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9 - 백소소 (2)
'첫 번째 제자'를 선출할 권리가 있는 열두 가문.
그 중 최약의 가문을 꼽으면 누구나 백사(白蛇) 가문을 뽑을 것이다.
그만큼 백사 가문은 독보적으로 약한 가문이었고...
가문 안에서도 나, '백소소'는 특별했다.
백白이라는 성씨에서 알 수 있다시피 모두가 백발을 타고나는 백사 가문에서 나는 검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백사 가문을 몰락의 길로 이끌고, 열두 가문에게서 '강신'의 전수를 금지하게 만든 그 여인처럼 말이다.
"죽여야 합니다! 당장 죽여버려야 합니다!!"
"... 가주님.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어차피 죽여야 할 아이라면 조금이라도 가문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 낫지 않겠습니까?"
본래라면 태어나자마자 저주받은 아이라고 살해당했겠지만,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빴다고 해야 할까.
내가 태어난 날은 열두 가문에서는 한 명씩 제자 후보를 선정해야 하는 날이었다.
멸문을 당할 뻔한 경험을 한 이후.
백사 가문은 단 한 번도 '첫 번째 제자'의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후보를 내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열두 가문에서는 반드시 가문의 핏줄을 이은 후보를 한 명을 내야 한다는 아스란의 규칙 때문일 뿐.
내가 후보로 선정 된 것도 앞으로도 백사 가문은 '첫 번째 제자'의 자리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조용히 살 테니 백소소의 목숨으로 만족해달라는 의미였다.
"... 배고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문의 철저한 지원을 받는 타 가문의 후보와는 달리 나는 지원은커녕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채 길러졌다.
"... 내일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
그래도 나는 노력했다.
지금은 저주받은 아이 취급을 받더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낸다면 가문에서도 나를 받아 줄 거라는 기대 하나만으로.
그렇게 가문의 어떤 지원도 없어 심지어는 식사조차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도 타고난 재능과 독기로 몇 번이고 살아남아 왔다.
하지만....
"도대체 저년은 언제 뒤질 셈이지? ... 가문을 다 망하게 할 셈인가!"
백사 가문에서는 어차피 '첫 번째 제자'가 될 수 없으면서도 괜히 눈에 띄게 하는 나에 대한 적대심만 강해졌다.
"가주님...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그러다 누군가 듣겠사옵니다."
"들으라고 해라! 지금까지 우리가 그 검은 머리 년을 살려 준 이유가 뭔지 모르는 걸 가문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나! 빌어먹을! ... 이러다가 백사 가문이 다른 가문의 가문에 눈 밖에라도 나면 어찌할 건가!"
가주의 호통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고, 축사 구석으로 도망가서 나의 잘못 사과했다.
"... 죄송해요... 죄송해요... 태어나서 죄송해요."
***
나의 환상이 완전히 무너진 날은 내가 친선 대전에서 자묘(紫猫)가문의 후보를 이겼을 때였다.
'아... 아아...!!... 이... 이겼어요! 제가 이겼어요!'
고작해야 친선 대전일 뿐이었지만, 처음으로 얻어낸 승리에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많이 다치고 기적같은 행운이 따라줘서 이긴 것이지만 이긴 건 이긴 것이다.
"제가 해냈어요!"
대전을 지켜본 그 누구도 내가 자묘가문의 후계자를 이길 거라는 예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결국 해내고 말았다!
나는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 다친 몸을 질질 끌고서 가주의 앞에 가서 말했다.
'가... 가주님... 제가 이겼어요. 제가... 자묘.. 가문의 후보를 이겼어요.'
'... 그래. 잘했다.'
짧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 본 가주님의 칭찬.
잘했다는 믿을 수 없었을 정도의 기쁨이 솟아나며 지금까지 받아왔던 멸시와 핍박이 전부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 지... 지금부터야!'
앞으로도 이런식으로 조금씩 가문의 인식을 바꾸면 될 것이다.
... 그렇게 생각했었다.
***
퍼억─! 퍼억─!
'아아악!! 가...!... 가주님..! 끄으윽!!'
'... 기어코! 기어코!! 네년이 집안을 말아먹을 생각이냐!'
'..... 아... 아파요... 가주님... 아파요..!'
'이.. 이이!!! 병신 같은 것! 네년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어야 했다! 지금껏 길러줬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이겼다고? 누구도! 우리 가문의 누구도 네년이 이기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들겨 맞은 끝에 나는 가주님의 손에 끌려가 자묘 가주의 앞에서 머리를 처박았다.
