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2 - 네가 여기서 왜 나와? (4)
야릇하게 아랫입술을 핥은 백소소가 말을 이었다.
"아스란과 루멘하르크 제국의 군사력은 그야말로 백중세... 하지만 내전으로 엉망이 된 루멘하르크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옵니다."
백소소 말대로였다.
리아나가 일으켰을 내전은 루멘하르크 제국에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을 가져왔으니까.
만일 그때를 노리고 아스란이 침공했다면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 막아버릴 줄 이야... 역시 서방님이시옵니다. 서방님의 위업에 소녀는 그저 감격하고 감동할 뿐이옵니다."
황홀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던 백소소가 일순 표정을 굳히며 루시아에게 쏘아붙였다.
"그에 반해 루시아 당신은... 전혀 쓸모가 없사옵니다."
"... 뭐라고?"
"전혀 쓸모없다고 했사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서방님의 곁에 붙어있던 주제 황녀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다니..."
거기까지 말한 백소소가 루시아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당신이 하는 것이라고는 그 음란한 몸으로 서방님을 유혹하는 것뿐이옵니까?"
"네가 뭘 안다고 입을 함부로 지껄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감정이 느껴지는 루시아의 외침.
"... 내가 ... 내가 어떤 마음으로...!! 주인님의 곁에 있는지... 네가 알기나 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 함부로 떠들어대지 마!!"
"네, 소녀는 모르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고 싶지도 않사옵니다. 소녀에게는 그저 당신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백소소의 붉은 눈에 루시아의 푸른 눈이 비쳤다.
"당신은 목숨보다 사모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고통을 아시옵니까? 모르시겠지요. 언제나 기회가 있는 건 당신이었으니 말이옵니다."
"백소소!!"
"어리광부리지말아!! 루시아 우르엘라!!"
"둘 다 그만둬라!!"
루시아와 백소소가 서로를 향해 쏘아내는 살기가 짙어지자 내가 끼어들었다.
"주인님... 하지만..!"
"내가 그만두라 말했다!"
다시 한번 소리치자 루시아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사죄했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
둘 사이에 흐르던 살기가 흩어지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백소소. 이 이상 루시아를 도발한다면 두 번 다시 내가 너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서.. 서방님... 알겠사옵니다... 이제 얌전히 있을 테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시옵소서..."
루시아와는 죽일 듯이 싸워대던 주제 내 한마디에 쩔쩔매는 백소소의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진다.
"... 백소소."
"... 네... 서방님... 말씀하십시오."
"확실하게 말해두마. 나는 리아나를 죽일 생각은 커녕 위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백소소가 큰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 어... 어째서입니까? 지금이야 숨을 죽이고 있다지만 그 황녀는 언젠가 반드시 서방님을 태워죽일 것입니다. 그 전에 미리 처리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백소소..."
대답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상태창을 열어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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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교 된 히로인-
─루시아 우르엘라
─비비안 베아트리스
─비앙카 베아트리스
─레이카 칼리오페
─가르시아 마이샤
─엠마
─트리스티아
─아이리스
─파볼리에 멜피사
─릴리스
─마르잔
─리아나 루멘하르크
─────────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
... 그곳에 백소소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리아나를 믿을 수는 있어도 너를 믿을 수 없다."
"... 서... 방님?... 어... 어째서입니까.... 왜... 황녀... 아닌... 소녀를... 내치시옵니까."
백소소가 상당히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리아나는 내 여자지만 너는 내 여자가 아니다."
대답을 들은 순간, 백소소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며 고개가 떨궈졌다.
"...."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든 백소소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 영원토록 서방님을 사모하옵니다."
쏴아악─!
"...!"
그 순간, 백소소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그렇게 백소소의 손톱이 그녀의 목에 꽂히기 직전.
콰악─!
어느샌가 백소소의 옆에 도착한 비앙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짐승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보시다시피 죽으려고 했사옵니다."
죽으려고 했다는 백소소의 말처럼 그녀의 손톱이 닿은 목덜미에서 한줄기의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러니까 왜 뒤지려고 했냐고!"
"소녀의 모든 삶은 서방님만을 위해 존재하옵니다. 서방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소녀는 쓰레기일 뿐. 쓰레기는 사라지는 게 옳사옵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백소소에 비앙카 이를 까득 갈며 말했다.
"너 미쳤어? 남자한테 차였다고 해서 죽으려고 해?"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사옵니다. 당신은 서방님께 버림받고서 살아갈 수 있사옵니까?"
"... 뭐?"
"서방님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걸 인정 할 수 있겠냐고 물었사옵니다."
그 질문에 나와 백소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비앙카.
"나... 나는...."
결국, 비앙카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비앙카를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린 백소소가 말했다.
"고작 당신 정도의 사랑으로도 죽음을 떠올리게 하지 않사옵니까? 하물며 제 사랑은 당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 하... 지랄 하지 마. 유진 저 새끼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그리고 뒤지려면 다른 곳에서 뒤지지 왜 기분 좆 같게 눈앞에서 뒤지는 건데?"
그러자 백소소 내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 그래야만 서방님께서 저를 영원히 기억해주실 테니 말이옵니다."
백소소 말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다.
리아나와는 다른 느낌의 백소소의 광기.
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에 내가 주먹을 꽉 쥐며 결심했다.
