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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86화 (286/354)

Chapter 286 - 네가 여기서 왜 나와? (8)

여신의 세 명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여신교의 교전을 조금만 읽어봐도 나오는 내용이라 나조차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트리스티아나 베를리오즈가 세 명의 제자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안 해봤고 무엇보다...

'... 마왕도 여신의 제자라고?'

이번 생에도 그렇고 전생에도 그렇고 나는 마왕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몇 번이고 지원 요청을 해봐도 게헨나 왕국은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부에 잠입해서 선동하기에도 아인족 특유의 감 때문인지 곧바로 들켜서 죽어버렸으니까.

말하자면 얻을 건 없는데 위험도는 높은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인 셈.

엔딩을 보겠다고 미쳐있었던 나로서는 몇 번 시도한 끝에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었다.

그때 비앙카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뭐야... 인챈트를 전수 받은 거라면 그럼 현자 루멘하르크와 영웅 아스란 전설은 전부 사기였던 거야?"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루멘하르크와 아스란은 천재가 맞다. 그 녀석들은 본녀와 트리스티아가 전해준 지식을 순식간에 흡수했고, 인간... 그러니까 우리 같은 존재가 아닌 순수한 인간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변형까지 시켰으니까."

그 말에 동의하듯 트리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중에서도 루멘하르크가 만들어낸 혈족 마법은 특별했어. 나도 비슷하게나마 사용해보려고는 했지만,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쓸모가 없었고."

"..."

효율이 떨어진다는 말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리아나를 공략한 뒤에 잠깐 빌려서 사용을 해봤지만, 딱 한 번 사용한 것으로 마력을 전부 소모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생명력도 쭉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던 건 나한테 희미하게나 황실의 피가 섞여 있어서 그런 건가?'

대가문쯤 되면 피가 몇 대 정도 위로 거슬러 가면 다 황실과 혼인으로 맺어져 있었다.

결국, 내게도 황실의 피가 몇 방울 정도 섞여 있는 셈이다.

"캬캬캿. 자, 그럼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쯤하고 이제 네 이야기를 해주마."

"제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칼리오페와 대가문의 이야기지."

입꼬리를 슬쩍 비튼 베를리오즈가 말을 이었다.

"아인족과의 전쟁에서 루멘하르크와 함께 많은 특별한 활약을 펼친 가문이 바로 지금의 대가문. 우르엘라, 칼리오페, 아멜리아다."

"저... 베를리오즈님?"

그때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릴리스가 끼어들었다.

"오, 그래! 무슨 일인고?"

"대가문 중에 파볼리에가 빠졌는데요?"

"캬캬캬캿... 빠진 게 아니라 뺀 거다. 파볼리에는 본래 루멘하르크 제국 출신이 아니라 아스란에서 넘어갔으니 말이다."

"... 네?!"

설마, 대가문인 파볼리에가 타국에서 넘어왔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는지 릴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캬캬캿... 생각해본 적 없나? 어째서 파볼리에만 성이 앞에 붙는지?"

"드... 듣고 보니 그러네요!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 그래, 성이 이름 앞에 붙는 건 아스란의 제국의 특징이지."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본 베를리오즈가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뭐, 어찌 됐든 철저하게 아인족들을 핍박한 게 네 선조라는 말이다."

"... 그런가요."

"호오...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구나. 네 선조가 그토록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말이지?"

베를리오즈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백 년 전의 일이라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요... 저는 인간이니까요. 인간 측에서 베를리오즈님의 들었을 때는 아인족들도 잘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요."

인간측에서 베를리오즈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자기들이 힘이 있을 때는 인간들을 핍박하다가 인간이 힘을 생기니 태도를 싹 뒤집은 거 아닌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 이 시대의 인간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미안하구나. 괜히 본녀가 못된 말을 했구나."

내 대답을 들은 베를리오즈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비앙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예전부터 대가문끼리 해 처먹고 난리가 났네. 에휴, 우리 가문은 뭐했나."

"... 어머, 꼬마 아가씨 가문도 제법 큰일을 했는데?"

"우리 가문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 우리 가문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

잠시 옛날 일을 떠올리던 트리스티아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왜 몰락하였는지 알아."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봤으니까."

"... 뭐?"

"베아트리스 가문이 몰락한 건 아인족들을 숨겨줬기 때문이야."

트리스티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인족이라면 어린애들이나 노약자들까지 전부 철저하게 살해하던 황가와 대가문과는 달리 베아트리스 가문은 그들을 도망치고 숨겨줬지. 그러다가 결국 들켜서 황실의 보복을 받았지만... 나도 최대한 탄원을 간청해봤지만, 멸문을 막는 게 고작이었어."

거기까지 말한 트리스티아가 비앙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 지금에 와서야 감사를 전하네."

"아니... 나한테 감사를 해도. 그리고 멸문을 막아준 건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캬캬캿. 그게 정말이더냐? 본녀의 제자의 가문이 그런 일을 했다고?"

"아니, 넌 왜 모르는데? 둘이 같이 있었다면서!"

