아빠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년은 어째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고, 모지리 아닌가 싶다고, 할머니가 틈만 나면 구시렁댔으므로 아빠는 그걸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로 울지 않는지 또 웃지 않는지 그건 관심 밖이었다. 관심 밖이었으므로 알지도 못했다. 할머니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몰랐으므로 나를 그런 얼굴로 보지 않고 다만 평범하게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앤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성적은 어느 정도나 받아오는지 친구는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장 씨가 그러는데”로 시작되는 말을 자주 늘어놓던 사람.

 장 씨가 그러는데…… 장 씨 아들이…… 제수씨가 글쎄…….

 그리고 할머니를 어린아이처럼 ‘엄마, 엄마’라고 부르던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내게 준 개도 싫지 않았다. 물론 좋지도 않았지만.

 할머니는 또또를 싫어했다. 귀찮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고 매일 또또를 구박했는데 또또에게 또또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고 귀찮다고 타박하면서도 또또에게 밥을 주고 물그릇을 갈아주고 목욕을 시키고 털을 빗겨준 것도 할머니였다.

 그래서 또또는 자기를 싫어하지 않는 나보다 자기를 싫어하는 할머니를 훨씬 더 잘 따랐다. 아빠도 데면데면 귀염성 없는 나보다 장 씨 아저씨의 아들이나 부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주지 않으면 받지도 못하는 것.

 애정은 그런 거였다.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그런 거였는데…….

 고등학교는 편하게 다니자고, 따라오지 말라고 한 것이 우습게도, 일훈은 여전히 나를 따라 다닌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그 애의 관심과 애정.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그 오지랖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듯.

 빚을 지는 상황을 편하게 이용해 오다가 갑자기 불편해진 이유를 쭉 생각해 봤는데 나는 아마 독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 혼자 전부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결론 내렸다. 주지도 않았는데 받고 있는 애정을. 귀찮지만 편하고, 때론 달콤한 그것을.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무리하게 주어져서. 무리하게 주어진 것을 무리하게 받아주고 있으니까 그건 특별히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뻔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어, 필요 없어, 라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같은 생각이므로 따라다니는 일훈을 철저히 무시하는 중이다.

 일훈은 예전처럼 맹렬하다. 맹렬하고 무겁다. 가벼운 장난기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겁게 진지하다. 무겁게 진지하다는 것과 맹렬하다는 것. 둘은 아귀가 딱 들어맞게 어울려서 조금 무섭다.

 무섭지만 나만을 위한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소용없어.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만 하고 말해주지는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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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말고사를 앞두고 하복을 입는 계절이 왔다. 하복 상의는 희고 얇은데 여학생 건 짧기까지 해서 디자인이 왜 이 따위야 싶을 만큼 아슬아슬하다. 희고 얇고 짧은 교복 상의와 회색 체크무늬의 마찬가지로 얇고 짧은 교복 하의를 남영은 무방비하고 아슬아슬하게 입고 다닌다.

 보고 있으면 침이 말라와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던 어느 아침, 은숙 씨에게 남영이 하복 좀 새로 맞춰 주라는 얘기를 했다가 별스럽단 책망을 들었다.

 “교복 맞춘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새로 맞추니?”

 “너무 짧잖아.”

 “요즘 애들은 다 저렇게 입는데 뭐가 짧다고 그래. 어린애가 꼰대처럼, 별스럽다 얘.”

 별스럽든 말든 새로 맞춰 주라고 고집을 부리려는데 남영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고는 나를 한번 서늘하게 쳐다봤다.

 죽을래? 닥쳐라 좀.

 그런 눈빛.

 남영과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내가 남영을 쫓아다니고 남영은 나를 무시하던 때로. 따져보면 그러지 않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지만 그래도 남영은 조금씩 나를 허용하고 있었다. 분명, 올봄까지는 그랬다.

 ‘니가 괴롭히잖아.’

 그래서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처참하게 모두 실패. 모든 시도와 노력이 결국 무위로 돌아가는 허무한 경험을 했다.

