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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5화 (215/354)

〈 215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5)

* * *

“공자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멜피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정신이 망가질 것 같았다.

‘상황은 최악이다.’

루시아와 리아나.

귀족파와 평민파의 수장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서로 조건은 동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압도적으로 이쪽이 불리했다.

특정 파벌의 승리가 목적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폭동을 마무리하는 것이 루시아와 나의 진짜 목표였다.

‘...하지만 루시아를 잃은 귀족파가 제어될 리 없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루시아의 부재를 깨달은 귀족파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하겠지.

그렇게 본격적으로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할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야...’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폭동 하나에만 집중하더라도 제어하기 벅찬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울 만큼 루시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루시아가 강하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만.’

재능과 노력에 더불어 1회차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게 지금의 루시아다.

분명 교수진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겠지.

그러나 아무리 루시아라고 해도 리아나를 상대할 수는 없다.

만일 폭동을 진정시키는 사이에 루시아가 리아나의 손에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과연 그걸 견뎌 낼 수 있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초조함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았다.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아팠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폭동을 잠재우면서, 루시아를 구해내고, 리아나의 자살 원인까지 밝혀내야 한다고?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시야가 흐릿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도피하듯 의식이 심연 속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공자님! 정신 차리세요!!”

짜악─

그때,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과 함께 가라앉던 의식이 단숨에 부상했다.

“...멜...피사?”

“죄...죄송합니다. 공자님.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합니다!"

내 몸에 손을 댄 탓일까 멜피사가 몸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루...루시아님은 분명 공자님을 믿으며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절망해 포기하신다면... 루시아님의 믿음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합니까!”

“....”

멜피사의 말이 옳았다.

내가 루시아를 신뢰하는 만큼 루시아도 분명 나를 믿고 있을 테니까.

만일 루시아와 나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루시아는 포기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루시아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루시아를 위해서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긴 숨을 내쉰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고마워요. 멜피사. 정신을 차렸어요.”

“아...아닙니다. 그것보다 제..제가..감히 공자님의 뺨을...손...손목을 자를까요?”

“그런 헛소리 할 시간은 없어요. 지금부터 명령을 내릴 테니 잘 들으세요.”

책상에 앉은 나는 카르네아의 지도를 쫙 펼쳤다.

루시아가 진행 중이던 인원 배치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루시아를 구하는 건 뒤로 미룬다.’

이건 루시아를 버리는 게 아니다.

단지, 머리가 식고 나니 상황이 다시 해석되었기에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리아나는 루시아를 해칠 생각이 없다.’

리아나가 진심으로 루시아를 처리하고자 했으면 지금처럼 결계를 치는 게 아니라 빠르고 은밀하게 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아나는 일부로 눈에 띄려는 듯 기숙사에 결계를 쳤다.

결국, 이건 루시아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루시아가 방해하지 않기를 원하는 거겠지.’

이제 확실히 알겠다.

황녀는 지금 내게 묻고 있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과연 내가 폭동을 막아낼 수 있는지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가능한 게 당연하지.’

과대평가도 이 정도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나같이 평범한 인간이 그런 짓을 해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비록 나는 평범할지라도 내 주위에는 천재들이 존재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 위에는 루시아가 지금까지 배치해둔 인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절반이나 배치해두다니...’

인원을 배치하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퍼즐이 뒤로 갈수록 쉬워지는 것처럼 인원 배치도 남은 말이 적어질수록 난이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학생 식당 근처로 그렉 제이하르크를 유도하세요. 평민파의 케이트와는 연인 관계니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겁니다.”

더 간단히 예를 들면 루시아에게 맡긴 인원 배치가 10000피스 짜리 백야 퍼즐이었다면, 절반쯤 진행된 지금은 초상화가 그려진 500피스 짜리 일까.

“아이리스와 릴리스는 양호실에서 대기시켜 주세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부상자는 평민파와 귀족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모두 치료합니다.”

