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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72화 (272/354)

Chapter 272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9)

"어째서 멜피사여야 했습니까?"

처음 멜피사의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었다.

멜피사를 건드리면 나와 대립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멜피사를 이용한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지금까지 내가 세력을 드러낸 적은 없으니, 라인그람도 정확하게 내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적어도 칼리오페에 가문과 리아나가 내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멜피사를 건드렸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라인그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네. ... 일단은 자네가 멜피사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네."

라인그람의 대답을 듣는 순간 머리에 피가 쏠린다.

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는지 라인그람이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 이것에 대해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네. 멜피사가 자네에게 이렇게 멜피사를 소중하게 여겼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일세."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나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진, 자네도 문밖의 남자를 보았겠지."

"예, 보았습니다. 강하더군요."

어떻게 내가 모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

그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전성기의 트리스탄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라인그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하겠지.... 저래 봬도 제국제일검이니 말이야."

제국제일검

말 그대로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를 뜻하는 말.

'아카조교사'의 몇몇 루트에서 라인그람이 즉위했을 때, 에르덴 칼리오페가 받는 칭호였다.

루멘하르크 제국 자체가 검보다는 마법을 중시하는 풍토를 지녔지만, 그래도 최강이라는 칭호는 그리 간단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제일검은 오직 루멘하르크 제국의 황제만을 섬기지."

"그렇다면..."

"그래, 즉위식을 치르기 전까지 제국제일검은 짐이 아닌 짐의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네. 그리고 아버지는 의식을 잃기 전 제국제일검에게 자신의 병상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지."

"...."

라인그람의 말을 듣자 더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도를 걸어오며 제국제일검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은밀 기동에 특화된 멜피사라고 해도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반드시 제국제일검에게 감지 되었을 것이다.

'... 결국.'

제국제일검이 황제를 지키고 있는 이상 멜피사의 암살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네. 아무리 멜피사에게 '그림자'가 있다고 한들 그림자에서 나오는 순간 제국제일검에게 제지당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멜피사가 암살할 수 있던 겁니까?"

버림패로 썼다기에는 멜피사는 실제로 암살에 성공했다.

"애초에 저는 멜피사에게 제국제일검이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멜피사에게 제국제일검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

멜피사가 내게 정보를 감췄을 리 없으니 멜피사도 제국제일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라인그람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짐의 입에서 나오는 극비 정보일세. 자네에게 마나를 건 '맹약'까지는 강요하지 않겠지만 맹세 정도는 받아야 할 수 있는...."

"... 폐하."

라인그람의 요구에 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저와 거래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제국의 황제에게 말한다기에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

하지만 내게는 황제를 갈아치울 수도 있는 힘이 있었다.

"... 알겠네. 말하도록하지."

"....."

"한 달에 세 시간, 제국제일검이 황제의 곁을 떠나는 시간이 존재하네."

그 이야기를 듣자, 어째서 라인그람이 맹세를 언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제일검이 황제의 곁을 떠나는 시간이 곧 황제가 암살에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일테니 말이다.

"제국제일검이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사내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이기 말일세. 최소한의 휴식은 필요하지. 그래서 그때만큼은 제국제일검을 대신해 수 십 명 황실의 기사들이 아버지를 지켰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라인그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짐은 그때를 노리고 멜피사에게 암살을 의뢰했네. 갑작스러운 계획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 달이나 지나서야 다음 기회가 생기니 말일세."

"그사이에 만일 선제 폐하께서 깨어났다면 더는 암살의 기회조차 얻기 어려울테니 말이군요."

"... 그렇다네."

이유를 들으니 확실히 멜피사를 이용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작 30분 안에 수 십 명의 황실경비병을 뚫고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사람은 멜피사 정도 일 테니까.

"...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이었다.

[어째서 내가 제국 제일검을 몰랐는가?]

'처음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황제와 대화를 하던 중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일 리아나가 내전을 성공한 상태에서 폐하께서 황좌에 올랐다면 제국제일검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라인그람이 입을 열었다.

"자결을 명하겠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리아나가 가지고 있었던 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짐도 잘 알고 있네. 만일 그 아이가 진심으로 반란을 시도한다면 짐은 반드시 죽을 걸세 ...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황실의 핏줄은 리아나 밖에 남지 않으니.... 제국제일검 역시 리아나의 손에 넘어가게 되겠지."

".... 그렇게 되면 누구도 리아나를 막을 수 없게 되니까."

