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4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1)
라인그람 루멘하르크의 즉위식 하루 전.
나는 에르덴을 만나기 위해 그가 묵고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예를 표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에르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는 우리뿐이니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편하게 있거라."
"맞아, 맞아~.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편하게 하자고."
건강미 넘치는 갈색 피부와 잘 익은 오렌지가 떠오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여인은 에르덴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가족끼리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잖아?"
여인의 이름은 아멜리아 로즈.
남부를 다스리는 아멜리아의 가주, 레온 아멜리아의 친누나였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응응! 나와 에르덴이 이어지도록 도와준 게 도련님인데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얼마든지 편하게 있어!"
에르덴 형님에게 팔짱을 낀 채 환하게 미소를 짓는 로즈는 이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그게 어떻게 제 덕이겠습니까. 제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형님에게 꽃 한 송이와 편지를 보내라고 했을 뿐입니다."
"후후훗! 그게 고작은 아니지. 나한테는 그 편지와 꽃이 얼마나 기뻤던 줄 아니? 에르덴에게 몇 년을 좋아한다는 티를 냈는데 반응이 없어서 포기하려고 결심했는데..."
그렇게 말한 로즈가 가슴골 사이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날 이 편지가 딱 도착했단다?"
"로즈...!"
편지를 본 에르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걸 왜 여기서 꺼내는 거지? 아니, 이 자리에 굳이 가져왔어야만 했나."
"후후훗... 당연히 가져와야지. 여기에 에르덴의 애정이 얼마나 듬뿍 담겼는데. 몸에서 한시라도 때놓을 수 없거든. 어때? 도련님? 편지의 내용이 궁금해?"
"로즈!!"
무표정하기로는 멜피사에 버금가는 형님이 저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조금 궁금하기는 하군요."
"유진! 너 마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에르덴.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그러자 로즈가 다시 가슴골 사이로 편지를 집어넣으며 윙크를 날렸다.
"후후훗. 그래도 미안하지만 보여줄 수는 없어. 이 편지는 에르덴이 나를 위해서만 적어 준 편지인 걸... 오직 나만이 알고 있어야지."
"그거 참 아쉽군요."
"그래도 도련님이니까. 정 궁금하면 간단한 내용 정도는 말해 줄 수..."
그 순간 에르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제 그만하도록...!!"
에르덴의 달아오른 얼굴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창피함을 견디기 힘들어 소리를 지른 느낌이었다.
'... 많은 것이 바뀌었다.'
본래 같았으면 에르덴과 로즈가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서 농담을 던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아카조교사'의 세계관에서는 에르덴과 로즈는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그 감정을 전하지 못해 어느 순간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버린 관계였으니까.
"... 에르덴... 화났어?"
로즈가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며 묻자, 다시 의자에 앉은 에르덴은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대답했다.
"아니, 화난 건 아니다. 다만.... 창피하니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후후후, 너무 놀렸나 보네. 알아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거기까지 말한 로즈가 조금 떨어지자 에르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유진, 네가 이렇게 따로 만남을 요청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예, 형님. ... 오늘은 약속하셨던 한 번의 부탁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내가 에르덴이 칼리오페의 가주에 오르는 걸 도와준 대신, 에르덴은 이유를 묻지 않고 부탁을 한 번 들어주기로 했었다.
물론, 계약서를 쓰거나 맹약을 건 것은 아니라 강제적인 효능은 없지만, 에르덴의 성격상 약속을 깨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다. "
그리고 예상대로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에르덴.
"감사합니다. 제가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이것입니다."
나는 에르덴에게 파벌의 문양의 브로치를 건넸다.
"... 이건. 파벌의 증표군."
"네, 형님께서는 그 브로치를 착용하시고 내일 즉위식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칼리오페의 전 가주 에다드는 파벌에 속해있지 않았다.
정치에 관련된 것 대부분은 안주인이었던 가르시아와 레이카가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그 둘한테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가야지.'
가르시아와 레이카는 이미 파벌에 가입되어있겠지만....
내가 부탁하면 별 말 없이 들어 올 것이다.
"알겠다."
대가문의 수장이 특정 파벌의 문양을 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에르덴은 약속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설임 없이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흐음... 도련님. 저 브로치 하나 더 있어?"
"네, 있습니다."
로즈의 말에 내가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건네자.
스윽-
그걸 받아든 로즈는 곧바로 자신의 옷에 브로치를 달았다.
"로즈님?"
"로즈...?"
동시에 나와 에르덴이 놀란 눈으로 로즈를 쳐다보았다.
"뭐야? 내가 뭐 이상한 짓 했어? 왜 그렇게 놀라?"
