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317화 (317/354)

Chapter 317 - 권력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 (4)

"비앙카, 3학년 쪽은 동의서를 얼마나 받았어요?"

"음... 30% 정도?"

"... 아직 한참 부족하네요."

"그럼 협박이라도 해볼까? 서명 안 하면 가만 안 둔다고 하면..."

"비앙카...?"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이름 부르자 비앙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보, 농담이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확실하게 위험성과 보상을 설명하면서 동의서 받고 있어."

"... 그러면 다행이고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강요는 금지에요."

"그러고 있다니까... 야, 그런데 스승님 못 봤어?"

"베를리오즈님이요? 며칠 전에 산키샌 마을에 같이 다녀왔는데..."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안 보여서."

비앙카의 말에 들은 내가 뺨을 긁적였다.

'... 설마 화났나?'

자위 사건 때문에 슬쩍 묻혔지만, 따지고 보면 베를리오즈는 강제로 외간 남자의 성기를 보게 된 건데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가지 않았던가.

베를리오즈의 성격상 별로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해도... 사람 내면은 모르는 법이다.

'...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때 머리를 스치는 불순한 상상.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자위에 미쳐버린 베를리오즈가 나랑 트리스티아의 관계를 조교실에서 훔쳐보던 중, 거기 있던 도구를 멋모르고 사용했다가 기절해서 아직까지 트리스티아한테 붙잡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들었지만....

'에이.. 베를리오즈가 케일 형님도 아니고...'

케일 형님처럼 성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자위를 처음 배운 숫처녀가 남에 관계를 훔쳐보면서 자위하는 게 말이 안 된다.

그거야말로 성욕에 미친 개변태 자위광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베를리오즈님이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신의 제자인 베를리오즈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 아마 저한테 좀 화날 일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진정되면 돌아 오실 거에요."

"왜 뭘 했는데?"

제 자지를 보고 당황한 베를리오즈를 그대로 놔두고 트리스티아랑 섹스하러 갔어요.

... 라고 비앙카한테 말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보다... 비앙카가 너무 걱정되면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게 할까요?"

"뭐? 누, 누가 걱정한데!! 그, 그냥 스승님이 없으면 계약을 못 지키니까 하는 소리 아니야!"

"계약...?"

"너는 몰라도 돼! 씨이, 짜증나! 난 갈 거야!"

쿵쿵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

무기상인 벨베르트 린달라.

원래도 상당히 잘 나가던 무기상인이었지만, 지난 즉위식 때 유진의 총애를 얻었다는 소문 덕분에 더더욱 사업을 크게 확장하던 중이다.

"하하하!! 아리스 상회 꼴 좋다! 그렇게 잘난 척은 다 했지만 결국 우리한테 계약 뺏겼죠? 하하하핫!"

평소 계약보다 이윤이 좀 부족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지만,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오호호홋 하며 재수 없게 웃는 아리스년에게서 뺏어온 거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 그런데 벨베르트님?"

"왜? 이제 다시 일해야 해서 바쁜데."

빈말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

안 그래도 공급해야 할 물량이 넘치는 상태에서 겨우 뺏어온 거라, 지금부터는 수면 시간도 최대한 줄여야 할 판이다.

"그... 새로운 수주가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수량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는데..."

"쯧."

비서의 말에 벨베르트가 혀를 찼다.

이렇게 바쁜 상황에 수량도 말하지 않고 직접 만나서 거래 조건을 협상하자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돼. 쳐내. 어차피 지금 우리 상회에서 더 못 받아. 일 하루, 이틀 했어? 상인은 신용을 잃으면 끝인 거 알면서 왜 그래?"

"그.... 알긴 알지만... 그래도... 이건... 확인해봐야... 같아서..."

평소랑 다르게 답답하게 말을 늘리는 비서의 말에 벨베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안된다면 안된다고! 야, 내가 언제 했던 말을 번복한 적 있었나?"

"알겠습니다. 그럼... 유진님께는 거절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바쁘니까 빨리 나가서 너도 일 봐."

"네...."

비서가 나가고 벨베르트가 펜을 잡는 순간 비서가 한 말이 천천히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유진님께는 거절 편지를...'

'유진님께는...'

'유진님...'

이윽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벨베르트가 윤활유가 떨어진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만... 유... 유진? 유진 칼리오페?"

지금 이 시국에 유진이라는 이름하면 '유진 칼리오페' 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쾅!

"자... 잠깐.. 기다려!!"

타타타타탓!

옷깃이 바람에 휘날려서 가슴이 훤하게 드러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복도를 달리는 벨베르트였지만 지금은 체통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편지를 막지 못하면 벨베르트 무기상은 끝장이다!