그 말에 동의하듯 라인그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하아.'

라인그람의 대답은 내가 가설과 일치했다.

눈앞의 황제는 화가 날 정도로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나야 리아나가 제국을 멸망시키기 전에 사실상 자살을 택하는 것을 알지만, 라인그람의 입장에서는 리아나가 진심으로 제국의 멸망을 바라고 있을 거로 생각할 테니까.

'... 제국제일검과 전성기의 리아나의 조합이라.'

상상만 몸서리쳐지는 지옥 같은 조합이었다.

"이것으로 짐의 답변은 끝났네. 지금부터는 자네가 결정하세."

라인그람은 처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눈을 감자, 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펴며 말했다.

"앞으로 폐하와 좋은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말해보게."

"첫 번째 제국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지 제 파벌에 속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군대의 지휘권을 주십시오."

"알겠네."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라인그람.

물론, 거절했어도 어떻게든 받아냈겠지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긴다는 건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맡기는 것과 별다른 바 없는 것이었다.

"... 제가 말해놓고도 그렇지만 너무 쉽게 허락하시는 거 아닙니까?"

"허락하지 않으면 물러날 건가?"

"...."

당연히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어떻게든 받아냈겠지.

그러자 라인그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괜히 더 시간을 끌 필요 없지. 그리고 애초에 자네도 이 조건을 위해 연회장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아닌가."

라인그람은 내가 연회장에서 벌인 소동이 단순히 열 받아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알고 계셨군요."

연회장의 소동으로 제국의 귀족들은 느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권력체계는 상관없이 앞으로는 오직 내 파벌에 속해있느냐 아니냐로 권력이 결정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아무리 계급이 낮은 사람이 군대의 지휘를 맡을지라도 내 파벌의 사람이라면 감히 불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조건입니다."

"듣고 있네."

"파볼리에 가문을 복문(復門) 시키십시오."

".... 공자님?"

그 순간 멜피사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지만, 나는 시선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 황실의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복문 선언만 하면 됩니다. 새로운 파볼리에 가문은 더 이상 황가의 비수가 아닐 테니까요."

"... 알겠네. 그럼, 마지막 조건은 뭐지?"

첫 번째 조건이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조건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여기있는 파볼리에 멜피사를 파볼리에의 가주로 임명하십시오."

"공자님!!"

멜피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 지금 저 같은 방계에게 무슨 소리를 하시는겁니까!... 당연히 파볼리에 가문은 직계인 공자님께서 이으셔야 합니다!"

"그녀의 말대로 직계의 피가 살아있는데 방계에게 가문을 잇게 할 셈인가?"

"가주야,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나는 멜피사의 잘록한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언제가 멜피사는 제 아내가 될테고, 그러면 직계의 피를 이은 아이가 가주 자리를 이을 테니 아무런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던 탓일까.

"....."

"....."

라임그람과 멜피사 양쪽 모두 돌처럼 굳은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민이 길군요. 앞서 말한 조건에 비해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닐 텐데요?"

"아니, 조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그때서야 석화가 풀린 라인그람은 두통이 몰려온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내게 물었다.

"하아... 유진 자네는 리아나와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가? 물론, 자네의 입으로 그런 말은 한 적은 없다만 분위기상으로 그렇게 생각했네만..."

"맞습니다. 연인 관계."

"그런데 멜피사와 결혼할 것이라고?"

"네."

라인그람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리아나와의 관계는 단순한 불장난에 불과한가?"

"아닙니다. 리아나와도 진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이해할 수가 없군. 리아나와 진지한 관계이면서 멜피사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건가?"

"네, 그리고 정확히는 멜피사와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조금 전까지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나?"

라인그람의 물음에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멜피사와 리아나, 그리고 루시아, 비앙카, 비비안, 릴리스, 트리스티아, 아이리스, 엠마, 마르잔.... 이들 전부와 혼인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중에는 황제가 모르는 이름도 잔뜩 섞여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라인그람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한 선언이었으니까.

"지금...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그 외에도 아내를 여럿 두겠다고?"

"네, 전부 제 여자니까요. 저는 누구 하나 놓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아, 차마 가르시아와 레이카는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막 나간다지만, 그래도 새어머니와 이복누나와 결혼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안한만큼 나중에 잔뜩 안아줘야지...'

내가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고 있자 라인그람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쉽지 않을 걸세... 애초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을 거고. 제국의 법과 규칙에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라인그람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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