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5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2)
"혹여...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에르덴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절대로 아닙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권력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황제처럼 골치 아픈 자리는 그냥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다.
지금도 루시아에게 한마디만 하면 우르엘라의 권력과 자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을 텐데, 거기서 조금 더 얻겠다고 황제의 자리를 노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자 에르덴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믿어주시는 겁니까?"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에르덴이 이렇게 쉽게 믿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좀 놀랐다.
사실 이 정도 세력을 한군데에 모은다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반란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네 형이지 않으냐. 형이 동생을 믿는 건 당연한 일이지."
"형님..."
에르덴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신뢰에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받고자 한 말이 아니니 고개를 들어라. 그보다 아직 즉위식 참여에 필요한 준비가 덜 끝났다. 그러니 더 할 이야기는 없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어떠냐?"
"... 네, 형님. 내일 즉위식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에르덴과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자... 잠깐만..!"
로즈가 방안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 로즈님?"
"그... 그러니까. 도련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네, 얼마든지요..."
잠시 입술을 씹어대던 로즈는 갈색 피부에서도 뚜렷하게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 그... 그러니까... 두.. 두... 둘이 어디까지 했어?"
"....?"
당연히 파벌에 대한 질문이 들어 올 것으로 생각한 터라 로즈의 말뜻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로즈님 어디까지 했냐고 무슨 의미이신지...."
"그... 그러니까...!!... 지...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냐는 말이야! 키... 키... 키스는 했어?"
그러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에르덴이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로즈!!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고 해도 그런 질문은 너무....!"
"중요한 질문이니까 에르덴은 조용히 해!!"
로즈가 눈을 치켜뜨며 날카롭게 노려보자 에르덴이 입을 다물었다.
'.... 이거 아무래도 잡혀 살겠네.'
냉정과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 줄 알았던 에르덴조차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 그래서! 도련님. 두... 둘이.... 키... 키... 키스는 했어?"
키스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로즈의 모습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했기는 했지만.... 그 실례지만 혹시 두 분께서는 키스도 아직이십니까?"
"그렇지 않다! 키스는 했다!"
에르덴이 당당히 대답하자 내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렇지... 키스는 했겠지.'
키스도 아직 안 했다면 에르덴 형님이 고자는 아닐까 하는 불충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 우리가 키스를 했다고?"
그러자 로즈가 이를 까득 갈고는 에르덴에게 소리쳤다.
"하지 않았느냐 로즈!"
"그래! 했기는 했지! 따아아악! 1번 말이야! 그것도 편지를 받고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내가 먼저 달려들어서! 그 뒤로 우리가 키스 한 적 있어?!"
"1번도 한 것은 한 것이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로즈, 너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만큼 적어도 결혼할 때까지는..."
"아니!! 진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우리 결혼까지 얼마나 남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손을 댄다는 게 말이나 돼!!!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로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루시아에게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형님이 줘도 못 먹는 남자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
그러자 어째서인지 루시아로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 루시아?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주인님. 슬슬 아주버님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루시아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로즈와 에르덴의 말다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에르덴! 혹시 그곳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문제 있으면 지금 미리 말해! 내가 당장 약이라도 지어줄 테니까!"
"로즈! 무슨 망측한 소리를 하는 거냐!"
언제나 냉정해 보이던 에르덴의 저렇게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왜 대답을 못 해!! 진짜 문제 있는 거야!!"
"망측한 소리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 그곳에는 아무 문제 없다!"
"못 믿어!! 그럼 증명을 해보라고!"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나!"
"그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해!!!"
하지만 계속 감상하고 있다가는 로즈가 에르덴의 바지를 찢어버릴 기세였기에 슬슬 끼어들어야 했다.
"내가 형님을 맡을 테니, 루시아 너는 로즈님을 맡아다오."
"네, 주인님."
나와 루시아는 각각 에르덴과 로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형님.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 하아. 미안하다. 네게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에르덴이 사과했지만, 나로서는 기쁠 따름이다.
원작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지금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에르덴과의 관계를 아주 잘 쌓았다는 증거였으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로즈와 루시아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음 내가 입을 열었다.
"형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두 분의 관계에 대해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 말해보거라."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형님, 여자가 저렇게까지 해는데 안 받아주는 건 절대로 아껴 주는 게 아닙니다."
"... 아껴 주는 게 아니라고?"
