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9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6)
벨베르트!! 지금 기절해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 엄청난 기회를 날릴 셈이야!!
상인의 혼이 외치는 소리에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던 벨베르트가 제정신을 차렸다.
'허...!.. 마... 맞아! 이건 엄청난 기회야!!'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유진 칼리오페는 황녀와 성녀, 그리고 두 개의 대가문을 거느리는....
지금껏 유례 없던 초대형 파벌의 중심 인물이란 말이다!
만일 황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는 파벌의 중심인물과 친분을 쌓는다면?
콩고물만 주워 먹어도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 결심했으면 당장 움직여야 한다!'
벨베르트가 기절 한 사이 연회장의 귀족들은 벌써 성녀나 대가문의 가주들에게 접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유진 칼리오페에게는 아직 접선이 들어가지 않았네....'
하긴, 저런 거물들이 동시에 연회장에 나왔는데 칼리오페 가문이라고 한들 삼남에 불과한 유진에게 시선을 주는 게 이상한 노릇이다.
'나한테는 오히려 좋은 상황이지! ... 그럼 간다!'
만일을 대비해 다시 한번 연회장의 분위기를 확인한 벨베르트는 누구보다 먼저 유진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 음?"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 칼리오페님. 린달라 가문의 가주 벨베르트라고 합니다. 작은 무기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고개가 아닌 허리를 숙임으로써 유진에게 철저하게 자신이 아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파벌을 제외한다면 유진은 벨베르트보다 격이 낮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보다 격이 낮은 상대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것은 앞으로 사교계에서는 벨베르트에게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 그런거 알게 뭐야! 나는 나를 믿는다!'
하지만 벨베르트는 무엇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만일 유진이 정말 파벌의 중심인물이고 허리는 숙이는 것으로 친목을 다질 수 있다면...
사교계의 악영향쯤이야 100번이고 더 받아도 된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채 잠시 기다리고 있자, 벨베르트의 눈앞에 손이 나타났다.
"허리를 드시죠. 벨베르트님."
양아치처럼 보이는 옷차림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상냥하게 웃는 유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두근─ 두근─
외모도 이 정도면 능력이다.
멀리서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왜 그렇게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힐끔 되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유진의 질문에 벨베르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잘생겼다고 하더라도 한참이나 얼굴을 쳐다보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할 줄이야!
"사과할 것까지는 아닙니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왜 하필 저에게 인사를 하러 오셨죠?"
질문과 함께 부드러웠던 공기가 단숨에 싸늘해진다.
마음을 곳마저 꿰뚫어 보는 듯한 유진의 검은 눈동자에 벨베르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 가슴에 달린 파벌의 문양 때문입니다. 여신교의 성녀님, 칼리오페의 가주,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까지 유진님이 속해 있는 그 파벌은 앞으로 제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대답을 들은 유진이 재미있는 걸 보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알겠지만 파벌에게 잘 보이고 싶다면 제가 아니라 말씀하신 분들에게 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힘도 권력도 없는 저에게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 유진님. 상인은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어느새 상인의 얼굴로 돌아온 벨베르트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유진님이 속하신 파벌원들이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쭉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발견했죠."
"그게 뭐죠?"
"파벌원들은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유진님께는 그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건 단순히 제가 다른 파벌원에 비해 급이 낮기에 시선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유진의 반문에 벨베르트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수도요. 하지만 대형 파벌의 수장들조차 연회장에 입장한 직후에는 자신의 파벌이 누가 있는지는 확인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유진님께서는 파벌원 모두에게 단 한 번의 시선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흐음..."
"여기서 제가 생각할 수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벨베르트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한두 명 정도가 유진을 무시했다면 벨베르트 역시 유진이 파벌에서 지위가 낮거나 미움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들어있는 파벌의 대다수의 구성원은 칼리오페의 삼남 정도는 '따위'라고 부르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유진 한 명을 괴롭히기 위해서 무시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베르트의 말이 끝나자 유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말해서 벨베르트는 유진이 파벌의 수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직감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성적으로는 저 엄청난 인물들을 이끄는 수장이 칼리오페의 삼남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 하지만.'