'... 절대로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백소소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끌려다녔다가는 앞으로도 백소소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시할 것이다.
"이제 다 떠들었나?"
"... 죄송하옵니다. 서방님. 금방 목숨을 끊을터이니..."
"그만두어라."
그러자 백소소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허나 서방님. 서방님에게 버려진 소녀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내 여자가 아니라고 했지, 너를 버리겠다고 한 적은 없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을 지켜진다면 너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아... 가.. 감사하옵니다. 서방님."
"뭐? 너 진짜 이런 미친년을 받아들이겠다고?"
예상대로 비앙카가 방방 뛰었지만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네가 지켜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 흐으.... 네, 서방님 소녀 듣고 있사옵니다. 무엇이든 하명하옵소서."
백소소의 말에 내가 짧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먼자 리아나에 대한 적대 행위... 아니, 나와 관계된 모든 이들에 대해 적대 행위를 금지한다."
"네에... 서방님의 말씀. 소녀 마음속 깊이 새기겠나이다."
"...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 조건을 말하기 전에 루시아를 슬쩍 바라보니, . 잘근잘근 손톱을 씹어대는 게 역시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 말하는 건 좋지 않겠네...'
루시아가 두 번째 조건을 듣는다면 안 그래도 몰려있는 루시아의 정신상태가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 이후의 조건은 따로 찾아가서 말하도록 하지.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
"알겠사옵니다. 서방님."
"그러면 다들 루시아와 대화 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다오."
"... 응"
"알겠사옵니다."
쿠웅-
비앙카와 백소소가 문을 닫고 떠나자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시아."
이름을 부르니 잠깐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루시아.
"... 주인님"
나는 그런 루시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
***
"아씨... 너 때문에 쫓겨났잖아."
"이게 어째서 소녀의 탓이옵니까?"
"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인데?"
비앙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기가 묻고 싶은 말을 하는 백소소.
"... 그보다 어떻게 그쪽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옵니까."
"대답해줄 기분 아니니까. 입 좀 다물지."
"입이 거치사옵니다. 딱히 소녀는 그 쪽에게 나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만..."
"안 하기는 지랄... 처음부터 시비 건 건 벌써 기억에서 지웠나?"
"시비...? 아, 첩실이라고 한 것 말이옵니까? 그건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옵니다."
"그게 시비야 미친년아."
비앙카가 으르렁거리자 백소소가 뺨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이렇게 금방 발끈하시고 가슴만큼이나 마음도 작은 분이시옵니다."
"갑자기 가슴이 무슨 상관인데! 그.. 그리고 너도 나랑 별로 다르지도 않으면서!!"
비앙카의 지적에 백소소는 당당히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소녀는 가슴이 작은 게 아니라 눌러두고 있을 뿐이옵니다. 서방님 이외의 남성의 시선은 닿는 것 조차 불쾌하오니 말입니다."
"지... 지랄!!...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같으면 확인해보셔도 좋사옵니다."
".... 안해."
잠시 고민하던 비앙카였지만, 백소소의 당당한 태도에 결국 포기했다.
지금이라면 크기가 비슷하다고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지만....
만일 확인했다가 백소소의 말이 맞다면 그때는 정신승리도 불가능하니까.
"그럼 이제 질문에 답해주시지요."
"... 뭔 그럼이야, 그리고 무슨 질문."
"벌써 까먹은 것이옵니까? 처음에 묻지 않았사옵니까. 당신이 제 손목을 붙잡았을 때 보여준 그건 분명 '강신'이었사옵니다."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묻는지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백소소.
"... 강신이면 뭐 어쩌라고. 그게 문제야?"
"문제이옵니다. 아스란의 열두 가문에서도 전승이 끊기 그 기술을 어찌 당신이 알고 있는..."
철컥-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루시아가 걸어 나왔다.
"...."
"...."
백소소와 짤막한 시선 교환이 끝나고 루시아는 아무 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의외라는 듯 비앙카가 물었다.
"또 시비 걸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안 하네?"
"... 소녀가 서방님이 명하신 걸 어길 리 없지 않사옵니까. 루시아에게는 어떠한 말을 하던 적대 행위가 될 것인데 침묵만 이 답이옵니다."
"그럼 나한테는 왜 적대 행위를 하는데."
"소녀가 언제 적대 행위를 했사옵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게 적대 행위야."
"어째서 이것이 적대 행위옵니까?"
큰 눈을 껌뻑거리며 묻는 백소소.
"내가 그렇게 판단하니까. 유진이의 명령은 안 어긴다니 벌써 어겼네."
"... 그, 그건 치사하옵니다. 서방님의 명령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면 소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않사옵니까!"
"치사하건 말건... 앞으로 3초 안에 안 꺼지면 유진이한테 이를 거야. 3, 2.. 1... 유진..."
비앙카가 회의장의 문을 열려고 하자 백소소가 뒤로 펄쩍 뛰어나며 말했다.
"아, 아! 알겠사옵니다! 그럼 다음에 물으러 올 테니 고자질은 그만두옵소서."
"아니. 다음에도 오지 마."
"그럼 다음에 뵙겠사옵니다."
일단 물러나지만, 끝까지 자기 할 말을 하고 떠나는 백소소의 등 뒤로 비앙카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