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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68화 (268/354)

Chapter 268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5)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라인그람의 즉위식이 별 탈 없이 끝나고, 뒤풀이 연회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황제의 권세를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연회장에 가득 채워진 산해진미들은 귀족들이라도 쉽게 맛보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 흐음."

그때, 한 여자가 고용인이 나르던 와인잔에 손을 뻗었다.

"좋은 와인이네. 우르엘라산인가?"

여자의 이름은 빌베르트 린달라.

병장기와 방어구 등을 유통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린달라 가문의 가주였다.

"예, 맞습니다. 단번에 맞추시는 걸 보니 미식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뭐, 좋은 건 죄다 우르엘라 산이니까. 그보다 한 잔 더 줘."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 빌베르트는 새 와인잔을 들고서 연회장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하아, 눈도장을 찍는 것도 일이라니까...."

연회장에 들어오고부터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눈도장을 찍으러 다녔다.

사실 린달라 가문의 가주 정도 되면 인사를 하는 경우보다는 인사를 받는 경우가 더 많지만...

벨베르트는 굳이 비슷한 격의 가문에도 찾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술맛이라도 좋아서 다행이지."

대부분의 귀족은 그것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만, 벨베르트는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얻은 수많은 귀족과의 연줄이야말로 벨베르트가 젊은 나이에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던 이유였다.

"연회의 주인공님께서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잠깐 숨이나 좀 돌릴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벨베르트의 시선은 연회장의 문 쪽을 향했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부 인사를 나눴으니, 문을 주시하다가 적당한 상대가 들어온다면 곧바로 말을 걸기 위한 심각한 일 중독자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문지기가 외쳤다.

-유진 칼리오페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칼리오페라는 이름에 순간적으로 몰리는 시선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검은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 흐음."

흰 정장과 대비되는 검은 셔츠.

남자치고는 드물게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반지마저 잔뜩 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즉위식의 연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양아치 같은 차림이었으나....

외모가 워낙 뛰어난 탓에 그 모습조차 천박함이 아니라 패션으로 소화해냈다.

'... 유진 칼리오페라. 분명 칼리오페의 삼남이었지.'

벨베르트는 입안에 머금은 와인을 음미하며 기억을 되새겼다.

린달라 가문이 잘 나간다고 한들, 대가문인 칼리오페와 견줄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영지나 작위조차 받지 못한 삼남에게 가주가 먼저 인사하러 갈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실제로 잠깐 칼리오페라는 이름에 흥미를 느꼈던 몇몇 귀족들도 삼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금방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굳이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지... 인사를 온다면 받아 줄까.'

굳이 가서 인사를 할 생각은 없지만, 저쪽에서 먼저 찾아온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즉위식과 달리 이 연회장은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관록이 붙을 정도로 격식 있는 장소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유진 칼리오페가 참가했다는 건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는 증거였다.

'... 어머, 벌써 파벌에도 들어가 있네? 저 문양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보통 이런 식으로 사교계에 등장하면 보통 들고자 하는 파벌의 일원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끔 있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후계구도에서 밀려났지만, 그건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라 생각해 파벌을 만들고 자신 있게 문양을 달고 오지만...

그중 절대다수는 얼마 가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해체되고 만다.

'... 당연한 일이지.'

이 복마전 같은 사교계에서 자신만의 파벌을 키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다면 애초부터 가문의 후계구도에서 밀리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비앙카 베아트리스, 비비안 베아트리스님께서 입장하십니다.

"... 호오..."

"오..."

그때 다시 한번 문지기가 외쳤고,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자매.

동생처럼 보이는 쪽의 몸매는 상당히 빈약했지만... 반대로 언니 쪽은 말도 안 되는 크기의 가슴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 정도 가슴이면 아래가 보이기는 해...?'

나름대로 몸매에 자신감이 있던 벨베르트였지만 저 규격 외의 가슴에는 도저히 비빌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순간적으로 가슴에 정신이 팔렸지만, 벨베르트는 고개를 한 번 흔드는 것으로 잡념을 떨치고 상대방과의 격을 가늠했다.

'베아트리스 가문... 우르엘라의 비호를 받고 있던 가문이었던가?'

정통성은 있지만, 힘이 없었던 가문인데 최근 들어 우르엘라의 눈에 들어서 급격하게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다.

'아직 가문도 성장 중이고 일단 외모가 저렇게 뛰어나니까 나쁘지 않.... 응? 저 파벌 문양은...?'

