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일단 하고 생각하죠 (1)
* * *
싸늘하다.
“유진군?”
양호 마망의 날카로운 눈빛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꽃힌다.
“이번에는 위험한 일 없을 거라 하지 않았나요?”
“...”
분명 능력치는 내 쪽이 한참 위일 텐데 어째서인지 양호 마망의 위압감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유진군? 사람이 질문하면 대답을 해야죠?”
양호 마망의 추궁에 나는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아... 정말 맨날 입으로만 죄송하다고 하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요? 유진군을 찾으러 가고 싶어도 양호실에는 끝도 없이 환자가 와서 가지도 못하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아이리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리스와 릴리스가 아니었다면 분명 폭동 속에서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좋게 끝나지는 않았겠지.’
귀족파와 평민파.
어느 쪽이든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분명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테니까.
“...그것보다 리아나의 상태는요?”
나는 말을 돌릴 겸 침대 위에 있는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양손을 배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리아나의 얼굴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리아나의 몸속에서는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좋지는 않아요. 저도 나름대로 치유사로서 오랫동안 활동해왔지만 이렇게 폭주하는 마력을 본 건 처음이니까요.”
아이리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완전히 망가진 방을 둘러보았다.
‘맹약을 어긴 대가...’
옥상에서 리아나와 손을 맞잡은 이후.
나는 일단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리아나를 숨기기 위해 구교사의 조교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조교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아나의 마력이 갑작스럽게 폭주해 구 교사 전체가 무너질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아나가 잠시 제어를 되찾아 폭주하던 마력을 몸 안에 가둘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후로 눈을 뜨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손등 위로 아이리스의 손이 얹어졌다.
“유진군,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아요. 마력 폭주가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황녀 전하의 생명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생명에 문제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눈을 바라보자 아이리스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읏...유진군도 느끼고 있겠지만 지금 황녀 전하는 마력을 잃고 있어요.”
양호 마망의 말대로 리아나의 몸에서 급속도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마력을 잃는다는 건 마법을 사용했을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는 마력이 아니라 마력을 담는 그릇 자체가 깨진 것이다.
“이런 상태인데 생명에 문제가 없다고요?”
“네, 믿기 어렵지만, 저만큼을 잃어도 아직 마력이 한참 남아있으니까요. 평범한 사람이 저 정도로 마력을 잃게 된다면 목숨이 위험하겠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마력량이 워낙 방대한 터라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듣고도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마력을 담는 그릇이 깨지기는 했지만, 그릇이 워낙 커다란 탓에 깨진 그릇에 고인 마력량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과연 ‘아카조교사’의 히든 보스다웠다.
“그리고 잠들어있는 것도 마력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서인 거 같은데 이대로 며칠만 있으면 마력이 바닥나 황녀 전하께서도 눈을 뜨실 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그릇이 깨졌으니 예전처럼 무시무시한 짓을 하지 못하겠지만, 리아나가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 할 따름이다.
“다행이네요.”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휙 돌리며 속삭였다.
“....유진군 미워요.”
“갑자기요?”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내가 놀라 되묻자 아이리스가 입을 다문 채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선생님?”
“왜요. 뭐요.”
“너무 가깝지 않나요?”
“어쩔 수 없잖아요. 침대 빼고는 다 박살 나서 앉아 있을 곳이 없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다섯 명이 누워도 남을 정도의 크기의 침대인데 아이리스는 내 옆에 딱 붙어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생님?”
아이리스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아이리스?”
이름까지 불러보지만, 아이리스의 손은 멈추기는커녕 점점 더 대담해져 간다.
“아이리스 지금 뭐하는...”
“아! 몰라요...! 오랜만에 마력을 잔뜩 써서 그런지... 이제 못 참겠다고요!”
계속되는 추궁에 얼굴을 붉힌 채 화를 내는 아이리스.
그 모습이 귀여워 실소가 흘러나왔다.
“양호 선생님이 환자를 앞에 두고 이런 짓을 해도 돼요? 너무 야해진거 아니에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걸요. 그리고 유진군.... 야한 저는 싫어요?”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리스.
쪼옵─
대답 대신 입술 맞추자, 눈을 잠깐 크게 뜬 아이리스가 팔로 목을 휘감으며 혀를 밀어 넣는다.
“하아...유진군...”
그렇게 숨이 부족 할 때까지 키스하고 떨어지는 아이리스.