처음부터 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인원 배치도 절반쯤 진행된 지금이라면 나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님, 레부즈에가 이끄는 귀족파는 제법 수가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대로 평민파와 맞붙게 된다면 일방적인 학살이...”

“그 위치는 괜찮습니다. 교수 기숙사 근처이니 소동이 일어나는 순간 에이미 교수가 알아서 처리할 거에요.”

에이미 교수의 고유능력 ‘용언’은 언제 어디서나 사용해도 좋은 사기적인 능력이지만, 그 진가는 이런 단체전에서 드러난다.

그녀라면 혀짧은 말투로 화를 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정리해주겠지.

“대강당 쪽으로 오는 평민파들은 비비안이 아니라 비앙카에게 맡깁니다. 비비안은 루시아의 역할을 대신해줘야겠어요.”

루시아를 포함하더라도 귀족파의 최대 화력은 비비안이다.

다만, 비비안은 너무나 강력한 마력 탓에 섬세한 컨트롤이 어렵다.

만에 하나 학생들이 마법을 맞게 되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직접공격은 절대로 삼가라고 말해주세요. 어디까지나 허공에 마법을 날려서 힘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건 양쪽 파벌의 밸런스를 맞춰 서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비비안처럼 내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경우에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서 전의를 꺾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답이 있어.’

처음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인원을 배치할수록 기적적으로 귀족파와 평민파의 밸런스가 맞아 들어간다는 걸 느꼈다.

우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리아나는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던 것이다.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인원을 배치한다면 별다른 사고 없이 폭동이 끝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이가 없네.’

도대체 리아나가 어디까지 앞서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배치에서도 반드시 무력이 필요한 곳이 있었다.

‘페드로 롱기스트...’

페드로의 인성은 쓰레기일지라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실력은 확실하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평민파로 그를 상대하고자 하면 반드시 구멍이 생겨나겠지.

리아나의 실수는 아니다.

여기에 트리스탄 교수님을 넣으면 딱 알맞도록 계획되어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트리스탄 교수님은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페드로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배치를 전부 끝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렸다.

“멜피사는 제가 말한 대로 인원 배치를 진행해주세요!”

“고...공자님은 어디를 가십니까?”

“트리스탄 교수님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

쾅─!

“교수님..!”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트리스탄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네.”

트리스탄 교수는 이미 전투준비를 끝낸 것처럼 잘 손질된 망토를 걸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카데미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군... 처음에는 자체 판단으로 움직일까 했지만, 자네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아 기다리고 있었네.”

“하아...하아....잘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서 누굴 상대하면 되는 거지?”

트리스탄이 질문에 숨을 가다듬은 내가 답했다.

“...후우...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트리스탄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내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무력이 아닌 지력이 필요합니다.”

트리스탄의 앞에 앉은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황녀 전하께서 결계로 인해 기숙사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그 결계를 해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용언을 가진 에이미 교수라도 리아나의 결계를 해제 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 카르네아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결계조차 해제했던 트리스탄이라면.

분명 리아나의 결계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상당한 수준의 결계지만 결계의 전문가이신 교수님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직접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결계 해독은 몇 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닐세. 제법 시간이 걸릴 텐데 그동안 나는 이 소동에 관여할 수 없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야만 합니다.”

“그럼, 알겠네. 해독하지.”

너무나 간단하게 말하는 트리스탄의 말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결계를 해독해야 하는 이유는 묻지 않습니까?”

“자네에게는 빚이 있지 않은가. 은인이 내 힘이 있어야 한다는데 굳이 이유까지 알아야 하나? 그보다 자네가 싸우는 장소는 어디인가? 해독이 완료되는 대로 자네를 찾아가겠네.”

트리스탄의 믿음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내가 말했다.

“...아뇨, 찾아오실 필요 없습니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해석이 끝나면 그대로 기숙사 앞에서 기다려주세요.”

그러자 트리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알겠네.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러 가보게. 나는 자네를 믿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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