"멈춰!!... 편지!!... 머... 멈춰!!!"

**

"바쁜 와중에도 와줘서 고마워."

깍지를 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살며시 웃는 유진의 모습이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저 얼굴로 상인을 하면 여자를 상대로는 무조건 20%는 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파벌장님께서 부르시는데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런가? 그럼 벨베르트. 시간이 없을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네.. 넵... 말씀하시죠."

"응, 편지에서 봐서도 알겠지만, 무기가 필요해."

유진의 말을 듣는 순간 상인의 얼굴로 돌아간 벨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어떤 무기를 원하시나요? 말씀만 하시죠. 검? 창? 활? 지팡이? 파벌장님이 말씀만 하시면 반드시 최상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음... 말은 고맙지만 내가 쓸 게 아니야. 말로 하는 것보다 이걸 봐줄래? 제법 양이 많거든..."

스윽─

유진이 밀어 넣은 쪽지를 확인한 벨베르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상위 등급의 인챈트를 견뎌낼 정도의 고품질의 무기를 기한 안에 이 수량을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기한은 물론이고 가격도 문제였다.

유진이 제시한 가격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손익분기점을 넘는 정도.

만일 이 일을 받으면 지금 들어온 계약을 다 쳐내고 위약금까지 줘야 하기에 상당한 손해였다.

"응, 무리일까? 아, 절대 압박하려는 건 아니니까. 부담은 가지지 말고 대답해줘."

"...."

솔직히 상대가 유진이 아니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지금 수주한 일거리만 잘 해결해도 벨베르트의 명성은 확실히 올라갈 테니까.

반면에 유진의 의뢰는 납품 기한을 맞출 수 있는지도 아슬아슬하고, 만약 받는다면 이미 수주한 의뢰를 파기해야 했기에 분명 신용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유진 칼리오페....'

막말로 루멘하르크의 제국의 황제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세를 지닌 남자.

만일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서 유진의 총애를 얻을 수 있다면, 적어도 무기를 취급하는 상회에서는 벨베르트의 이름을 모를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 확실한 이익이냐... 위험한 도전이냐...'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하던 벨베르트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러면.."

"하지만 이 가격이 아닙니다."

"아... 그래? 역시 가격이 부족했나 보네."

"아니요."

유진의 말에 벨베르트는 고개를 젓고는 금액 부분에 쫙쫙 줄을 긋고 절반 가격을 써냈다.

"이 가격에 납품하겠습니다."

"... 이 가격에 정말 가능하겠어? 무리하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한 번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다.

저 가격을 맞히려면 지금까지 모은 벨베르트의 사비를 탈탈 털어 넣어야 한다.

그러나...

판돈을 올릴수록 먹는 것도 커지는 건 당연한 일.

첫 의뢰인만큼 유진에게 확실히 능력을 증명한다.

"그럼, 부탁할게. 다행이네. 거절했으면 아리스 상회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아리스 상회요?! 그 쌍녀... 흠...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네요. 아무튼, 무기의 미학도 모르는 그 저질 상회랑은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래? 벨베르트가 납기일만 지켜주면 그럴 일 없을 거야."

"네! 더욱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건 무조건 받는 게 정답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유진의 총애가 그 가짜 영애한테 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오호호호홋! 벨베르트! 이걸 아실까 모르겠사와~ 이번에 우리 상회가 유진 칼리오페의 의뢰를 받았지 말이와요~'

만일 그년이 유진의 의뢰를 받아가서 자신을 놀려댈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끊어지는 기분이다.

"음, 오늘 부른 이유는 그걸로 끝이야. 그럼 납기 꼭 지켜주길 바랄게. 불러내서 미안했어."

"아닙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응, 부탁해."

철컥─

응접실 문을 닫고 나온 벨베르트가 천장을 올려다보자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말을 걸었다.

"어... 어떻게 되셨나요?"

"...."

벨베르트는 말을 하는 대신 펜과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최대한 빨리 우리 공급망에 무조건 이것부터 맞추라고 연락 돌려. 다른 건 다 때려치워도 상관없으니까."

"베... 벨베르트님...! 아무리 단가를 후려쳐도 이 가격은 절대...!"

"나도 알아! 부족한 건 내 사비로 채워 넣을 거야. 그러니까 단가도 후려치지 마.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위약금이랑 같이 의뢰 취소 편지 보내. 뭐해? 안가고! 달려!"

"아...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건 그저 결과가 좋기를 바랄 뿐.

찰칵─

열심히 달려가는 비서의 모습을 보며 벨베르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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