즉위식의 뒷풀이 연회장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유진이 무언가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 자체가 파벌의 중심인물이라는 증거라고 느껴졌다.
과연 도박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벨베르트의 손이 떨리고 입안이 바싹 마른다.
만일 유진이 파벌의 중심 인물이 아니라면....
벨베르트는 대가문의 수장과 성녀를 무시하고 삼남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른 셈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파벌을 황실과 맞먹을 정도의 초대형 파벌이다.
... 그런 파벌의 눈 밖에 난다면?
벨베르트의 상인으로서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때, 유진이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밀며 웃었다.
"벨베르트 린달라,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뛰어나네요.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
"가.. 감사합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벨베르트는 유진이 내민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어.. 언젠가 유진님이 제 도시에 오신다면 꼭 풀코스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그거, 기대하겠습니다."
툭툭─
그렇게 잠시 신나게 유진과 떠들고 있자, 누군가 벨베르트의 등을 건드렸다.
'... 누구야?'
유진의 앞이기에 티는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중한 기회를 방해받는다는 것에서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을까요? 파벌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 네.. 넵..!! 물론입니다."
루시아의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짜증이 사라진다.
짜증도 상대를 봐가면서 내는 거다.
루시아가 욕을 하며 꺼지라고 했어도 네, 알겠습니다 하고 꺼졌을 텐데 이렇게 친절하게 비켜달라는데 뻐기고 있을 수 있을 리 없다.
"그... 그럼 유진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유진을 중심으로 파벌의 문양을 단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박! 그것도 초대박이야!'
벨베르트는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유진은 파벌의 중심인물 정도가 아니라 파벌장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나 기뻐하던 것도 잠시.
'... 어..?... 어어..?... 그... 근데 좀.. 너무.. 뭉쳐있지 않나?'
처음에는 기뻐하던 벨베르트의 입술이 덜덜 떨려온다.
같은 파벌의 인원 몇 명 정도가 뭉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파벌의 용도가 그것이니까.
하지만....
절대로 저렇게 대놓고 뭉쳐있지는 않는다.
특히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이런 연회에서는 말이다.
"... 저... 저거."
"아무래도..."
이쯤 되니 눈치 없던 귀족들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 이.... 이러면... 안되는데?'
지금 무엇보다 벨베르트를 두렵게 만드는 점은 유진의 파벌은 단순히 권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은 당연하고 종교(릴리스), 재력(루시아), 무력(칼리오페), 심지어 정통성(리아나)마저 가진 파벌.
그런 파벌이 황제의 즉위식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대놓고 자신들의 세력을 드러낸다?
그 뜻을 이해한 몇몇 귀족들이 서둘러 도망치려고 했지만...
"미안~♪ 지금 여기는 통행금지야. 돌아가줄래?"
"저.. 전하... 그... 급한 용무가... 떠올라..."
"... 돌아가라고 말하는거... 안들리는 걸까나?"
"네.. 넵..."
황녀 전하의 제지로 도망칠 수 없었다.
"...."
"...."
소름 끼치는 침묵이 연회장에 내려앉았다.
모든 사람이 유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슬슬 오시는군."
끼이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용문이 열렸다.
"라인그람 루멘하르크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수행원의 입에서 처음으로 이름과 성 이외의 단어가 붙었다.
그래 봤자 황제 폐하라는 단어 하나가 붙었을 뿐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황제라는 말 이외 다른 것으로 라인그람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벅─ 저벅─
머리 위에 왕관을 삐딱하게 걸친 채 여유와 품격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라인그람.
'달라...'
벨베르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황태자일 때도 몇 번이 라인그람을 봤지만, 황제가 된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단어를 의인화시킨 것만 같은 인간.
딱히 위압감을 뿜어내는 것도 아닌 것만, 라인그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복종하고 싶어지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스윽─
라인그람이 옥좌에 앉자 연회장에 있는 귀족 중 지위가 낮은 순부터 한 명씩 무릎을 굽혔다.
스윽─
하급귀족, 상급귀족, 그리고 대가문의 가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무릎을 굽혀지고 마침내 리아나 루멘하르크까지 무릎을 굽혀졌지만....
'서... 설마..?'
단 한 사람.
유진 칼리오페.
그의 무릎은 굽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