 괴롭혀서 미안해, 하고 남영의 뒤통수에 대고 매일 중얼거린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괴롭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제멋대로 굴면서 말로만 미안해하는 징그러운 괴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스스로 몸집을 더 부풀려버린 괴물.

 그 괴물이 나다.

 남영이 나를 무시하는 건 내가 괴물인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 송곳니 부러진 거 최남영 때문이라며?”

 옆 반인 애가 내 앞에 털썩 앉더니 물어왔다. 이름은 선화. 가나와 단짝인 듯 자주 우리 교실에 놀러 와서 죽치고 있다. 맹랑하게 물어오는 선화 옆에서 “야, 하지 마.”하고 가나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만류한다.

 그렇게 말려서 씨알이나 먹히겠냐, 싶은 마음으로 둘을 바라봤다.

 “걔 고아라서 너네 집에서 같이 사는 거라던데. 너도 많이 고달프겠다.”

 “내가 왜 고달픈데?”

 “그렇잖아. 걔 좀 이상해서 네가 돌봐주는 거 아냐. 아는 애들은 다 알던데. 그치?”

 가나에게 동의를 구하듯 선화가 물었지만 가나는 “그만하래도.”하고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계속 말리는 시늉만 했다. 이 대화가 불편한데 선화를 말리긴 해야겠고 말릴만한 힘은 없고 그래도 애를 쓰는 모습.

 문득,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나는 옛날에도 저랬지, 하고.

 연약하고 수줍어하고 사려 깊고 내성적이고.

 “걔네 반 애들이 그러던데, 걔 진짜 이상하대. 웃지도 않고 화도 안 내고 무슨 싸이코패스 같다던데.”

 “싸이코패스에 대해서 잘 알아?”

 웬만하면 잠자코 있으려 했는데 결국 묻고 말았다.

 웃으면서.

 사실은 화가 났는데 아닌 척, 능글능글 음흉하게 웃으면서.

 “어?”

 살짝 당황해하던 선화는 “이기적이고 감정도 없고 공감력 떨어지고 뭐 그런 사람이 싸이코패스 아냐?”하고 그런 질문을 왜 하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다 치고. 그럼 싸이코패스는 자기가 그렇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릴까, 숨길까.”

 “몰라. 내가 싸패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쏘아붙이는 선화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가나가 “이선화, 진짜.”하고 발을 구르더니 단단히 삐친 기색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르면 위험하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가나 쪽을 보며 계속 눈짓을 보내던 선화가 “넌 알아?”하고 물었다.

 “잘은 몰라도 한 가지는 알아.”

 “뭐?”

 “싸이코패스일 확률은 최남영보다 내가 더 높다는 거. 통상적으로 나 같은 사람을 더 조심해야 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번지르르한 사람.”

 입을 다문 채 잠시 나를 보던 선화가 픽 웃었다.

 “얘 웃기네. 자기 입으로 자기가 번지르르하대.”

 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눈을 치켜떴다.

 “너 같은 애가 여자들한텐 위험하긴 하지. 얼굴값 하게 생겨 가지고 헤프기까지 하고.”

 고개를 돌려 잠시 가나 쪽을 살피더니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김가나 순진한 애니까 너무 잘해주지 마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하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하고 미끄러지듯 의자에 기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잘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나저나 내가 가나한테 뭘 얼마나 잘해줬다고 저 유난을 떨까.

 별로 그런 기억이 없는데.

 가나를 보건실에 업어다준 일로 놀려대던 놈들도 이젠 잠잠하기만 하다.

 남영의 태도가 바뀐 게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건 나만의 착각인지 뭔지, 다만 시기가 공교로웠을 뿐. 남영을 괴롭히는 건 나. 그걸 알아도 멈출 수 없는 나.

 이유가 뭐든 현실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현실이 내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리를 길게 뻗고 의자에 거의 눕듯이 기대앉아 멍하니 천장을 봤다.

