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5 - 네가 여기서 왜 나와? (7)
트리스티아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넘실거리는 마력부터 시작해서 거친 감정의 격류까지.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눈앞에 있는 것이 트리스티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 트리스티아."
내가 조심스럽게 게 이름을 부르자 나를 바라본 트리스티아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련님..."
"괜찮아요. 트리스티아?"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정말 괜찮아."
애써 미소를 짓고는 다시 베를리오즈를 노려보는 트리스티아.
"베를리오즈. 잠시 대화가 필요할 거 같지?"
"캬캬캿... 그래.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 시간이 필요하겠지."
베를리오즈와 트리스티아 서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둘은 제법 키 차이가 있었기에 트리스티아가 베를리오즈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설마 너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본녀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느니라."
베를리오즈의 말에 코웃음을 친 트리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하,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야?"
"그리 까칠하게 굴지 말아라. 필요한 일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 필요한 일이 뭐냐고 묻는 거야."
"긴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어서 그런지 네 눈마저 탁해진 모양이구나. 보아라."
베를리오즈가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천기가 흐트러지고 있다.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그래서?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어차피 우리가 발버둥을 쳐봤자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 우리뿐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베를리오즈는 들었던 손가락을 움직여 나를 가르쳤다.
"하지만 저 아이가 함께한다면 다르다."
"도련님이...?"
나를 바라본 트리스티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너도 느끼고 있었을 텐데. 저 아이는 특별하다는 걸."
"...."
"저 아이 본신의 그릇은 그리 특별할 것은 없으나 저 아이는 운명을 바꿀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저벅─
이야기를 들은 나는 트리스티아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설명해줘요."
"... 도련님."
"제가 특별하다면서요. 그렇다면 저도 관계자인 거죠?"
"캬캬캿. 당연히 관계자니라! 들은 자격은 충분하지!"
"베를리오즈!"
"가만히 있거라! 네가 치마폭에 감싸고 돌 나이는 한참 지났다!"
소파에 털썩 몸을 걸친 베를리오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처음부터 전부요."
"캬캿!... 그래! 그러지. 일단 본녀와 트리스티아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알려주마."
베를리오즈는 매끈한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며 릴리스를 향해 턱짓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저 아이의 선배 같은 존재이니라."
갑작스럽게 지목된 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저 릴리스요?"
"그래."
그런 릴리스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 본 베를리오즈가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읊었다.
"여신께서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길을 거니니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더라..."
"... 그건 경전의 구절 아닌가요?"
"그래, 맞다. 여신교에서 말하던 여신을 섬기던 세 명의 제자... 그것이 본녀와 트리스티아다."
".....!!!!"
베를리오즈의 발언에 릴리스는 완전히 굳어버렸고 신자가 아닌 비앙카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미안해 도련님.."
나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트리스티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럼 트리스티아는..."
"정체를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도련님도 알겠지만 나는 기억을..."
"몇 살인가요?"
"뭐...?"
트리스티아가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보다 연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자...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해 도련님? 나이보다 훨씬 중요한 게 나왔잖아?!"
"나이보다 중요한 거요? 트리스티아의 나이보다 중요한데 어디 있나요?"
단언하는 내 모습에 트리스티아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았다.
"여신교의 교전이 처음 나온 게 대략 300년 전이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적혀있는 트리스티아와 베를리오즈의 나이는 최소한..."
그러자 충격에서 깨어난 릴리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 아! 아니에요 선생님! 교전이 처음 발행된 건 293년 전이지만 교전에 적혀있는 내용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어요! 최소한 500년은 넘었다는게 교단의 정설이에요!"
"그렇다면..."
"그만!!!"
내가 계속해서 나이를 추측하려고 하자 트리스티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성녀님... 이제 그만해! 더 말하지 마!"
"아... 죄... 죄송해요.."
고개를 숙인 릴리스가 사과하자 트리스티아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무... 물론 도... 도련님.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내가 좀 나이가 많아 보일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인간 나이로 치면 20살 정도라고."
"... 20살이면 저보다도 어린데요?"
"캬캬캿! 맞다! 그리고 인간의 나이는 무엇이냐? 우리도 인간이지 않더냐??"
"입 닥쳐 베를리오즈!"
슬슬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트리스티아의 모습에 내가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20대라고 할께요."
"하아...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하면 진짜로 화낼 거야."
"네, 알겠어요."
이제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트리스티아의 모습에 나는 살며시 웃고는 베를리오즈에게 말했다.