둘 사이에 타액의 실이 길게 늘어졌다.
스윽─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이리스가 상의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하려고요? 황녀 전하도 있는데?”
“어...어차피 잠들었잖아요. 애초에 유진군 잘못이에요. 그 동안 저를 얼마나 방치해둔지 알아요! 더는 못 참겠다고요...”
“알았어요. 알았어.”
칭얼거리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내가 못 이긴 척 넘어가려고 하자...
“주인님.”
“꺄아아아아아악!”
루시아의 등장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는 아이리스.
“루...루루...루시아양? 여..여기는..어...어떻..아니...이..이건..그런게...”
아이리스가 뭔가 변명을 하려고 열심히 말해보지만 긴장했는지 계속 말을 더듬는다.
그 탓인지 나도 왠지 루시아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황실에 서신을 보냈어요. 우르엘라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보낸 서신이니 황태자 전하께 바로 전해질 거에요.”
“어...그래..”
나는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의 말 때문이 아니라 행동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아이리스와 내 사이로 루시아가 엉덩이를 밀어 넣어 앉았으니까.
“....??”
당황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닌지 아이리스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저와 주인님의 이름으로 칼리오페 가문도 서신을 넣었으니 칼리오페 측에서도 곧 황실로 황녀의 탄원서가 들어갈 거에요.”
“...응, 잘해줬어.”
“내용은 비롯 방식의 잘못됨은 있더라도 리아나 루멘하르크의 모든 계획은 제국을 위한 것이었다. 추후 반란 세력을 처리할 때도 적극적인 정보제공을 할 예정이다. 이런 식으로 보냈는데 부족할까요?”
“아니, 충분해 수고했어.”
사실 탄원서를 보내도 리아나의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황실의 일원이 제국에 반기를 든 것이니까.
하지만 리아나의 힘을 알고 있는 황태자로서는 괜히 리아나를 자극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거기에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가 서한을 보냈다는 건 우르엘라 가문 쪽에서도 황녀를 보호하겠다는 뜻.
곧이어 칼리오페 가문에도 서한을 받는다면 기껏해야 황위 계승권의 박탈 정도로 합의를 보지 않을까 싶다.
“...저기...루...루시아양?”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지 대화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아이리스가 루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자...잘못들은거면 죄송한데... 지금... 유진군에게 주인님이라고...”
“아...”
그때야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일이 터져서 깜빡 잊고 있었지만, 아직 아이리스는 나와 루시아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정리해야겠네...’
한 번 여자들을 모아서 전부 안면을 트게 하든가 해야지.
누구는 관계를 알고 누구는 관계를 모르고 헷갈리기 짝이 없다.
‘근데... 내가 기억하지 못했더라도 루시아는 기억하고 있을텐데...’
그러자 루시아가 내 손을 붙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 이분이 제 주인님에요.”
“그...그럼...두...둘이 혹시...”
“저는 주인님의 첫.번.째. 육변기에요.”
“육..변..육변기요?”
루시아의 입에서 육변기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머리가 어지럽다.
‘아니, 물론 내가 그렇게 조교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잘 숨기고 있었으면 너무 갑작스럽게 공개하는 거 아닌가.
“어...언제부터....유진군과...그..그런...관계가....”
“처음부터요. 지금까지 제가 주인님 곁에 있지 않았던 건 리아나를 잡기 위해서였어요. 리아나를 쓰러트린 지금은 감출 이유도 없죠.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도 주인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유진군! 똑바로 말해봐요! 도대체 여자가 몇 명이에요! 그리고 육변기는 무슨 소리인가요!”
루시아의 말을 들은 아이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내게 화를 내었다.
“....”
너무 쓰레기 같지만 나도 내 여자가 몇 명인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어디까지를 내 여자라고 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섹스했다고 해서 다 내 여자라고 소개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클라리스와 엘라리스는 확실히 내 여자가 아니지.’
둘은 서로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일까.
만나면 섹스는 하겠지만 딱히 특별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레이카와 가르시아는 애매하다.
둘은 내 여자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머리를 붙잡고 고민하고 있자 루시아가 아이리스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만일 선생님은 주인님 곁에 여자가 많다면 떠날 건가요?”
“그...그런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럼 아무런 상관이 없죠?”
“...사..,상관....어..없죠..?...없나?”
간단하게 아이리스를 제압한 루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주인님과 결혼해도 곁에 있을 수는 있겠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