 재미없다. 어떻게 한 번을 같은 반이 안 될까. 너무하다. 너무해. 너무 가혹해…….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시선을 내렸는데 가나와 눈이 마주쳤다. 쭉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왜?’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더니 시뻘개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참 내성적이네.

 가나를 보면 그 생각뿐이고, 그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남영이 떠오른다.

 남영의 첫인상이 그랬지. 내성적이고 수줍은 줄 알았지.

 전혀 아니었지만.

 최남영이 싸이코패스라니 그냥 웃고 만다.

 니들이 그러고 떠들어봐야 걘 상처받지 않아. 신경도 안 써. 걔가 그런 말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면 난 질투로 미쳐버릴걸.

 관심 받는 것도 괴롭히는 것도 나만. 오직 나만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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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방학을 집안에서만 보냈다. 보충수업은 필요 없으니 받지 않겠다는 내 의지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그리고 담임에게 가까스로 전달되었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했다. 급할 거 없어. 학비 때문이라면 신경 쓸 거 조금도 없다. 네 의사를 존중하겠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했으면 좋겠구나. 남영이 넌 공부도 잘하잖니.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아저씨와의 대화는 이제 2주일에 한 번으로 주기가 길어졌다.

 대화랄까…… 개인 상담 같은 거. 아저씨에게 일대일 상담을 받는 비용은 꽤 비싸다고 들었다. 아저씨는 그게 직업이니까. 나는 프로 상담사에게 공짜로 멘탈 관리를 받고 있는 셈이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그렇다는 얘기고 정상인지 아닌지 여전히 관찰되고 있는 것, 단지 그뿐일지도 모르지만.

 뭐든 나를 좇아 하려는 일훈도 방학 보충수업이나 특강 따위는 듣지 않았다. 대신 중국어와 스페인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보충수업을 받든 언어를 배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아주머니의 강압 때문이었다. 일훈은 여름방학 내내 중국어와 스페인어를 배우고 내가 외출할 때마다 따라 다니고 간혹 아저씨와 새벽 낚시를 가고 아주머니에게 면박을 들어가며 아들노릇을 하고, 그러느라 친구는 만나지 않았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묘하게 또래 친구를 등한시하는 느낌. 의무감으로 친구를 사귀는 느낌. 그런 오만하면서도 비틀린 부분이 그 애에게는 있다…… 라는 것을 최근에 깨닫게 됐다.

 순진해빠진 송일훈 주제에…….

 의무감만으로 관심을 주고 선행을 베풀다니, ‘좋은 사람’의 표본인 아저씨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의해야 될 사람.

 나만을 위한 특별한 것이 아니면 필요 없어.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 

 방학이 끝났는데도 날은 여전히 무더워, 하루 종일 책상 위에 늘어져 있다가 조퇴를 했다. 담임은 내 얼굴을 힐끗 보고 한숨을 한 번 쉬고 “몸이 진짜 안 좋아?”하고 묻더니 조퇴를 허가했다.

 오랜만에 혼자, 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집에는 일훈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없고 일훈만 혼자. 고등학생이 된 후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머니의 태도다. 아주머니는 일훈과 내가 단둘만 집에 남는 상황을 경계한다. 둘만 남겨두지 않으려는 노력이 내 눈에도 빤히 보여 역시나 투명한 사람, 하고 속으로 조용히 조소하게 된다.

 아주머니가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

 쓸데없는 노파심.

 그런데 일훈이 있었다. 그것도 혼자.

 주방으로 들어서려다 일훈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일훈은 유리잔에 물을 따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편한 사복차림에 어딘가 멍하게 풀린 표정. 느리게 몇 번 눈을 깜빡이고는 “일찍 왔네?”했다. 평소보다 낮고,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 대번에 알았다. 얘 아프구나. 꾀병을 부린 나와 다르게 진짜 아파서 조퇴했구나.

