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3 - 백소소 (6)
"처음 뵙겠습니다."
서방님의 손으로 새롭게 피어난 이후, 누구에게도 외모로 뒤쳐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눈앞에 있는 여인은 달랐다.
"루멘하르크 제국의 외교대신, 루시아 우르엘라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실체화한 것 같은 비현실적인 외모.
대부분을 옷으로 감추고 있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내의 시선을 사로잡기 완벽한 몸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경계하게 만들었던 건....
루시아의 눈에서 엿보이던 서방님을 향한 지독한 사랑이었다.
***
일과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서방님이 침실에 오지 않는다.
이전에도 서방님께서 일이 밀려 늦는 경우는 있었지만, 오늘처럼 아무 말도 없이 늦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불안했다.
그래서 몰래 방을 빠져나와 서방님이 있을 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밤늦게 불이 켜져 있는 서재와 그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술렁거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재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고 엿보았다.
"그렇다면 병장기와 군량은 아스란쪽에서 이 정도까지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런데 혹시 추우신가요?"
"... 어찌 아셨습니까?"
"안색이 그리해 보입니다."
"하하.. 안색이라. 폐하 이외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입니다. 대신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느낌이 듭니다."
"후훗... 저도 대신과 대화를 하면 그렇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몸이 따듯해지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찌 대신께서 그런 일을 시키겠습니까.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사람을 부르는 것도 못 할 짓이지요. 제가 이래 보여도 차를 내리는 게 취미이니 입에 맞으실 것입니다. 아니면 혹여 대신께서는 제가 내린 차는 마시기 싫으신 건가요?"
"...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서방님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배려.
그리고 그때마다 서방님이 짓는 부드러운 미소.
...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싫다.
너무나도 싫었다.
... 금방이라도 저 여자가 서방님을 빼앗아버릴 것만 같아서.
***
루시아가 스며든 곳은 서재만이 아니었다.
침실에 있을 때도 서방님의 입에서 루시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창고에 있는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려고 한다."
창고에 쌓여있던 식량과 무기는 서방님이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얻어낸 황실의 힘이다.
황실의 힘....
즉, 나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것을 루시아에게 준다고?
"... 어... 어째서입니까? 그건... 서방님의 저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 아니었습니까?"
"그래, 전부 소소 너를 위한 것이다. 알고 있지 않으냐?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스란이 아닌 루멘하르크에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지만, 루멘하르크가 무너지면 다음은 아스란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앙이 아스란의 땅을 침범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지극히 논리적인 서방님의 말.
그래도 루시아의 편을 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 그렇다면 알겠사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 대신... 서방님."
쪼옥─
서방님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강하게 빨았다.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닌, 내 남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는 행위였다.
"... 자국이 남겠구나. 내일은 분칠을 해야겠어."
"하지 마십시오."
"... 소소야?"
"지우지... 마십시오."
".. 알겠다. 그러니 그만 토라지고 이리 오너라."
"네에... 서방님."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서방님의 온몸의 나의 흔적을 남기고 나의 냄새가 배도록 만들었다.
**
다음날, 나는 굳이 루시아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비록 서방님이 옷깃으로 목을 잘 가리고는 있어도 루시아라면 반드시 눈치챌 것이다.
"...."
나의 흔적이 또렷하게 새겨진 서방님을 보면 도대체 루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루시아가 서방님에게 새겨진 나의 흔적을 보았다.
"...."
심장이 두근거린다.
질투할까? 분노할까? 슬퍼할까?
도대체 어찌 반응할까 기대가 되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재상께서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고 계십니까?"
허나.... 루시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다.
"아직 생각해놓은 게 없습니다. 일단은 재앙을 물리치는 게 먼저겠지요."
"백지어음을 끊겠다는 것입니까?"
"하하, 그럴리가요. 적당한 값을 받을 예정입니다."
질투하지도,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행이라는 듯 옅게 웃었을 뿐.
어찌?
어찌 저럴 수 있는단 말인가?
저토록 깊이 서방님을 사모하면서 어찌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단 말인가?
"... 폐하?"
"몸이... 좋지 않아 돌아가겠네."
"괜찮으십니까? 어의를 부를까요?"
"괜찮다... 먼저... 가보마."
그래서 나는 도망치고 말았다.
루시아, 그 아이의 앞에서라면 계속 자신의 추함을 마주할 것 같아서.
**
얼마 뒤 서방님께서 출장을 가시게 되었다.
"...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서방님."
평소 같았으면 고집을 부려서라도 따라갔겠지만, 이번은 루시아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였다.
서방님이 떠나고 나는 곧바로 루시아를 찾아갔다.
"... 대신. 잠깐 이야기를 나누지."
"예, 폐하. 영광이옵니다."
내가 루시아를 데리고 온 곳은 굳이 서방님의 체취가 흔적이 남아있는 침실이었다.
그곳에서 가벼운 잡담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중.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 서방님과는 무슨 관계더냐?"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저 십여 전에 얼굴을 한 번 본 것이 다입니다."
"웃기지 마라!"
콰악─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루시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네 눈빛 한 번 행동 하나가 서방님을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한다는 말이냐!"
"... 거짓이... 아니옵니다. 저는... 유진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사옵니다."
진실처럼 느껴지기도 거짓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루시아의 말.
그것이 나를 더욱더 미치게 했다.
까득─
루시아를 내팽개친 내가 낮게 속삭였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 이상 서방님께 함부로 접근하지 말 거라... 그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하아... 하아... 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한 제국의 황제가 벌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치졸하고도 저열한 견제.