같이 놀라던 베를리오즈의 모습에 비앙카가 소리쳤고 트리스티아는 눈을 흘겼다.

"뭐야...? 베를리오즈. 너 그래서 꼬마 아가씨를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니, 그저 본녀의 제자라서 데리고 온 것뿐이다. 뭐, 네 말을 들으니 그런 가문이 있었던 건 기억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이름은 잊었었다."

"뭐... 저런... 하, 됐어."

팔짱을 낀 비앙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거렸다.

나는 비앙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 비앙카, 뭔가 기뻐 보이네요."

"응, 기쁜데."

"뭐가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비앙카.

"나는 평생 내 가문이 미워했어. 과거에 영광에 사로잡혀있던 멍청한 가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허튼짓을 하다 망한 게 아니라 약자를 도와주다 망한 거잖아? 그래도 이 정도면 망한 이유로는 봐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비앙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뭐야, 애 취급 하지마...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나 너보다 연상이야."

"... 애 취급하는 게 아니라 기특해서 그래요."

"그게 애 취급이라는 거야... 에휴..."

툴툴 대면서도 얌전히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비앙카를 잠시 지켜보던 베르리오즈가 입을 열었다.

"캬캬캿.. 그럼 이제 옛날이야기는 전부 다 한 것 같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베를리오즈의 분위기가 싹 바뀌며 트리스티아를 바라보았다.

"트리스티아. 네가 기억을 봉인하고 이곳에서 저런 장난감이나 만들던 이유는 안다... 더는 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은 거겠지."

"...."

"허나, 지금 인간의 힘만으로는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 수단을 가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본녀 역시 더는 강신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깨고 이 아이에게 강신을 가르쳤다."

어쩐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백소소를 프린세스 메이킹하는 루트를 탔을 때, 아스란의 열두 가문 중에 강신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 결국, 배드엔딩을 보는 그 순간까지 백소소는 강신법을 배우지 못했지.'

그런데 베를리오즈가 오자마자 강신법을 비앙카에게 전수해준 건 아무리 로레오스의 노력이 있었다 한들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 이것도 베를리오즈 나름의 노력이었나.'

본래라면 베를리오즈도 트리스티아처럼 재앙을 그저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수많은 사건이 달라졌다.

많은 싸움을 막고, 내전을 막고, 재앙을 막았다.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분명 발버둥을 쳤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그 사실에 가슴이 불현듯 벅차오른다.

"그러니 트리스티아. 너도 그만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 다시 무기를 만들어라. 네 무기가 있다면 수많은 희생자를 줄일 수 있을게다."

"... 나... 나는... 더 이상... 무기를..."

"어리광부리지 마라! 트리스티아! 이미 더럽혀진 손이다! 이제와서 다시 더럽혀지는 것이 어떻다는 것이냐!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보아라!"

".... 베를리오즈! 너는 내가 겪은 일을 알잖아!"

"아니까 하는 말 아니냐! 이번에는 네 손으로 인간과 아인족의 목숨을 구하라고 하는 거다!"

점점 거칠어지는 언쟁에 내가 트리스티아와 베를리오즈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둘 다 잠시만 진정해요."

"아이야. 빠져있거라. 지금은 네가 끼어 들만한 상황이 아니다."

베를리오즈가 나를 밀치고 트리스티아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나는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아이야, 비키라고 했을 텐데?"

어느새 파충류의 눈을 한 베를리오즈가 올려다보며 위협했지만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베를리오즈님께서는 제가 있기에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은 없지 않을까요?"

".... 네 녀석... 그렇게 해서까지 트리스티아가 무기를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냐?"

베를리오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트리스티아는 만들어 줄 거에요."

"... 도... 련님?"

등 뒤에서 돌리는 떨리는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서 트리스티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기와 체념이 가득한 트리스티아의 얼굴.

".... 그래... 도련님이... 말한다면... 나는..."

만일 내가 여기서 억지를 부린다면 트리스티아는 결국 무기를 만들어 줄 거다.

그걸로 분명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건 트리스티아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어 비틀어버리는 일이다.

나는 결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저한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 뭔데 도련님... 뭐든지... 들을게..."

"트리스티아는 인간과 아인족들이 트리스티아가 만든 무기로 서로를 상처입히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 응. 맞아."

"그러면 인간과 아인족들을 상처입히지 않는 무기를 만들면 되잖아요. 오직 재앙만을 물리치기 위한 무기를."

그 말에 잠시 나를 올려다본 트리스티아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 무기는 주인을 가리지 않아.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만들어도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최악의 무기가 된다고."

"아니요.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트리스티아는 분명 그런 무기를 만들 수 있어요."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소리치는 트리스티아의 손을 꼭 잡고는 나는 또박또박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증명할게요."

나는 트리스티아를 지나, 벽장에서 똑같이 생긴 딜도를 두 개 꺼내어 그 중 한 개를 릴리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릴리스. 이것 좀 잠깐 보지 안에 넣어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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