 “감기……인 거 같아서 조퇴했는데, 너한테 말하고 가려고 했는데, 네가 자는 거 같아서…… 두 번이나 찾아갔었는데, 그때마다 엎드려 있어서…… 그래서 말 못하고 먼저 왔어.”

 나른한 투로 어쩐지 횡설수설하듯 말을 마치고 빤히 나를 보다가 “혹시 너도 감기야?”하고 물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조퇴를 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두 번이나 찾아와.

 같잖아서 대꾸도 하지 않고 컵을 가져와 그 애 옆에 섰다.

 “나도 물.”

 손을 내밀며 불쑥 내뱉자 일훈은 “어, 어”하더니 급하게 물병을 내밀었다. 일훈의 손등이 내 팔뚝을 스친다 싶더니 순식간에 물병이 떨어졌다. 거꾸러지듯, 물을 쏟으면서.

 가슴 아래부터 흠뻑 젖었다. 젖은 교복 상의가 맨살에 달라붙는 느낌이 싫어 인상을 찌푸렸다. 치마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무릎과 정강이를 훑으며 양말로 스며들어 양말까지 금세 척척해졌다.

 “미안.”

 일훈은 몹시 허둥대는 기색으로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티셔츠를 벗어들고 물을 닦기 시작했다.

 “좀 놀라서…… 미안해.”

 “왜 놀라는데.”

 일훈의 벗은 등을 내려다보며 억양 없이 물었다.

 뼈와 근육의 유연하고도 유기적인 움직임.

 피부 너머로도 그것이 보인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어?”

 일훈은 바닥을 닦던 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다가 화급히 시선을 돌렸다. 열 때문인지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 티셔츠를 움켜쥐고 있는 손등에 불거진 핏줄. 아니, 힘줄인가?

 “귀신이라도 봤냐. 갑자기 왜 놀라는데.”

 다시 묻고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컵을 올려둔 식탁으로 가다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일훈과 부딪쳤다. 맨다리에 닿은 등이 움찔하고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왠지.

 왠지…… 하고 생각했다.

 덩치만 커다란 연약한 생물 같다고.

 내가 지금 왁, 하고 소리라도 지르면 억, 하고 쓰러질 것 같다고.

 해볼까.

 그런 심술궂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연하고 약해 보였다.

 할머니한테 혼이 나고 풀죽어 있던 또또가 저랬나.

 만취해 들어와 엄마, 엄마 하고 목 놓아 울던 아빠가 저랬나.

 아니 아니, 무엇과도 달라. 다르지만 비슷하게 연약하고, 비슷하게 애처롭고, 그래서 나는 무릎을 굽혀 일부러 그 애의 등을 밀었다.

 “좀 비켜 봐. 거치적거리게 거기 있지 말고.”

 살갗이 닿자마자 또 움찔, 경련하듯 떨리는 등.

 떨면서 엉거주춤 물러나 앉는 일훈을 흘깃 내려다봤다. 살짝 비껴 앉은 그 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쥐어뜯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걸 지켜봤다. 벗은 티셔츠를 한손에 꼭 쥔 채 젖은 바닥을 마저 닦을 생각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봤다. 컵에 물을 따르면서. 생수병 뚜껑을 닫으면서. 물을 마시면서. 그 모든 것들을 보는 사이 그 애의 바지 한 부분이 눈에 띄게 불거져있는 것도 봤다.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며 무심히 “무슨 생각해?”하고 물었다. 일훈은 나를 보지도 않고 “무슨 생각하냐니……”하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섹스하고 싶어?”

 이번에야 말로 놀라서, 놀랐다는 걸 나 역시 알 수 있을 만큼 크게 놀라서, 일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남자들도 불편한 게 있구나. 여자에 댈 건 아니지만.”