베아트리스 자매가 달고 있는 파벌 문양을 확인한 벨베르트는 다시 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는커녕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

보통 저런 경우 예의가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워낙 뛰어난 외모 탓에 몇몇 귀부인과 영애들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벨베르트에게 중요한 건 유진의 외모보다는 가슴에 달린 파벌의 문양이었다.

'역시 똑같잖아...'

생각한 대로 유진이 달고 있는 파벌 문양은 베아트리스 자매의 것과 똑같았다.

'... 그래서 저렇게 오만한 건가.'

떠오르고 있는 베아트리스의 가문의 자매를 파벌에 넣었으니 저렇게 오만한 태도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직 멀었네.'

베아트리스 자매를 파벌에 넣은 정도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새로운 파벌이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원래부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파벌을 세웠거나, 그만한 전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진의 파벌은 아직 어느 쪽도...

─가르시아 마이샤, 레이카 칼리오페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또다시 입장하는 여인들.

'... 이번에는 상당한 거물이네.'

가주 다툼에서는 밀렸다지만 아직 북부의 사교계는 칼리오페의 가주가 아닌 저 모녀가 잡고 있다는 건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귀족들도 모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어야 할 벨베르트는 제자리에 굳어있는 채였다.

'뭐야...?'

모녀의 가슴에 달린 두 개의 파벌 문양.

한 개야 본래 칼리오페 모녀가 가입한 파벌의 문양이었지만, 또 하나의 문양은...

'뭐야? 무슨 일인데..? 저걸 왜 모녀가 달고 있어? 차남을 정면에 세우는 대신 삼남을 화살 받이로 세운 건가? 아니, 그런 것 치고는...'

머릿속에 혼돈의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문지기가 외쳤다.

─릴리스님께서 입장하십니다.

'... 이건 또 뭐야? 어떻게 평민이 연회장에 초대받은 거야? 혹시 대상인라도 되는... 푸웃..!'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벨베르트는 와인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 저... 저거... 서... 성녀 아니야?'

혹시 몰라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지만 성녀가 확실했다.

여신교의 고위직은 결코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는 불문율을 깨고 성녀가 참가하다니!

황제 폐하께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자... 잠깐만.. 기다려봐.... 저... 저거..!!'

성녀의 참여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더 놀라운 건 성녀의 가슴에 달린 똑같은 파벌의 문양이었다.

"성녀님께서 연회에 참석하다니요.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과연 라인그람 폐하의 인망이 대단한가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라인그람 폐하 만만세입니다."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대화에 벨베르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멍청한 새끼들!!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여기저기서 성녀라는 존재에 대해 눈치채고 황제 폐하의 위대함을 떠들어 대지만 아직 가슴에 있는 파벌 문양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후우... 후우... 진정해. 벨베르트. 상황이야 어떻든 일단 인사부터...'

일단 벨베트르가 성녀에게 인사를 올리러 가려고 하던 순간.

─에르덴 칼리오페, 로즈 아멜리아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또 다른 거물이 입장했다.

"이건... 처음 보는 파벌 문양인데요? 칼리오페의 가주님께서도 파벌을 세우셨나 보군요."

"... 그러고보니 아까 성녀님도 저 파벌 문양을 가지고 있던 것 같은데..."

"설마... 칼리오페의 가주님이 성녀님을 불러들였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는 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는 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여신교의 성녀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일 정도의 파벌의 장이라면 칼리오페의 가주 정도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식적으로는 그것이 당연하겠지만...

'... 아니야!!... 에르덴 칼리오페가 아니야.'

벨베르트의 직감은 에르덴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리아나 루멘하르크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흐흥♪"

이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화려한 금발의 미녀는 연회장의 시선을 한순간에 빼앗았다.

비록, 황위 계승권에서는 밀려났다지만 라인그람 황제가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리아나만이 유일한 핏줄인 것도 사실.

만에 하나 라인그람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차기 황제는 리아나가 될 것도 확실했다.

물론, 이것도 벨베르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정신은 온통 리아나가 달고 있는 파벌의 문양에 가 있었으니까.

'여, 여... 역시 똑.... 같아...'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도대체 지금 이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루시아 우르엘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어서 제국의 달이 입장한다는 말에 벨베르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서... 설마...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는... 아... 아니겠지....'

두려움과 기대로 가득 찬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깊게 심호흡을 한 벨베르트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자.

반짝─

루시아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 허어억!!!.. 끅... 끄르륵...'

감당할 수 없는 정보에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벨베르트는 확신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뭔가 엄청난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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