"그럼 계속 설명해주시죠."
"캬캿.. 그래 그럼 계속 설명하마."
"잠깐만 기다려봐."
그때 조용히 있던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여신교에서 말한 제자는 3명이잖아? 둘은 여기 있다지만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어?"
"... 캬... 캬... 쯧, 이건 억지웃음도 안 나오는구나. 그것도 차근차근 설명할 테니 기다려 보아라."
비앙카의 질문에 베를리오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아직 여신께서 이 땅에 계시던 때의 이야기다.... 태초에 여신께서는 자신의 피와 살을 떼어서 인간과 아인족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자신을 닮은 3명을 뽑아 제자로 삼았지. 그것이 나와, 트리스티아 그리고... 오르펠리아다."
오르펠리아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자 비앙카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있어 봐. 오르펠리아라면..."
"알고 있나보구나.... 그래, 아인족의 나라. 게헨나의 여왕. 그 아이가 여신께서 고르신 세 제자 중 한 명이다."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확실히 떠올랐다.
아인족...
그러니까 마족들의 왕.
플레이어에게는 마왕이라고 더 잘 알려진 존재.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몰랐는데 이런 설정이 있었을 줄이야.
"잠깐만... 그 아인족의 여왕이 여신의 제자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건데...?"
"재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 우리는 여신의 제자로서 여신의 곁에서 영원을 허락받은 존재였다."
긴 숨을 내쉰 베를리오즈가 옛날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 여신께서 이 세계에 계신 때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인간과 아인족들의 모두 힘을 합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수가 불어나자 인간들보다 강한 힘을 지녔던 아인족들은 인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지."
"그 모습을 보기 괴로워하신 여신께서 친히 중재에 나셨지만... 인간과 아인족들의 수는 급격히 불어났고 여신께서는 점차 막기 벅차하셨고.... 그러던 어느 날 아인족과 인간들의 전쟁이 발생했다."
"여신께서는 자신의 아이들끼리 상잔을 벌이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지 못하시고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셨지."
"...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신께서 사라지니 더는 전쟁을 막을 것이 없었다. 완전한 전면전이 펼쳐졌고... 전쟁은 당연히 인간들의 패배였다. 머릿수야 아인족들보다 인간들이 많았지만, 당연히 무기나, 마법 같은 기술은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고, 육체의 힘으로만 싸운다면 아인족 한 명이 인간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베를리오즈는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긴숨을 내뱉었다.
"..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루멘하르크와 아스란이라는 이름의 두 사내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본녀와 트리스티아에게 인간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여신의 제자로서 어느 한 종족의 편을 들 수 없어 거절했지만..."
"그들의 말은 달콤했다. 인간들이 아인족만큼 힘을 얻게 되어 균형을 맞추게 되면 다시 처음과 같이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그리하면 여신께서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걸 믿고 말았다. 아니, 믿고 싶었다. 여신의 제자니 뭐니해도 결국 우리도 인간이던 것이겠지."
"그리하여 본녀는 '강신'을 아스란에게 트리스티아는 '인챈트'의 기술을 루멘하르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트리스티아를 바라보았다.
루멘하르크가 '현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마법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문명을 지탱하는데 필수적인 '인챈트'를 그가 개발했기에 그리 불렸던 것 인데...
"트리스티아가 인챈트를 가르쳐줬다고?"
"그래, 지금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인챈트 기술은 트리스티아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내 질문을 간단하게 긍정한 베를리스오가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강신'과 '인챈트'를 손에 넣은 인간들은 아인족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우리도 납득한 일었다."
"... 허나, 루멘하르크와 아스란이 우르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힘을 얻은 인간들이 아인족들과 화해를 하기는커녕 지금까지 받았던 것을 갚아주겠다는 듯 핍박하고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르펠리아는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지 멈춰달라고, 하지만...."
"멈추지 못했어."
트리스티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지식의 전수를 그만두고 힘을 회수하려고도 노력해봤지만... 한 번 기술을 얻은 인간들의 발전 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한참 상회했어."
"그래, 열화되었다지만 인간들은 '강신'을 활용해 육체에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고, 인챈트를 상용해 '마도구'의 양산을 시작했다. 그렇게 되고 나니 타고난 육체의 차이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오르펠리아가 모든 아인족을 이끌고 사막으로 떠나고 나서야 인간들은 전쟁을 멈췄고..."
거기까지 말한 베르리오즈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인족의 땅을 빼앗은 루멘하르크와 아스란의 손에서 제국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