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90화 (290/354)

Chapter 290 - 백소소 (3)

".... 제가 당신을 '첫 번째 제자'로 만들 겁니다. 백소소님."

"핫...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백사 가문의 후보가 '첫 번째 제자'가 된다고?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소리였다.

누구보다 절박했던 내 목표조차 '첫 번째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위 후보에 올라가는 거였으니까.

'... 아니. 잠시만 그보다.'

이 남자...

말 한 적도 없는 내 이름은 알고 있었다.

"당신...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었어요?"

상대방의 실수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예상외로 시원하게 답했다.

"예, 백소소님. 처음부터 전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 왜요? 저를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요?"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깨를 으쓱거린 남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백소소님을 첫 번째 제자로 만들겠다고요."

"... 또 헛소리를. 어디 한번 말해보시죠. 제가 어떻게 첫 번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건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백소소님은 백사가문의 후보이니 후계경쟁에서 승리하셔야죠."

남자의 말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 이름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아스란 제국의 사람이 아니죠? 그러니 그렇게 맘 편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겠죠. 만일 당신이 제 상황을 조금이라도 상황을 알고 있다면 그딴 말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어째서입니까?... 백사 가문이 열 두 가문 중 최약의 가문이라서? 아니면 백소소님이 가문에서 내쳐진 아이라서?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 당신...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확 쏠렸다.

모르고 그랬다면 헛소리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랬다면 이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네,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까득-

잠시나마 이런 남자에게 감사를 느꼈다는 사실에 이가 갈린다.

"하, 잘됐어요! 주먹밥 값은 치르지 않아도 되겠네요!!"

내가 등을 돌려서 떠나려고 하는 순간, 그가 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기다리시지요. 모든 걸 아는 상황에서 저는 당신을 '첫 번째 제자'로 만들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직도 그딴 소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려던 순간.

쿵─

양 무릎을 꿇은 그는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믿어주십시오.... 저는 무슨일이 있어도 백소소님을 '첫 번째 제자'로 만들겠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소리.

속아주기도 어려운 허언.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 왜... 왜 하필 저에요. 저를 정말로 '첫 번째 제자'로 만들 실력이 있다면 다른 가문에 가는 편이..."

"저는 백소소님이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읏...!"

죽음을 결심한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의 신뢰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멍청하고 약해빠진 내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주먹을 꽉 쥔 나는 애써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며 말했다.

"...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는 오늘 이곳에서 죽은 건데요."

"감사합니다. 백소소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미소를 싹 지우며 말했다.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는 말투부터 바꾸시지요."

갑작스럽게 달라진 그의 태도에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마... 말투요?"

"네, 지금 백소소님의 말투는 첫 번째 제자가 할 말투가 아닙니다. 아스란의 예법에 관한 책을 한 권 드릴 테니 잠시 읽어보시고 따라 하시지요."

"알겠습... 알겠사옵니다."

건네받은 책을 빠르게 훑은 내가 어색하게 책에 적혀 있는 말투를 흉내 내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주 좋습니다. ... 그럼 지금부터 백소소님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

"... 죄송합니다. 가주님. 밤사이에 백소소님이 도망친 것 같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아니... 차라리 잘됐었다. 앞으로는 내가 그년 때문에 머리를 숙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보다 창고는 확인해보았나? 백소소야 어찌 되든 상관없으나 만일 훔쳐간 것이 있다면 돌려받아야지."

"예, 확인해봤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습니다. 다만... 떠날 때 후보의 증표를 가지고 간 것 같습니다. 추격대를 보낼까요?"

참모의 말을 들은 백가주가 혀를 짧게 찼다.

"... 쯧, 되었다. 어차피 이번 선발전에서만 쓸 수 있는 증표가 아니더냐? 다른 후보를 낼 생각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어라."

"... 그렇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나고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 다... 다행이다.'

증표를 챙겨 오는 김에 창고에서 보물이라도 한두 개 훔쳐갈까 했지만...

'백소소님. 명심하십시오. 절대로 다른 물건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반드시 증표만 가지고 오는 겁니다.'

유진의 경고가 떠오른 탓에 그만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 이... 이럴때가 아니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담을 넘어 유진이 기다리고 있는 호숫가까지 도망쳤다.

"가... 가져왔어요.."

"잘하셨습니다. 백소소님.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하신 대로 아무것도 안 챙겨왔으니까."

"다행이군요, 그럼 따라오시지요.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유진과 마차를 타고 간 곳은 백가문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 구석에는 지어진 얼마 안 된 것 같은 나무집 한 채가 있었다.

나무집 앞에 도착한 유진은 문을 열며 말했다.

"오늘부터는 백소소님은 이곳에서 저와 같이 사시게 될 것입니다."

**

유진님과의 동거 이후로는 매일 매일 꿈과 같은 날들이 펼쳐졌다.