"그치만 그건 제 파벌의..."
"후후훗. 남편의 파벌이 내 파벌인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도련님 파벌 할게."
"그래도 로즈, 당신은 이미 속한 파벌이 있지 않았나?"
"로즈는 그런 거 몰라. 이제 나한테는 당신이 전부인걸?"
그렇게 말하며 로즈가 에르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후후훗, 마음 같아서는 동생한테도 달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네. 그래 보여도 아멜리아 가문의 가주라서 말이야. 파벌을 하나 맡고 있거든. 이해해줘 도련님?"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로즈님께서 달아준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고. 그러면 이제 파벌원으로서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그러시지요."
이미 가주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로즈지만, 그녀는 아멜리아 가문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런 로즈를 파벌로 받아들인다면 질문 정도는 몇 개가 아니라 수 백 개도 받아 줄 수 있다.
"지금 파벌에는 누가 속해있어?"
"일단 베아트리스 가문의 장녀와 차녀입니다."
"음... 베아트리스 가문이라 요즘 제국 서부에서 떠오르는 신흥가문이지? 우르엘라 가문에서 밀어주고 있다는 건 들었는데 제법 좋은 가문을 넣었네."
로즈가 조금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칼리오페 가문의 핏줄을 가졌다고 해도, 영지도, 작위도, 재산도 물려받지 않은 삼남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최근 부흥하는 베아트리스 자매를 파벌원으로서 손에 넣은 건 저런 감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만...
로즈가 한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베아트리스 자매는 시작에 불과하는 것을.
"그리고 여신교의 성녀."
"... 여신교의 성녀... 응?... 도련님?... 지금 뭐라고... 했어?"
"우르엘라의 가주."
"자... 잠깐만... 도련님. 지금 서... 성녀랑, 우르엘라라고....?"
"마지막으로 황녀 전하."
"???"
"일단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정도 군요."
내 말이 끝나자 로즈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도련님. 이거 농담은... 아니지?"
"네, 전부 사실입니다."
"하아.... 베아트리스 가문이야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솔직히 믿기 어렵네..."
"이해합니다. 저라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믿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나조차도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는 말부터 나왔을 테니까.
"... 그치? 혹시 가능하다면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아! 농담이었다고 해서 파벌 가입은 취소하지는 않을 거야. 말했다시피 남편의 파벌이 내 파벌이니까."
"그럴 줄 알고 미리 불러두었습니다."
"불러두었다고...? 누구를?"
"루시아를요."
"루시아....? 루시아라면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를?"
"네, 지금은 차기 가주가 아니라 정식으로 가주의 자리를 계승했지만 말입니다. 시간을 보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루시아에게는 30분 뒤에 찾아오라고 전했으니 이제 슬슬 도착할 것이다.
그런 생각 하기가 무섭게 똑똑하는 소리와 함께 고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다드님. 우르엘라의 가주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모시고 오게."
"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고 정갈한 드레스 차림의 루시아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드시죠. 우르엘라의 가주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우르엘라의 가주로서 숙인 고개가 아니라 아주버님을 뵙었기 때문에 숙인 고개라고 생각해주시죠."
"아, 아주버님?!"
루시아의 말에 아멜리아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하긴, 제국의 달이 자기 올케가 된다면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된다.
"네, 로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그러게... 근데 아주버님은..."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주.... 유진이와 이어질 것이니까요."
순간 말실수를 할 뻔했지만, 끝까지 담담하게 말하는 루시아와 달리 아멜리아의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그... 그러면.. 도련님이 말한 건 전부..."
"그러면... 네, 전부 사실입니다. 황녀 전하, 성녀님, 베아트리스의 자매, 그리고 까지 모두 파벌에 속해있습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으시다면 다른 사람들도 불러올까요?"
"아... 아니야.... 믿지... 우르엘라의 가주가 직접 말하는데 어떻게 못 믿겠어..."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이마를 붙잡자, 에르덴이 말을 이었다.
"루시아님."
"루시아로 충분합니다. 아주버님."
".... 그래, 루시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둘의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나?"
".... 아."
에르덴이 가주 자리에 오른 날, 나와 루시아가 말다툼한 것 때문에 그런듯했다.
"그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버님."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꼭 필요한 연기였습니다."
나와 루시아의 말에 잠시 이마를 짚고 생각을 정리하던 에르덴이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알겠다. 유진. 네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네, 말씀하시죠. 형님."
"이렇게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서 무슨 짓을 벌일 셈이냐?"
그 순간, 에르덴의 목소리와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내게 물었다.
"혹여...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