 흘리듯 말하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발기한 수컷이란 어쩌면 무척이나 연약한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일훈으로부터 “좋아해.”라는 말을 들었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하고 물었더니 일훈은 놀란 듯 울고 싶은 듯 화가 난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닌 게 아니라, 하고 싶어. 하고 싶은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 중요해. 중요하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를 좋아한다는 게 더 중요한 거고……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네가 좋다고. 좋아서 미칠 지경이라서, 진짜 미칠 것 같아서, 도저히 이대론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고백은 하는데, 네가 거절해 봐야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하…… 그냥 그렇다고.”

 거기까지 뭐에 씐 사람처럼 쏟아내더니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진짜…… 뭐라는 거냐, 미친놈이…….”

 한낮의 건조한 햇살이 바닥에 주저앉은 일훈의 머리와 어깨와 등과 무릎과 발목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반짝반짝 햇살을 튕겨내는 일훈의 하얀 운동화. 얼룩 하나 없이 희고 깨끗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좋아해, 라는 말은 나를 향해서만…… 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만 특별하다는 건가, 둘은 일맥상통하나,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런 생각들 끝에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어서 “그럼 앞으로 보여주지 마.”하고 그 애의 하얀 운동화를 계속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송곳니 빠진 거. 앞으로는 나 말고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마. 그러면 반 정도는 믿어줄게.”

 내뱉고 보니 그게 내내 거슬렸구나 싶었다. 내게 그랬듯이 아무한테나 장난스럽게 씩 웃어 보이는 거. 이름도 모를 여자애들이 일훈의 턱을 잡고 입안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거. 지나가는 남자애들이 ‘저 새끼 이빨 하나 없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거.

 거슬렸었다. 내도록.

 “반 정도 믿으면 어떻게 되는데?”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일훈이 물었다.

 “뭐가 어떻게 돼. 그냥 반만 믿어준다는 거지.”

 “전부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알려주면 그게 뭐든 당장이라도 실행하겠다는 듯, 간절하고도 맹렬한 기세였다. 따갑고 뜨겁게 내리쬐는 늦여름 햇살에도 뒤지지 않을 엄청난 기세라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웃었을까.

 “일단 반이라도 믿게 만들지…….”하고 비웃듯 대꾸하면서 나는 조금 웃었을까.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일훈이 “전부 믿게 되면 결혼하자.”고 말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고 더 이상 상대하기도 피곤해서 그만 돌아섰다.

 “결혼해.”

 돌아선 나를 제 쪽으로 다시 돌려세우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결혼하자고.”

 내 팔목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매끈하게 빠진 서글서글한 눈매에 장난기가 없었다. 웃음이 나올 만큼 진지한 눈빛.

 “결혼하……”

 “봐서.”

 팔을 흔들어 손을 떼어내고 다시 돌아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따라붙은 일훈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나란히 걸었다.

 “봐서, 결혼하는 거야.”

 얘가 이런 애였나. 끈질긴 건 원래도 그랬는데 이렇게 웃긴 애였나.

 웃기게 유치하고 가여울 만큼 필사적이고.

 아니었잖아, 그런 애…….

 화단 앞, 나무 그늘을 지나며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쓸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인지 팔목 언저리가 어쩐지 뜨거워서. 이상하게 뜨겁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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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었다.

 네가.

 “전부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당장이라도 전부 믿게 해주겠다는 작심을 하고 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네가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지만 분명히 웃었다. 그것이 웃는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면 보조개가…… 양쪽 눈 밑에 아주 옅은 인디언 보조개가 파였으니까. 너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분명 웃는 얼굴이라고 확신했다. 확신하는 순간 너무 기뻐서, 갈비뼈가 아프도록 심장이 뛰어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결혼을 하자고 했다.

 결혼을 한다면 너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산다면 너와.

 섹스를 해도 너와.

 그렇게 작정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싫다고 하면, 죽어도 싫다고 하면,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혼자. 그리고 평생 섹스 따윈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작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전부 다 진심. 내 모든 걸 걸고 진심이야.

 네가 믿지 않아도,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믿지 않게 되더라도, 그 여름날 멋도 없이 머저리 같이 쏟아낸 말들은 모조리 다 슬플 만큼 내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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