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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83화 (283/354)

Chapter 283 - 네가 여기서 왜 나와? (5)

'제게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주인님.'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루시아가 내게 남긴 말.

.... 과연 루시아는 무엇을 감추고 있었을까.

명령한다면 당장이라도 털어놓을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가 내게 감춘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배려를 무시한 채, 진흙투성이의 발로 루시아를 마음을 헤집어놓고 싶지 않다.

끼익─

회의장 밖으로 나오자 비앙카가 등을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 비앙카.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내가 기다리면 안 돼?"

언제나처럼 틱틱거리는 비앙카의 반응이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당연히 되죠."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백소소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의외다.

백소소라면 당연히 남아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벌써 돌아가다니.

그때 비앙카가 말했다.

"... 백소소를 찾는 거라면 내가 쫓아냈어."

비앙카의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요? 쉽지 않았을 텐데."

"흥, 다 방법이 있어. 그보다... 너 괜찮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비앙카.

"뭐가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에이, 저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요."

"... 루시아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떠났어."

갑작스럽게 나온 루시아의 이름이 애써 평온을 유지하려던 마음을 뒤흔든다.

"...."

"하아... 나도 편들어주기는 싫은데. 루시아 걘 그냥 너랑 눈만 마주쳐도 좋다고 헤실거리는 애잖아. 그런 애가 표정을 지은 거라면 뭔가 있던거겠지. ... 둘이 싸웠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 미안해요. 비앙카."

내가 대답하는 대신 사과하자 비앙카가 눈을 껌뻑거린다.

"갑자기 나한테 왜 사과하는데?"

"관련 없는 일에 말려들게 해서요."

"하!"

퍼억─

비앙카의 주먹이 가슴을 때리며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다.

"바보냐? 너한테 관련된 일이 나랑 관계없을 리 없잖아!"

"...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안 물어봐도 괜찮겠어요?"

"뭘 물어봐. 백소소 쟨 뭔지? 너랑 무슨 관계인지? 루시아와 둘이서 알고 있는 이야기는 뭐지 같은 거?"

역시 비앙카도 눈치챘나 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지만 정보가 그렇게 흘렀는데 눈치채지 못하길 바란 건 욕심이었다.

"... 알면서 왜 안 물어봐요?"

툭─

그러자 다시 한번 내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댄 비앙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냥, 믿는 거야. 너니까."

내가 루시아를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 비앙카가 남자였으면 반했겠어요."

"뭐래... 그럼, 여자인 나한테는 안 반했다는 소리야?"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는 비앙카를 와락 껴안는다.

"이미 한참 전에 반했죠."

"무, 뭐야 갑자기... 이거 안 놔?"

그 말에 진짜 내려놓자, 비앙카가 눈을 껌뻑거리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는다.

"... 놓으란다고 진짜 놓네... 이 새끼가.."

"장난이에요."

"아, 이씨! 놔! 늦었어! 이번에는 진심이니까 빨리 놔!!"

"싫어요. 내 여자라면서요. 그냥 안고 있을래요."

잠시 발버둥 치던 비앙카가 이내 못 이긴 척 힘을 풀더니 가슴에 얼굴을 비벼댄다.

"뭐하는거에요?"

"시끄러워..."

질문을 듣기 싫다는 듯 얼굴을 비비는 수준을 넘어 아예 파묻어버린다.

"영역표시라도 해요?"

"... 맞아. 영역표시야."

개도 아니고 무슨 냄새로 영역표시를 하는지.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요."

"... 딴 년이 채갈까 봐."

비앙카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꾹 누른다.

"백소소도 그렇고 씨발. 넌 여자를 후리는 데는 그냥 타고 났어."

"잘생긴 걸 어떻게 해요."

"잘났다 개새끼야. 에휴.... 이걸 못생겨지라고 할 수도 없고."

"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야."

그렇게 비앙카와 장난치고 있자 문득 이곳에 둘 많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비앙카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말이 없어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

"...."

저물어 가는 태양과 끈적한 공기.

비앙카가 눈을 감고 발끝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나도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비앙카와 입을 맞추려던 순간....

"캬캬캿!... 꽤나 재미있게 놀구 있구나."

어디선가 푸른 머리의 방해꾼이 나타났다.

"뭐... 뭐야!!! 씨발! 어... 어디서 튀어나왔어!!!"

"튀어나오다니... 본녀는 당당하게 복도를 걸어왔다."

"아니! 왜 소리도 없이 왔냐고!"

"지금 소리를 내지 않았는고?"

"아!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캬캬캿! 본녀에게는 잘 통한다. 제자야. 그보다 묘한 기운이 느껴져서 와봤더니... 제자가 교미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베를리오즈의 직설적인 말에 비앙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교, 교, 교... 교미 같은 소리하네...!!"

"교미가 아닌게냐? 발정한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

"다... 닥쳐!!"

비앙카가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자연스럽게 피하는 베를리오즈.

"쯧쯧쯧, 고얀 것 스승한테 주먹질이나 해대고..."

"스승다운 소리를 해야 스승 취급을 하지!!! 여긴 왜 왔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왔다고... 하지만 이미 사라졌구나."