"아직 성장기이시니 수면은 하루에 8시간, 식사는 고기 위주로 준비하겠습니다."

"고... 고기 말입니까? 괘... 괜찮습니다... 고기 같은 사치품을... 그저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이런 건 사치 축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드십시오. 제게는 백소소님이 죽을 때까지 고기만 드셔도 남을 만큼의 돈이 있으니까."

"... 유... 유진님께서 그리하시다면... 그러겠지만... 그... 그럼 정말 이걸 제가 혼자서 다 먹어도 되는 겁니까?"

"네, 마음껏 드시지요."

마구간이 아닌 침대에서 잠을 자고,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가 아닌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후우... 이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합니다!"

"훌륭하십니다. 벌써 거기까지 배웠을 줄은 몰랐습니다."

"후훗...! 이게 전부 유진님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사옵니까?"

"저는 그저 서책을 몇 개 가져왔을 뿐입니다. 전부 백소소님이 노력한 덕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소녀에게는 충분하옵니다! 제가 유진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러한 것을 배우겠습니까. 자 그럼 다시 혈도에 대해서 알려주시지요."

싸우고 육체를 다루는 법을 배웠으며...

"그 누구도 믿지 마시옵소서. 모든 걸 의심하십시오. 백소소님이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누구도에는... 유진님도 포함되는 것이옵니까?"

"... 예, 그렇습니다. 저조차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꼭 명심하시지요."

"...."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여기 있는 산지황을 빻아 나온 즙과 흑작약의 뿌리를 빻아 만든 가루를 합치면 이렇게 색이 푸른색으로 변합니다..."

'.... 어쩜...'

"그럼 이렇게 잘 반죽하여 뭉쳐진 것들을 넓게 펼쳐서..."

백사 가문에서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던 독과 약을 다루는 방법마저 배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놨던 단삼을 조금씩 다져 넣으면... 백소소님?"

'... 어쩜 이리 잘생겼는지. 소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옵니다.'

"듣고 계십니까 백소소님?"

"흐앗! ... 죄... 죄송하옵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유진님만 보던 것이 들켜버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조금 피곤한 것 같으니 여기서 잠깐 쉬었다 하시지요."

"네... 유진님. 정말 죄송하옵니다."

"아닙니다. 슬슬 휴식할 생각이었습니다."

"... 그... 그렇게 말씀해주니 정말 감사하옵니다."

이제는 휴식을 할 때면 되면 자연스럽게 유진님의 옆에 딱 붙어 있게 되었다.

나는 유진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물었다.

"유진님... 유진님은 어찌 그리 아는 것이 많사옵니까? 저랑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말입니다."

"... 그건."

"그건...?"

평소랑 다르게 뜸을 들이는 유진님의 말투.

마침내 비밀에 대해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며 유진님을 올려다보았지만.

"비밀입니다."

... 역시나 또 이랬다.

유진님에게 내게 밝히지 못하는 비밀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어딘가 며칠간 훌쩍 떠나 올 때마다, 나조차도 이름을 들어 본 고급 환약이라던가, 무공이 적힌 서책을 가져왔으니까.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출처를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유진님은 소녀에게 비밀이 너무 많사옵니다. 소녀는 유진님께 단 하나의 비밀도 감추고 있지 아니한데. 소녀... 조금 서운하옵니다."

그러자 유진님께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백소소님. 그렇게 느끼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아! 농담이었사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시면 소녀가 불편하옵니다. 자자! 이제 다 쉰 것 같으니 수업을 계속하시옵소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애써 호들갑을 떨며 띄우자 유진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까 만들었던 약재를 전부 다 넣고 약한 불로 하룻밤을 꼬박 내리게 되면..."

열심히 설명하는 유진님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 유진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을 것이다.

설령 유진님이 무엇을 감추고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

행복한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 그리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니 그동안 밀려있던 성장을 한 번에 해치우듯 순식간에 키가 크고 살이 붙었다.

그러고 나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외모가 달라졌다.

"... 정... 정녕 이것이 소녀라는 말이옵니까?"

서방님이 사준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단 채 거울을 바라보니....

그 안에는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러워도 천하일색이라고 해도 충분할 여인이 있었다.

"네, 정말 소소님입니다. 그보다 이제 말투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군요. 훌륭하십니다."

서방님께 칭찬을 받아 기쁘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말투보다는 여인으로서 칭찬받고 싶었다.

"그럼... 유진님의 눈에도 제가 이쁘게 보이옵니까?"

"... 물론입니다. 자, 그럼 이쁜 옷도 입으셨으니 오늘의 수업은 좀 더 열심히..."

나는 자연스럽게 긍정하며 넘어가려는 서방님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렇다면... 유진님..."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을 올려다보았다.

".... 소녀를 이쁘다고... 말씀... 해주십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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