'... 자가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흠.. 용서라고도 할 게 있겠습니까. 뭐, 정당히 결투에서 이긴 것을... 쯧쯧. 우리 후보가 부족했던 거지요.'
얼핏 정중한 말투처럼 보이는 자가주의 말투. 허나, 말 속에서는 명백하게 나를 깔보고 있었다.
'그것이... 자묘의 후보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년이 백사가문의 비약을 결투에서 썼다고 자백했습니다.'
'허... 그게 정말이요?'
...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백사가문의 비전 따위는 배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설령 배웠다 한들 목숨을 빼앗는 걸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결투다.
사용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당장 오늘 결투부터가 그랬다.
장침 몇 개와 낡은 단검 하나 들고 있는 나와는 달리 자묘의 후보는 명검과 마도구로 몸을 둘둘 감싸고 오지 않았던가.
'전부 자식놈 교육을 잘못한 제 잘못입니다... 아, 자가주 그리고 이건 약소하나... 제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일은...'
'흐음... 알겠소 이번만큼은 백가주의 성의를 봐서 그냥 넘어가겠소.'
'아이고! 정말 감사하옵니다. 소소! 뭐하느냐! 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고서!'
감사하다고?
도대체 무엇을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했다고 한 것을?
아니면 간신히 얻어낸 승리를 빼앗긴 것을?
"..."
"네년이!! 당장 말하지 못하겠느냐!!"
짜악─
가주가 뺨을 때리자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허허... 백가주 적당히 하시지요."
"아닙니다! 이년이 아비인 제가 철저히 교육해야 했습니다! 어서!! 자가주께 감사하다고 하지 못해!!"
짜악─ 짜악─
그렇게 얼굴이 완전히 퉁퉁 불 때까지 계속해서 맞은 나는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자... 자주님의... 너.. 그러운.. 마음씨... 에... 가... 감사... 드리옵니다."
**
그날 밤,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단검 하나를 든 채 가문의 뒷산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
호수에 도착한 나는 표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저주받은 검은 머리카락, 작고 왜소한 몸, 피멍이 들고, 퉁퉁 부어서 도저히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아...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철이 들고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흐으... 흐아아아아앙.. 왜...!! 왜에에에..!! 왜..!"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태어난 것인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평온히 살아가길 바란 것이 그토록 큰 욕심이란 말인가.
".... 하... 하하하... 하하... 하....."
그렇게 한참 동안 비명과 함께 감정을 비워낸 내가 단검을 들어 목을 찌르려던 순간.
"멈추시지요."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
허나, 땟국물과 땀으로 쩔어 덜어진 나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그 남자의 것은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너... 누... 구야.?"
"저는 유진 칼리오페라고 합니다. 그보다 일단 손에 든 것을 내려놓는 게 어떠신가요?"
저벅─
남자가 다가오자 나는 목에 단검을 더욱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 가, 가까오지 마! 가까이 오면 주... 죽어버릴 거야."
"가만히 있어도 죽으시고 가까이 가도 죽는다니... 이거 곤란한데요."
잠시 뺨을 긁적이던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살며시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아하니 많이 굶으신 거 같은데..."
남자가 꺼낸 건 주먹밥이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때깔이라도 고운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 말 못 들어봤어."
"아... 여긴 없는 말이었네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 드실 건가요?"
"당연히 안 먹..."
안 먹는다는 막을 하려고 했지만, 주먹밥 냄새가 코를 스치자 견디기 힘든 허기가 몰려왔다.
"...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우습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 죽으려고 하던 주제 고작해야 주먹밥에 흔들리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꼬르륵
그리고 다시 한번 배가 울리는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주먹밥에 달려들어 목이 가득 멜 정도로 베어 물었다.
"... 읍..!... 으븝..!, , 끅... 끄윽... 흑..."
"천천히 드시지요. 체하겠어요. 자, 물입니다."
그렇게 그가 건네준 주먹밥을 죄다 먹어 치우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이 되돌아왔다.
"...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내 속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고 있는 남자를 보자 괜히 화가 난다.
"근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보다시피 전 가진 것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보답입니다."
"... 누가 안 죽는데요? 밥도 먹었으니 이제 죽을 거예요."
그러자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어차피 버릴 목숨이라면 제게 맡겨주시는 건 어떤가요?"
"... 당신에게 맡기면... 뭐가 달라지나요? 어차피 저는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 그냥 이대로 죽는 편이 나아요."
"아니요. 제 손을 잡으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하... 달라진다고요? 그럼 말해봐요.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말해보라고요!"
그 질문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 제가 당신을 '첫 번째 제자'로 만들겁니다. 백소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