베를리오즈가 말하는 묘한 기운은 백소소를 말하는 것일까.

하긴, 같은 아스란 쪽에서 살았으니 서로를 알만도 했다.

"그보다 짧은 기간이었다지만 스승과 제자로서의 연이 있는데 돌아와 놓고 인사도 하러 오지 않는 게냐?"

"나중에 가려고 했어!! 그리고 할 말 없으면 이제 좀 가!!!"

"아... 그리고보니 할 이야기가 있었다. 자, 받거라."

빽 지르는 비앙카를 무시하며 베를리오즈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

"...!"

소매에서 나온 건 굵고 긴 검은색의 뱀과 같은 무언가.

그 위협적인 형태에 반사적으로 나와 비앙카가 물러섰고 검은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본녀는 받으라고 말했는데 어째서 피하는고?"

웅우─ 웅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딜도였다.

그것도 트리스티아가 제작한 기간한정가챠를 올컬렉션을 해야 받을 수 있는 6세대 한정판 트루블랙 딜도.

"지... 지금 뭘 처 꺼내는 건데! 저런 걸 왜 가지고 다녀!!"

"캬하하핫! 저런 거라고 말하지 말아라. 네 방에서 가져온 것이니."

"뭔 개소리야!! 나는 저런거...."

그러면서 다시 한번 딜도를 확인한 비앙카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깜둥아아아!!!"

바닥에 떨어진 딜도를 주워 소매로 슥슥 닦고는 옷 안에 집어넣는 비앙카.

"... 비앙카?"

"다... 닥쳐!!! 한 마디도 하지마!!"

"넵."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지만, 한마디라도 더 하면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비앙카의 의지는 잘 느껴졌다.

소매로 눈가를 훔친 비앙카가 베를리오즈에게 소리를 질렀다.

"미, 미친거 아니야! 남에 방에는 왜 들어가!"

"그딴 건 중요치 않다."

"존나 중요한데 뭔 개소리야!"

"... 그보다 그 장난감은 어디서 손에 넣은 것이냐?"

"몰라! 말 안 해!!"

이제 진짜로 울 듯한 얼굴로 소리치는 비앙카.

하긴 나도 연인 앞에서 방에서 쓰던 내가 쓰던 오나홀을 가지고 와서 어디서 샀는지 추궁하면 울어버릴지 모른다.

"중요한 질문이니 어서 대답해라."

그러자 베를리오즈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며 말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것 같았기에 내가 비앙카와 베를리오즈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딜도가 그렇게 가지고 싶으십니까."

"하, 본녀는 저런 장난감에게는 관심이 없다. 단지 저걸 만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에게 물으시지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호오... 그러느냐? 그럼 대답하거라. 어디 있는고? 저걸 만든 사람은?"

"답하기 전에 일단 그 눈부터 감추시지요."

내가 눈 옆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하자 베를리오즈는 그때야 자신의 상태를 알아챈 듯했다.

"... 이런... 미안하구나. 본녀도 위협할 생각은 없었느리라. 용서하거라."

다시 눈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베를리오즈가 물었다.

"자, 이제 되었지. 누가 만든 것인 게냐?"

"그 전에 제 질문부터 대답해주시죠. 왜 알고 싶어서 하는 건가요?"

"바라는 것이 많구나... 뭐, 좋다. 오래전에 헤어진 지인일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다.

"지인이요?"

"그래, 용도야 불순하더라도 자체복원, 온도조절, 크기 조절 등.... 저 안에 담긴 인챈트의 기술은 현시대의 것을 몇 단계를 뛰어넘었다. 본녀가 알기로 그런 만들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뿐이지."

거기까지 말한 베를리오즈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트리스티아. 그녀가 이곳에 있구나."

정확히 이름까지 나온 이상 베를리오즈가 트리스티아의 지인인 건 확실한 모양이다.

하지만...

"... 그렇다면요?"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말해줄 수는 없다.

지인이라고 해서 꼭 긍정적인 인연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얼굴 본 지가 오래되어 그저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만나게 해다오."

"...."

"혹시 본녀가 헛짓거리할 것이라 걱정하는 것이라면 본녀의 이름에 걸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맹세하마."

베를리오즈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라면 이름을 거는 것도 제법 큰 제약이지만 나로서는 만족할 수 없다.

"맹세로는 안됩니다. 맹약을 맺으세요."

"지금 감히 본녀의 목에 목줄을 걸겠다는 게냐?"

다시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베를리오즈.

"맹약을 맺지 않으면 알려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의 위압을 받고도 물러서지 않으니 방법이 없구나.... 알겠다. 맹약을 맺으마."

운이 좋았다.

만일 그녀가 성인용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트리스티아의 가게를 금방 찾아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베를리오즈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트리스티아를 만나게 됐겠지.

물론,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 줄 모르는 거 아닌가.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자, 트리스티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맹약을 맺었다. 이걸로 되었느냐?"

"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마차 정류장으로 오시지요."

"알겠다... 아, 그리고 분홍 머리의 성녀... 그 아이도 데려가자꾸나."

"릴리스를요?"

여기서 갑자기 릴리스를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러자 베를리오즈는 마치 아이를 보는 어미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도 관련되어있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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