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9화 (219/354)

〈 219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9)

* * *

트리스탄의 도움으로 기숙사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하아...하아...”

고작 복도를 걷고 있을 뿐인데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몸은 바윗덩어리라도 짊어진 듯 무겁다.

‘...루시아는?...황녀는 어디 있지?’

문제가 있는 건 몸 상태뿐만이 아니었다.

머릿속 역시 안개가 낀 것처럼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마법을 몸에 새긴 후유증 탓이다.

트리스탄의 말대로였다.

육체에 마법을 새기는 건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불에 달군 수천 개의 바늘을 동시에 쑤셔 넣으면 이러할까.

글자가 등에 새겨질 때마다 꽉 깨문 어금니가 으스러지고, 눈에 있는 핏줄이 터져 흰자가 붉게 물들었다.

‘...세계수의 축복과 기어오는 공포의 회복 효과가 아니었다면 쓰러져도 진작 쓰러졌겠지.’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몸에 결계를 새기지 않고서는 기숙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움직여...’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몸을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자...

“...주인님!”

애타게 찾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루시...아.”

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이름을 불러보려고 했지만,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건 갈라진 목소리였다.

“주인님...!주인님...!”

한걸음에 달려온 루시아가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루시아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네가 무사한 걸 보니 다행이다. 정말로 고생했...”

쿠웅─!

루시아를 체온을 느껴 긴장이 풀린 탓일까.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오며 시야가 흐릿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주인님!....정신차리세요!...주인님!!”

멀어져가는 의식.

그 속에서 들리는 건 루시아의 목소리뿐.

‘...쓰러지면...안돼...’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낸다.

콰직─

“....!”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 가득 풍긴다.

다행스럽게도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 혀를 깨물 수 있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가라앉던 의식을 단숨에 부상시켰다.

“흐끅...주...주인님...”

“...하아...괜찮다. 조금 피곤했을 뿐이야.”

나는 울먹거리는 루시아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보다 루시아.”

“...흐윽..화...황녀는 옥상에 있어요.”

루시아의 대답에 내가 피식 웃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루시아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마지막으로 루시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 있다.

이런 몸 상태로 황녀를 막아서봤자 개죽음당할 뿐이라는 걸.

아니, 설령 완벽한 상태였더라도 리아나의 자살 욕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절대로 리아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멈춰있을 수 없다.

여기서 멈춰 서면 반드시 후회할 테니까.

1회차의 내가 자신의 육체를 ‘되살아난 타락’에게 넘기면서까지 남긴 기억.

그 기억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아가야 한다.

‘가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손끝에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자...잠시만...잠시만요 주인님.”

손끝을 붙잡은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 전해드릴 게 있어요.”

머릿속에서 채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루시아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후우웅─

몇 번 경험한 덕에 루시아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감각 동기화.”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어도 루시아의 상태를 보아 황녀와 전투가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황녀를 상대하면서 마력을 남겼다고...?’

직접 경험해 본 나는 알 수 있다.

감각 동기화는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상당한 마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니까.

감각 동기화를 사용할 정도의 힘이라면 분명 황녀와의 전투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을 남겨 놓았다는 건...

‘...내게 사용하기 위해서...’

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자 루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이라면 반드시 오실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루시아의 무한한 신뢰를 느끼며 잡고 있던 손끝을 깍지로 바꾸자.

‘...이건.’

루시아가 리아나에게 훔쳐낸 감정과 기억들이 폭포처럼 내게 쏟아졌다.

놀라웠다.

지금 루시아는 감각 동기화가 폭주해 기억과 감정이 흘러들었던 걸 하나의 기술로써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후 모든 기억을 건네준 루시아가 가냘픈 숨을 내쉬며 말했다.

“...힘내세요. 주인님.”

“그래... 힘내마.”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 짜낸 루시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수고했다.”

나는 그런 루시아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벽에 기대어주고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제 뒤는 내게 맡겨라.”

**

“리아나 루멘하르크!”

처음으로 유진이 불러준 이름.

그 달콤한 울림에 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유진.”

부름에 응하듯 리아나 역시 유진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뭘 하고 있지? 말했을 텐데 이 정도의 균열은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어서 움직...”

‘일그러진 욕망’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을 표시했지만.

딱─

리아나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내리꽂힌 빛의 창살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입 다물어요. 유진이 목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요.”

“당장 풀어라, 이건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정말 시끄럽네요. 입을 찢어버리면 좀 조용해질까요?”

살기 섞인 리아나의 말에 ‘일그러진 욕망’이 이를 갈았다.

그 사이 리아나는 옷 소매를 정돈하고 머리를 살짝 빗고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후훗♬ 드디어 유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줬네.”

“바란다면 이름 정도는 앞으로 얼마든지 불러주마.”

솔직히 말해서 유진의 모습은 동화 속 왕자님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유진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겉에는 어떻게든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몸 내부는 이미 잔뜩 뒤틀려서 여기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

그런데도 유진의 눈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니, 리아나.”

시선을 마주친 유진은 마치 무도회장에서 춤을 권하는 것처럼.

리아나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내게로 와라.”

강압적이게 단언하는 유진.

그 모습에 리아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유진이가 계속 이름으로 불러주다니... 황홀할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네♬ 하지만 미안. 너무 늦었어~.”

고작 이름을 불러주겠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줄이야...

유진이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나의 말대로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살인 충동과 권태감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리아나의 자아는 소멸하고 오직 살인에서만 만족감을 느끼는 괴물만이 남겨지겠지.

‘그럴 바에는...’

어차피 죽음으로 끝날 목숨이라면 제국의 어둠은 이미 한자리에 모인 이 순간.

그들과 함께 사라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것이 리아나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었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늦었어. 유진아. 너무 늦었...”

“늦지 않았다!"

리아나의 말을 끊으며 유진이 소리쳤다.

"내가 늦지 않도록 만들겠다! 리아나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우르엘라와 칼리오페의 힘을 쏟아부어서라도 너를 구해주마!”

“후훗... 유진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제국을 기만하겠다는 거야.”

“그래! 나는 너를 위해 제국을 기만하마! 우르엘라, 칼리오페 가문이 입을 틀어막는데 감히 누가 떠들 수 있겠나! 그러니... 내게 와라 리아나!”

유진의 망설임 없는 선언에 리아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지금 유진의 말은 문자 그대로 세계보다 한 여자를 택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유진의 손을 붙잡을 수는 없다.

설령 유진이 말한 대로 제국을 기만할 수 있더라도 리아나에게 남겨진 살인 충동과 권태감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미안.’

리아나는 한순간에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제법 감동적인 연설이었어. 하지만 내가 모든 걸 버리고 너에게 가라고? 왜 그래야 하지? 고작 이름 좀 불러줬다고?”

그 질문에 유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

당연한 일이다.

리아라 루멘하르크는 제국 황녀의 지위와 셀 수 없을 만큼의 금은보화를 포기하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를 대신 할 만한 것은 세계를 다 뒤지더라도 찾기 어렵겠지.

유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리아나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거지.’

리아나의 눈에 옅은 슬픔이 담겼다.

아무리 유진이라고 해도 알 수 있을 리 없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리아나의 충동이다.

자신의 완벽한 이해자라도 되지 않는 한 그가 알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신을 완벽히 이해해주는 사람 따위는 존재할 리가....

그때였다.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유진의 입이 벌어졌고.

“...내가 너를 조교 해주마.”

역사상 최악의 고백이 리아나의 귀에 꽂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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