하지만 서방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루시아에게 경고를 하고 몇 일이나 지났을까.
여전히 지독한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콰앙─!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갑자기 이게 소란이냐!"
"죄... 죄송합니다..!... 폐하! 허나... 재.... 재상께서... 반기를 든.... 가주들에게... 납치를.....!"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황실 광장에 도착하자, 청가주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상처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진 서방님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라! 나 청가주가 폐하의 아비를 죽인 사악한 역적을 붙잡았다!"
그 순간 뇌의 혈관이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청가주!!!"
내가 청가주를 향해 달려듬과 동시에 청룡, 적견, 흑호가 앞을 막아섰다.
"청룡! 적견! 흑호! 폐하를 막아라! 폐하께서는 지금 역적에게 홀려 제정신이 아니시다!"
"비켜라! 네놈들이 본녀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
"멈추시지요! 폐하! 저희는 폐하의 적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저 역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닥쳐! 닥쳐! 닥쳐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 함부로 떠들어대지 마라!!!"
콰앙─!!
나는 서방님께 다가가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쳤다.
"아.. 아무리 첫 번째 제자라고 한들 어찌 인간이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입 다물고 집중해라 흑호! 그래도 셋이 함께 상대하면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최대한 방어에 치중하여라!"
"비키란 말이다!!!"
발버둥 치고 발버둥 쳤다.
허나, 길이 뚫릴까 싶으면 다른 쪽에서 달려들어 막아냈다.
"비키라... 제발... 비키란 말이다!!"
"이자는 아스란의 백성도 아닌 것이 폐하를 속여 재상의 자리에 올라 폐하께 바쳐진 재물을 탐하고 제 곳간을 채웠다.!!
그때, 청가주가 들어 올린 단검이 반짝였다.
"그것으로 부족해! 폐하를 옳은 길로 이끌고자 한 폐하의 아비마저 살해한 천하의 역적이다!!"
"... 그만둬..."
"그러니 나 청가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리겠다!!"
"제... 제발... 멈추거라!! 제발..!! 제발...!!... 본녀가... 잘못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멈춰주.."
퍼억─!
청가주가 내리찍은 단검이 서방님의 가슴을 꿰뚫었다.
"다들 보아라!! 나 청가주가 역적을 처단했다!!"
심장을 꿰뚫린 서방님을 과시하듯 마구 흔들더니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팽겨치는 청가주.
울컥- 울컥-
쓰러진 서방님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하늘의 뜻이 나와 함께할지니!! 다들 폐하의 신병을 확보하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서방님이 죽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고, 머리가 백발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 주... 주... 죽여... 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폐하.. 포기하시지요. 이제 다 끝났..."
콰즈즉─
앞을 가로막던 적견의 턱을 통째로 뜯어냈다.
"폐하께서 정신이 나가셨다! 다들 물러... 끄아아악!"
도망치던 흑호의 다리를 분지르고 팔을 뽑아냈다.
"폐..."
청룡의 양 눈깔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몸을 세로로 길게 찢어냈다.
"... 청.... 가.... 주...."
"히.. 이익...!!... 괴... 괴물... 이다...!!.. 오... 오지마라..! 다가오지마라!!"
"... 청... 가주우우우우!!!!"
"다가... 오지마!"
청룡, 흑호, 적견, 셋으로도 막을 수 없던 나다.
청가주가 두려움에 질려 아무렇게나 쏘아내는 마법 따위.
당연히 내게 닿을 리가 없었다.
촤아악-!
한순간에 달려가 청가주의 목을 베어내고 난 뒤에야 나는 뒤늦게 알아챘다.
"....!!"
그가 겁에 질려 무작정 쏘아낸 마법 중 하나가 서방님을 향해 날아갔다는 것을.
"... 서방님!!!"
늦지마라.
늦지마라...!!
제발 늦지 마라....!!!
서방님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 봤지만...
허나,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파아아앙─!
그리 생각했지만...
흙먼지가 걷히고 그곳에 나보다 먼저 몸으로 서방님을 감싼 여인이 있었다.
"....."
루시아 우르엘라였다.
맨몸으로 청가주의 마법을 받아낸 루시아의 상태는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 다... 다행... 이에요..."
하지만 루시아는 그런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이번에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저 서방님을 구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듯이 살며시 웃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루시아가 백가주의 마법을 막지 않은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가주의 마법은 루시아라면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허나, 루시아 저 아이는 그저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마력을 사용했을 뿐이다.
어째서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 세요......"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후우우웅─!
루시아는 애초부터 자신을 위해서 마력을 사용할 생각이 없던 것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마력조차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서방님께 쏟아 넣기 위해서...
후우우웅─!!
루시아의 마법이 펼쳐지고 서방님의 시간이 되돌아간다.
서방님의 몸에서 빠져나왔던 피가 다시 돌아가고 뚫려있던 가슴의 상처가 급속히 아물어간다.
그리고 동시에...
루시아의 생명력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대로 가면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루시아가 죽어버린다고.
한순간에 달려간 나는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 내... 내것을 쓰세요!"
"...."
스으윽─
"....!!"
생명력이 소진되는 감각은, 이것이 서방님의 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까딱하면 나도 모르게 손을 떼어버릴 것 같을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다.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깊은 사랑을 품고 있기에...
이런 공포 속에서도 루시아 이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내던진단 말인가.
"제발... ■발... 이■■큼은..."
"이번도... 또.... 당■을.... 구■■..."
"왜...!... 어■서... ■■... ■■■!"
희미해지는 의식 속.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