"네, 입장을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남자에게 수치심을 무릅쓰고 유혹하였는데 거절당했다면... 여성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아주 큰 잘못이지요. 그런데... 혹시나 싶어 묻겠지만 형님의 눈에는 로즈님이 매력적이지 않은 겁니까?"
"그럴리가! 내게 로즈는 이 세상 누구보다 매력적인 여자다!"
에르덴이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워낙 큰 목소리여서 로즈에게도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좋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를 믿고 그냥 솔직히 표현하십시오. 로즈님과 이런 사이가 된 것도 제 말을 믿고 감정에 솔직해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네 말이 맞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무엇입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에르덴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 나는 아직 경험이 없다."
"...."
세상에 에르덴 형님 동정이었다니...
진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것 같은 충격이었다.
"혹시 오해할 것 같아 말하지만, 로즈도 경험은 없다고 말했다."
"오해는 하지 않았지만 알겠습니다... 그런데 둘 다 경험이 없다면 뭐가 걱정입니까? 서로 맞춰가면 되지 않습니까?"
"...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남부 지방에서는 그런 쪽의 수업도 듣고 온다고 배웠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부는 더운 지방인 만큼 옷이 얇고, 그러다 보니 성적으로도 개방적이었으니까.
"혹시 내가 부족하여 로즈를 실망하게 하면 어쩔지 두렵기도 하구나..."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형님이라면 충분히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리오페의 남자가 아닙니까."
족보를 확인해보면 칼리오페의 남자는 기본적으로 평균 3명에서 4명의 여자를 거느릴 정도의 정력을 지녔었다.
'거기에...'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나와 케일의 경우를 봐서는 에르덴의 크기도 상당할 것이다.
전에 봤던 케일도 나에 비하면 한참 작았지만, 일반인과 비교하면 대물에 속하는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지르십시오."
"... 유진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다."
"꼭 입니다. 형님."
에르덴과 대화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아도 방에서 나왔다.
"수고했다 루시아."
"아니에요. 주인님. 엄청나게 간단했던 걸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 익숙한 물약을 꺼냈다.
트리스티아의 특제 정력제였다.
"로즈님께 한 병 드렸으니까. 잘 사용하실 거에요."
'침대 위의 왕자'를 가지고 있던 나조차 이성을 잃을 뻔한 약인데 그걸 그냥 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시겠지.'
이 이상 관여하는 건 오지랖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럼. 가볼까.'
가르시아와 레이카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아무래도 쉽지 않을 거 같다."
루시아가 같이 와봤자 신경전만 펼칠 게 뻔했으니, 나는 혼자서 가르시아와 레이카를 만나러 왔다.
"안된다는 말씀입니까?"
파벌 문양을 달아달라는 말에 예상 밖으로 난색을 보이며 거절하는 가르시아.
"... 아..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좀 필요하다."
"얼마나 말입니까?"
가르시아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답변은 레이카에게 돌아왔다.
"최소한 두 달. 가능하면 반년은 필요해요."
"즉위식은 당장 내일입니다. 그건 너무 늦어요."
"오라버니... 지금 저와 어머니가 들어가 있는 파벌은 단순히 정치세력이 아닌 북부의 가문을 통합하는 파벌이에요. 식량부터 시작해서 군사, 세금 등 다양한 문제가 파벌 안에서 결정되는데 갑자기 저와 어머니가 빠지게 되면 북부에 큰 혼란이 찾아올 거예요."
"...."
그건 좋지 않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부에서 대규모 마물 침공이 있을 예정이다.
완벽히 통솔된 상태에서도 막기 어려운 침공을 혼란에 빠진 북부가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문양을 두 개를 다는 것은?"
두 개의 문양을 동시에 다는 건 드물지만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다.
특별한 사유로 파벌의 이중가입을 허용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미리 말하지 않았던 일이니 북부 귀족들의 동요는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네, 오라버니.... 하지만 상당한 골치 아픈 일이 될 텐데 이걸 해결하려면 제법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계속 말끝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가르시아와 레이카를 보다 보니 대충 둘이 바라는 게 뭔지 감이 잡혔다.
쿵─
내가 책상 위로 다리를 거만하게 올리자, 레이카와 가르시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아들?"
"오... 오라버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두 사람이 원하는 게 뭔가요?"
그 말에 얼굴을 붉힌 가르시아와 레이카가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하고는 이내 레이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보.. 보상을... 받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